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LG전자 (문단 편집) === 금성사(金星社) 시절 === ||<-2> {{{#!wiki style="margin-bottom: -5px; margin-left: -10px; margin-right: -10px; margin-top: -5px" [[파일:금성사연지동공장.jpg|width=100%]]}}} || ||<-2> {{{#ffffff '''1958년 금성사 부산 연지동 공장 전경'''}}} || ||<-2> {{{#!wiki style="margin-bottom: -5px; margin-left: -10px; margin-right: -10px; margin-top: -5px" [[파일:금성사 공장전경.png|width=100%]]}}} || ||<-2> {{{#ffffff '''1960년대 중반 금성사 부산 온천동 공장 전경'''}}} ||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 >금성사 시절 캐치프레이즈[* 회사 표어 같이 꾸준하게 밀던 문구였다. 광고부터 제품까지 금성사 관련된 것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 냉장고, 텔레비전 같은 전자제품들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고가를 형성하였다. 그런만큼 돈을 모아 큰맘 먹고 사야했고 한번 사면 쉽게 못바꿨다. 그래서 애먼 덜 떨어지는 제품 사서 10년 동안 고생하지 말고 우수한 품질의 금성사 제품을 선택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것이 금성사 제품은 내구성이 우수해 지금까지도 현역으로 돌아가는 물건이 있다.] [[1958년]] 10월, 락희화학 사장 연암 구인회가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부산)|연지동]]에 '''금성사'''라는 이름으로 전자 회사를 세우고 초대 사장을 겸했다. 1년 뒤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진공관식 5구 라디오 'A-501'을 개발, 생산했으며[[https://blog.naver.com/ke2051/222860607873|#]][* 개발자는 1958년 공채 수석으로 입사한 엔지니어 [[http://www.edulove.info/bbs/board_view.php?bid=letter_sss&uid=174&pageno=3|김해수]](1923~2005). 그는 라디오 수리상 출신으로 1967년 금성사에서 기획부장까지 올랐으며, 1969년 삼화콘덴서 전무로 옮겨 5년을 지냈고, 1974년부터 일부 재일교포 사업가들과 한국트랜스 등 8개 기업을 세우고 1980년 삼신정기공업사(마그마)를 세워 3년 간 운영했다. 1987년에는 전자부품 무역업체 '신기상역'을 세웠다. 그의 개발 비화는 딸 김진주(박노해의 아내)가 엮은 <아버지의 라디오(2007)>에 나온다.] 1960년에 최초로 6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고[* 다만 처음에는 이 라디오가 애물단지였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빈곤층들의 소득 수준이 라디오를 사서 청취료를 낼 만큼 풍족하지도 않았고, 부유층을 노리기에는 금성라디오의 품질이 미제 라디오나 시장에서 암암리에 팔리는 일제 라디오만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국산화의 일환으로 밀어줬으나 그럼에도 악성 재고로 남았는데, [[박정희]]가 홍보 목적으로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하는 김에 금성사 라디오가 그 대상에 포함되었고 광고도 대대적으로 되면서 기사회생했다.][* 여담으로 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지금의 KBS-TV처럼 청취료를 냈다. 또한 당시 전자제품은 주로 [[진공관]]식이었는데 특성상 수명이 짧은 편이라 주기적으로 교체해 줘야 해서 전자제품의 유지 비용 또한 무시 못했다. 그런데 미제, 일제보다 품질이 떨어지니 더 자주 망가질 수 밖에. (제품에 들어간 진공관은 미제, 일제다.)] [[선풍기]][* 초기의 금성사 선풍기는 [[히타치 제작소|히타치]]의 모터를 사용했다. LG그룹 전자 분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히타치와의 관계가 가까운 편. 현재 LG전자는 선풍기를 생산하지 않는다.]를 생산했다. 뒤이어 1961년에 최초로 국산 자동전화기를 생산했다. [[https://blog.naver.com/ke2051/222998518771|#]] 1962년 동생 구정회가 사장직에 취임한 후 그해 라디오를 처음으로 미국 아이젠버그 사에 수출했고, 1963년 최초로 국산 적산전력량계도 개발해냈다. [[https://blog.naver.com/ke2051/222877418737|#]] 1964년 부산 온천동에 종합전기기기공장을 개설해[* 현재의 [[동래 럭키아파트]] 자리이다.] 연지동 시대를 마감했다. 1965년 4월 최초로 국산 [[냉장고]]를 만들고 실업기술원양성소를 세운 뒤, [[1966년]] 8월 최초의 국산 19인치 흑백[[텔레비전]] VD-191를 생산하여 일약 한국 우량 전자회사로 입지를 굳혀 이후 [[대한전선]], [[삼성전자]] 등 후발 업체들의 진출에 영향을 주었다. 그해 9월에 한국케이블공업(주)를 합병하고, 1967년에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한 후 가전-통신-전선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68년에는 금성판매(주)를 설립했으며 이후 최초로 국산 룸에어컨을 개발했고, 같은 해에 [[히타치 제작소|히타치]]와 제휴해 국산 엘리베이터도 제작했다.[* 영진전기도 미쓰비시와 제휴해 이때쯤에 엘리베이터를 제작했다. 금성사가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1987년 금성산전,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변경한 뒤, 1999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합병되었고, 영진전기는 1971년에 유니버스, 1976년에 서통전기, 1979년 신영전기, 1987년에 [[금성기전]], 1995년 LG산전으로 이름을 변경한 뒤, 1999년에 LG가 엘리베이터 사업을 오티스엘리베이터에 매각하자, 2001년에 한국미쓰비시엘리베이터를 설립해 이쪽으로 이어진다고 봐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LG산전엘리베이터]] 참고.] 1969년에 최초로 국산 펌프와 세탁기를 생산한 후 10월부터 통신기기 부문을 금성통신(주)으로, 전선 부문을 금성전선(주)으로 각각 분리시켰고, 1970년에 일본 알프스전기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주)를 설립하였다. 1971년에 락희화학에서 옮긴 4대 사장 박승찬(1926~1979)은 '금성 약진 3개년 계획'을 내세워 기업 발전과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1973년 기업공개 단행 후 1975년에 경북 구미공장, 1976년에 경남 창원공장을 각각 세웠고, [[1977년]] 2월에 사업부제 및 본부장제로 개편 후 8월에 자사 첫 컬러TV 'CT-808'을 개발해냈다. 다른 한편으로 1974년부터 '전국 정밀도 경진대회'에서 3연패, 1977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 2연패 달성에 기여해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하게끔 했다. 1978년 8월에는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12월에 매출 1천억 원 및 수출 1천억 불을 달성하였다. 1979년 6월 6일에 박승찬이 교통사고로 급사하자, 허신구가 사장직을 이어받아 그해 8월에 금성통신, 금성전기 등과 합작해 대한전선으로부터 대한반도체(주) 지분 49%를 인수했고, 1980년대부터 해외 진출에 적극 나섰다. 1980년 서독에 첫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1982년]], 한국 최초 VCR 및 컬러 비디오 카메라를 개발하고 미국 앨라배마 주 헌츠빌에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현지 공장을 개설하였다. 1983년에는 디자인 종합연구소 및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했고, 1984년에 한국 최초로 음성다중 TV를 개발한 후 평택공장과 김해공장[* LG전자 김해공장은 2006년 9월부로 씨앤엠이라는 모터 전문 제조업체로 독립해, 이때 기존 설비 일부는 창원공장으로 옮기게 된다.]을 개설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1985년에는 첨단과학기술 홍보전시관 테크노피아[* 1993 대전 엑스포가 열리기 직전에 홍보 전시관를 설치했으나, 대전시에서 엑스포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테크노피아 홍보전시관은 철거하였다.]를 런칭하였다. 1987년부터 부문별 대표이사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금성은 1987년 [[6.10 민주 항쟁]]과 [[6.29 선언]], [[1987년 노동자 대투쟁|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확대됨에 따라 노사분규가 격렬해져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1987년과 1989년에 터진 파업으로 매출 손실 6,000억원, 근로손실일수 50여 일로 창사 이래 최대의 경영 위기를 맞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9년부터 이헌조가 가전부문 사장직에 취임하여 노사관계 대신 '노경관계'를 강조한 신경영 및 '종합생산성관리(TPC) 운동' 등을 전개해 개혁을 시작했다. 1991년 '사업문화단위(CU)'제 실시로 금성통신, 금성알프스전자, 금성포스타 등 자회사들과 '가전정보통신CU'를 구축하며 고객감동 서비스와 해외 시장 진출에 주력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현지 법인 및 공장을 잇따라 세웠고, 1992년에 금성부품, 1995년에 금성통신을 각각 합병하였다. 그 외에 1980년 초반에 [[닌텐도]]와 계약해 [[게임 & 워치]]를 현지 생산하고 1994년에는 게임기 '[[3DO]] 얼라이브'를 내놓아 게임 사업에 손을 댔다. [[https://blog.naver.com/ke2051/223049640298|#]]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nNf-WtWEI)]}}} || || {{{#FFF '''창립 20주년(1978년) 기념 광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eYsur80Il4)]}}} || || {{{#FFF '''창립 25주년(1983년) 기념 광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PiXkf10VgMM)]}}} || || {{{#FFF '''금성 샛별 텔레비전 (1978년) 광고'''}}} || 1987년에 금성마그네테크를 합병한 후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로 비디오테이프 사업을 시작해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비디오로 발매했으나 1990년대 초에 관련 사업을 미디아트로 넘겼다. 카세트 테이프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 중소기업 OEM이었고, 2000년대 초중반에는 중국 OEM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사업을 철수했다.[* [[벤허]]는 1980년대에 무비크로스 비디오에서 처음 냈고 1990년대에 [[대우전자]]에서 재출시, [[스타워즈: 보이지 않는 위험]]도 같은 회사에서 출시, [[록키 3]]는 [[SKC]]에서 출시, 톰과 제리는 [[서진통상]]에서 출시했다.][* '금성 프로테이프' 레이블 발매작 중에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영화라면 [[마지막 황제]], [[최가박당]] 시리즈나 프랑스 영화 [[라붐]] 정도. 그리고 [[뱀파이어 헌터 D(1985년)]]를 무삭제 성인 등급으로 외계인 벰파이어라는 제목으로 출시했다. 또한 [[G.I. Joe - 어 리얼 아메리칸 히어로(선보우 제작 시리즈)|지아이 유격대]]와 [[거북이 특공대|닌자 거북이]]시리즈도 유명하다.] 이 시기에 [[뻐꾸기시계]]를 비롯한 여러 벽시계도 [[https://blog.naver.com/ke2051/223041947896|만들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NqXtTDDFk)]}}} || || {{{#FFF '''1995년 금성 멜로디 뻐꾸기시계'''}}} || 1989년에는 전자오르간도 생산했다. 2가지 모델이 있는데, 하나는 카시오, 삼익악기 등의 버전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형''' 모델이라 해서 국악 악기 음색을 적용한 것이 있었다. 1990년대엔 음원 모듈도 내놨는데, '''GSD10101'''이라고, ASSA신바람7000에 사용됐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노래 반주기도 생산[[https://blog.naver.com/ke2051/223095564770|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hKrSMP0bCM)]}}} || || {{{#FFF '''1996년 금성사 비디오 노래반주기 GKV-808'''}}} ||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의 전광판 스폰서로, 1994년 10월에는 [[유엔]] 50주년 공식 후원사로도 각각 선정되어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이 항목은 공식 명칭인 금성사 외에 금성'''전자'''로도 접속할 수 있는데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금성전자라고 칭한 적이 없다. 아마 전자제품 회사 중 유일하게 사[*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린다면 유일하진 않다. 1980~90년대 Eroica 브랜드로 유명했던 태광그룹 계열사 태광산업의 전자사업부가 천일사였다. 천일사 시절에는 별표전축이라는 브랜드를 썼으나 모 전자회사가 연상되는 이름이라 Eroica 브랜드로 교체했고 이 무렵 사명도 태광전자로 바꿨다.]만 붙은 것이 금성전자라고 오인하게 되는 원인인 듯. 영문 명칭도 마찬가지여서 Goldstar co., ltd라고 했으며 어디에도 electronIc 같은 단어는 없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j0tg7c8f1-Y)]}}} || || {{{#FFF '''1992년 폴란드 방영 광고'''}}}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