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SPC-1000 (문단 편집) == 소프트웨어 == 삼성전자라는 이름빨로 꽤 팔렸지만 역시나 소프트웨어 부족을 겪었다.[* 지금이야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이지만 1980년대에는 금성사(현 LG전자)와 대등한 입지에서 경쟁하였으며 세계 전자 회사로서는 듣보잡이던 시대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정기적으로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열었다. 한국 기업 중 일찍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삼성전자는 개인 제조 소프트웨어라도 육성해 보급하려고 했으며 그 일환으로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개최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모전 입상작들은 순수 창작 소프트웨어보다 샤프 MZ 계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이식이 대부분이었다. 소위 누워서 떡 먹기(상금 따먹기) 수준이었다. 물론 공모전 개최 의도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만 하다. 이 시절 삼성전자 공모전에 샤프 MZ 계열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출품해서 상금 따먹기를 한 사람들이 지금 한국 IT 파워 블로거들 중 꽤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잡지에서 개최한 1라인 컨테스트도 애플 II 호환 기종과 SPC-1000 BASIC을 대상으로 했다. 반면 그렇지 않았던 금성사는 그 결과 [[금성 패미콤#FC-100|FC-100]]를 조기에 단종시켰다. 아무튼 삼성전자의 노력 덕에 1983년에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되어 도입된 5개 기종 중에서는 애플 II 호환 컴퓨터인 삼보 트라이젬을 제외하면 그나마 가장 양호했다. [[애플 II]], [[MSX]] 계열 만큼은 못해도 있긴 있었다. 여기에는 SPC-1000의 설계 사상, 정확히는 샤프 MZ-80의 설계 사상 또한 컸다. 사진을 보듯 SPC-1000은 데이터 레코더([[카세트테이프]] 저장장치)가 장착되었는데 당시의 다른 모든 기종들은 이것이 없어서 보통의 카세트 덱을 사용해야 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으로 전시장에 장착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이 '매우 드문 것' 또한 애플 II에 한했다. (MSX는 엄청나게 희소했다가 1987년 이후에야 전시장에서 보였고 타 기종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컴퓨터 가격이 대한민국 경제사정 대비 비싸서 일반 가정에서는 엄청 희소하다 보니 소위 컴퓨터를 잘 하는 PC키드들은 전시장이나 학교 등의 PC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일반적이였는데, 당연 이런 PC들은 전시장 문 닫을때[* 전시장이다 보니 한 사람이 독점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 정도] 혹은 하교시 전원을 끄고 퇴실해야 되는데 데이터 레코더가 없는 기종 같으면 여태까지 짠 프로그램을 모두 날려야 했지만 SPC-1000 같으면 내장된 레코더에 가져온 테이프를 넣고 저장한 후,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 이어서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었다.[* 타 기종 가지고 이를 하려면 녹음기까지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워크맨류의 개인용 휴대 녹음기는 유선으로 따로 연결하면서 노이즈 등 때문에 Load/Save 등에서 에러가 나는게 다반사에, 전시장 등 공공 PC 같으면 PC가 놓여진 위치에 따라 3.5파이 선으로 연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이야 별것 아니게 보이지만 당시로는 아마추어들의 자작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 정도의 매우 큰 차이이다.[* 당장 1984년 제1회 퍼스널 컴퓨터 경진 대회(지금의 [[정보올림피아드]]) 경시 부문 최고상(대통령상)은 SPC-1000 기종으로 출전한 학생이 차지했다.] 당시 광고에서 한국에서 인기이던 [[애플 II]], [[MSX]] 호환 PC를 겨냥하여 SPC-1000은 순수 한국 개발 컴퓨터라는 점과 교육용 소프트웨어가 풍부하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출시 시기는 [[MSX]]보다 많이 빠르지만 이후 MSX가 등장하자 저 위에 소개한 점을 강조.] 특히 Hu-BASIC은 성능이 좋았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애플 II+의 Applesoft BASIC이나 MSX BASIC보다 더 좋았다. 심지어 16비트 시대의 IBM PC 호환 기종의 GW BASIC보다도 좋다. 다른데서 찾아볼 수 없는 Hu-BASIC의 독보적인 기능이 하나 있는데, 명령어를 약자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프리터 형식이 그렇듯 프로그램은 전부 아스키 코드 문자열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중에 읽기는 힘들더라도 명령어를 약자로 입력할 수 있다는 것은 프로그램 크기를 줄여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연하지만, 상술한 1라인 컨테스트에서도 그 장점은 빛을 발했다. 당시 유통된 게임의 상당수는 일본의 8비트 컴퓨터인 [[NEC]] PC-6001로 나온 게임들을 이식한 것이었다. SPC-1000의 기반 컴퓨터로 알려진 샤프 MZ-80과 NEC PC-6001은 그래픽 특성이 꽤 다른데, SPC-1000 게임들, 특히 컬러 모드로 나오는 게임들은 NEC PC-6001에서 이식한 것이 대부분이고 화면도 6001 버전 그대로여서, SPC-1000도 [[금성 패미콤|FC-100]] 처럼 PC-6001의 그래픽스 설계를 일부 차용해온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일부 게임은 MSX용 게임을 이식한 것도 있었는데 비교적 이식 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SPC-1000에서 MSX와 같은 256×192 해상도를 사용하려면 단색 모드만 사용이 가능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게임이 단색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템이 색상으로 구분되어 있는 [[더 캐슬(게임)|더 캐슬]] 같은 게임은 실행이 곤란하다. 소프트웨어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소프트박스와 VDP 유니트라는 하드웨어가 개발되기도 했다. [[MSX]]와 CPU, PSG 등의 핵심부품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MSX의 VDP인 TMS9918A를 내장하여 MSX 소프트웨어를 약간의 수정만으로 이식해서 쓸 수 있게 만든 기기로 게임 성능이 뛰어난 MSX 소프트웨어를 '''MSX와 똑같은 그래픽'''으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 꽤 인기있던 주변 기기였다. 소프트박스에서는 VDP 유니트용으로 나온 게임을 실행할 수 없었지만 VDP 유니트에서는 소프트박스용으로 나온 게임을 실행할 수 있어서 VDP 유니트 쪽이 더 인기가 좋았다. 후속기인 [[SPC-1500]]에는 MSX용 카트리지도 사용할 수 있는 외장형 VDP 유니트(일명 롬팩 유니트)가 나오기도 했다. 지방의 경우 게임 및 소프트웨어를 구할 방법이 없었으며, 월간 잡지에 소개되는 게임의 소스 코드를 직접 입력해 실행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잡지사를 직접 방문해서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직원을 만나면 과월호에 소개된 프로그램을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로 테이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더블 카세트 덱을 이용해 테이프에서 테이프로 복사하는 식이라 귀가 후 돌려보면 노이즈 때문에 오류가 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BASIC 소스 코드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인데 반해 소스가 16진 기계어로만 몇 페이지 올라오면 주말에 아는 친구들 불러서 돌아가며 키보드로 입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타가 가장 문제였지만[* 기계어였기 때문에 1글자라도 오타가 나면 오류 메시지가 뜨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폭주할 수도 있었다'''. 체크섬이 있으면 그걸 보고, 없으면 '''소스 코드 전체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오타가 나면 대부분은 실행시에 그냥 그대로 멎는 선에서 끝나지만 가끔은 화면 출력이 깨진다거나 하는 재미있는(?) 현상도 볼 수 있었다.] 이후 각 라인의 합계를 우측에 표시해주는 체크섬 기능이 생기면서 오타 확인이 훨씬 쉬워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