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G모빌리티/역사 (문단 편집) === [[쌍용그룹]] 시절 (1986. 11.~1998. 3.) === || [[파일:쌍용자동차 로고(1986-1989).svg|width=80%]] || || '''쌍용그룹 산하 시절 초기 CI (1986~1989)''' || || [[파일:쌍용자동차 로고(1989-1998).svg|width=80%]] || || '''쌍용그룹 산하 시절 CI (1989~1998)[* 로고타입 부분은 2002년 체어맨 광고에서 잠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WdosU3k6OI|#]]]''' || 1986년 11월, 쌍용그룹이 하동환 회장의 동아자동차 지분 19.8%를 전량 인수하여 경영권을 장악했다. [[쌍용그룹]]의 젊은 회장 [[김석원(기업인)|김석원]]은 [[자동차광]]으로 유명했다.[* 김석원 회장 재임기에 쌍용자동차의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던 켄 그린리는 무쏘를 소개하는 왓카? (What Car?) 지의 지면을 빌어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 (a car nut) 고 언급하기도 했다.[[https://twitter.com/addict_car/status/1635297069836693506?t=h3eD6ekwNHmOfkNNgydk5A&s=19|#]]] 그는 이미 13세 때부터 불법적으로 운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레이싱스쿨을 수료했고, 스스로 "레이서들과 겨룰 자신이 있다" 고 공언하곤 했다. 또 자동차를 직접 분해·조립할 수 있을 만큼 자동차에 미쳐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소문에 따르면 직접 집에 공작실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차나 기계를 분해했다가 조립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각종 자동차를 수집하여 보유 자동차만 60여 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던 시기에는 30여 대를 보유했었고, 나중에 쌍용자동차를 매각할 무렵에는 보유 자동차가 60~70대에 이르게 됐다.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벤츠]] 같은 고가의 자동차도 있었지만 1960년대에 생산된 구형 올드카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에 이르렀고,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을 이용해 자신이 수집하는 자동차를 수리, 정비, 튜닝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보유 자동차로 자동차 박물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쌍용그룹이 망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86년 [[하동환|하동환 회장]]은 동아차를 매물로 내놓자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곧바로 동아차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쌍용그룹과 동아자동차는 같은 건물에 본사가 입주했던 데다 쌍용그룹에서 동아차의 믹서 트럭을 대량 구매해오던 터라 평소부터 하동환 회장과 김석원 회장은 친분이 깊었다. 당시 자동차 사업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삼성도 인수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를 운영할 꿈에 부풀었던 김석원 회장은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제시했고, 1조 원에 가까운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하동환 회장의 지분 19.8%를 전량 인수하여 경영권을 장악, 1986년 11월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언론에 나온 동아 시세는 약 150억 원을 넘는 수준이었으나 김석원 회장이 프리미엄을 얹어 215억 원에 인수했다고 보도됐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296억 원에 인수했다고 한다. 김석원 회장이 이렇게 시세에 두 배 가까운 가격을 배팅한 이유는 삼성그룹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동아를 인수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개발 명목으로 [[포르쉐 959]]를 수입한 것이었다. 국내에 단 한 대뿐인 차로 유명한데, 1986년 12월 인천 항에 도착해 연구소 직원들이 차를 인수받자마자, 그는 인천으로 달려와 차를 타고 서울로 유유히 사라졌다. 언론에 그는 코란도와 무쏘를 타고 다니는 회장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포르쉐 959와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벤츠 S 클래스]]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동아자동차는 [[덤프트럭]], [[믹서트럭]], [[트랙터 트럭]], [[소방차]] 등 특장차와 버스를 만들던 회사였고, 쌍용그룹에 인수되기 2년전에 거화를 인수해서 처음으로 [[SUV|지프 (SUV)]]를 생산했다. 하지만 자동차 광이었던 김석원 회장의 관심사는 특장차나 버스가 아니라 세단, 그것도 평범한 대중 세단이 아니라 스포츠카와 럭셔리 고급 세단이었다. 하지만 그 간극은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너무나 컸다. 김석원 회장은 동아를 인수한 이듬해인 1987년 6월 [[영국]]의 소규모 스포츠카 회사인 [[팬더 웨스트윈즈]]의 지분 80%를 인수했다. 팬더는 이미 1970년대 말 부도가 났고, 이를 진도모피그룹 회장 [[김영철(1938)|김영철]]이 인수했다가 1987년 김석원 회장이 다시 인수한 것이었다. 1988년 3월 팬더의 경영권을 최종 확보한 김 회장은 영국산 [[팬더 칼리스타|칼리스타]]를 통째로 한국 평택공장에서 생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영국에 있던 생산 설비를 평택공장으로 가져왔다.[* 당시 무쏘의 디자이너로 참여한 켄 그린리가 쌍용자동차와 일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켄 그린리는 원래 팬더에서 일하면서 진도그룹과 연이 있었으나 쌍용그룹이 팬더를 인수하며 쌍용차 차종의 개발 과정에 참여했다. 1987년 10월에 "차기 소형 4륜차를 제안해 달라"는 김 회장의 요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의 [[스즈키]]의 [[스즈키 에스쿠도|에스쿠도]]같은 작은 차를 예상했으나 결국에는 무쏘를 개발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 회고가 나온 1990년대 기준으로 켄 그린리의 디자인 팀원 12명과 비교하여 쌍용자동차의 인하우스 디자인 팀이 10배 규모까지 커졌으며 서울에 현대적인 설비까지 갖추었다고 "왓카?" 지의 홍보기사에서 밝혔다.[[https://twitter.com/addict_car/status/1635297069836693506?t=FXSYN7Cip6SeZO6FSwwecw&s=19|#]]] 1987년에 기술 연구소를 세웠다. 1988년 3월 상호를 '동아자동차' 에서 공식적으로 '''쌍용자동차(주)'''로 변경했다. 1988년 11월 21일, 거화 시절인 1982년부터 개발이 시작돼 동아자동차 시절 출시하려다가 5공 정권의 불허로 출시하지 못했던 [[쌍용 코란도 훼미리|코란도 훼미리]]가 드디어 출시됐다. 동아차를 인수한 [[김석원]] 회장은 "국가의 3대 기간산업인 자동차 산업까지 일본의 기술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일본 회사와는 기술 제휴를 맺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시 국내의 자동차 회사들은 대부분 일본 자동차 회사들과 기술 제휴를 맺어 일본 차량을 라이센스 생산하거나 엔진과 변속기 등 핵심 부품들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기술력이 가장 딸렸던 동아자동차는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서 일본 트럭과 버스들을 사실상 그대로 들여오거나 일본 버스 차체와 엔진의 조합을 약간 바꾼 모델이 대부분이었다. 김석원 회장은 당시 동아자동차가 기술 제휴를 맺고 있던 [[스바루(기업)|후지 중공업]], [[이스즈자동차|이스즈]], [[UD 트럭|닛산 디젤]][* 동아자동차 시절 닛산 디젤에서 들여온 RD8 엔진은 무보링 200만km로 명성이 자자한 내구성이 좋은 엔진이었으나,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닛산 디젤과 더 이상 추가로 제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동안 대우중공업의 엔진을 받아 쓰다가, 이후 무보링 250만km라고 마케팅 하던 벤츠의 [[메르세데스-벤츠 OM4 V형 엔진|OM442A 엔진]]을 도입했다. 대신 닛산디젤은 한참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려던 [[삼성|삼성그룹]]의 [[삼성상용차|삼성 상용차]]와 기술 제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벤츠의 OM442A 엔진은 닛산 디젤의 엔진 내구성보다 한수 위였으나 단가나 로열티 면에서 더욱 비쌌던게 흠이었다.] 등 일본 자동차 업계와의 기술 제휴를 전부 일방적으로 끊어버렸고, 대신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었다. 이로 인해 [[https://www.motoy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83|'''쌍용자동차는 기존 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사실 쌍용자동차는 이전 하동환 회장 시절 버스, 트레일러 전문 회사였고, 쌍용이 인수하여 SUV와 승용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봤자 전체 자가용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미미했다. 반면 동아자동차 시절부터 나오던 트럭, 버스 모델들은 시장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버스, 트럭, 트레일러들은 모두 일본 자동차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석원 회장이 일방적으로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단절하고 이들 모델을 차차 단산시키면서 쌍용차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동아자동차 시절 트럭과 버스들은 쌍용 마크를 달고 90년대 중반까지 생산되기는 했다. 하지만 쌍용이 인수한 후 일본과 더이상 기술 제휴를 하지 않았기에 버스, 트럭 모델들은 시장에서 빠르게 뒤쳐지기 시작했고 곧 도로나 현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 되고 말았다. 사실 하동환 회장 시절 말기에 동아차는 [[스바루(기업)|스바루]]와 기술 제휴로 준중형 세단인 [[스바루 레오네|레오네]] 3세대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스바루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김석원 회장에 의해 계획은 취소됐다. 표면적으로는 일본 업체와 기술제휴를 하기 싫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김석원 회장이 추구하던 최고급 럭셔리 승용차와는 영 딴판인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일본 자동차는 주로 저렴한 대중차를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스바루는 특히 주력 모델 레오네와 [[스바루 렉스|렉스]], [[스바루 삼바|삼바]]같은 경차 라인업을 비롯한 저가형 [[소형차]]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김석원 회장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김석원 그룹회장이 고급 승용차에 대한 집착을 뒤로 미루고, [[스바루 레오네|레오네]]를 출시했다면 쌍용차의 운명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제 막 마이카 시대에 들어서고 있던 국내에서는 소형차와 중형차가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SUV와 고급 승용차의 판매량은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현대 엑셀]]/[[현대 프레스토|프레스토]], [[대우 르망]], [[기아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들이 폭발적인 판매량을 보이며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의 매출 상승을 견인하고 있었으며, 9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소득수준 향상과 함께 쏘나타, 에스페로, 콩코드, 캐피탈 등 중형차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국내 자동차에는 준중형 승용차가 없었고, 소형차인 프레스토, 르망과 중형차인 프린스, 쏘나타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했는데, 스바루 레오네는 준중형급이면서 제법 긴 차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차에 대한 선호가 분명한 한국시장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김석원의 쌍용차는 당시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량이 매우 낮았던 SUV에만 진출해 있는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역시 판매량이 매우 낮은 고급 승용차로 진출하려 했다.[* 당시 쌍용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회사가 [[기아]]였는데,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기아는 승용차 생산이 중단되고, 승합차, 화물차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기아는 쌍용과 같은 시기에 쌍용과 정반대로 가장 작은 승용차 차급인 소형차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하여 프라이드를 출시했고, 프라이드가 성공을 거두며 이후 중형 콩코드도 연이어 출시하며 승용차 사업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이후 기아도 고급차, 스포츠카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으면서 [[기아 엘란|엘란]]의 생산에 무리하게 자금을 쏟는 등 방만한 경영을 하다가 결국 외환위기 시기 쌍용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당시 독자적인 기술력이 부족했던 쌍용차는 해외 자동차 회사와의 기술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고, 김석원 회장은 유럽 자동차 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때도 김석원 회장은 판매량과 인지도가 높은 대중적인 브랜드를 마다하고, 독일의 벤츠, 스웨덴의 볼보, 프랑스의 르노 (르노 25) 등 고급차 브랜드와 기술 제휴에 목을 매었다. 김석원 회장은 [[볼보]], [[르노]] 등에게 기술 제휴 및 합작 생산 (라이센스 생산)을 타진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쌍용자동차는 르노의 고급 플래그쉽 세단 [[르노 25]] 라이센스 생산을 르노에게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당한 후 대신 수입 판매 협약을 맺어 1988년 정식으로 국내에 출시했다. 르노 25는 당시 가격이 무려 5,200만원이나 했는데, 이는 현대 자동차의 1세대 그랜저 풀옵션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1세대 그랜저의 위상이 현재의 에쿠스, G90과 같거나 그 이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르노 25는 엄청난 고가였고, 당시 강남 아파트 30평 아파트 1채 가격과 맞먹는 것이었다. 르노 25는 2년간 고작 13대가 팔리며 [[https://www.motoy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183|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실패에 크게 데인 르노는 냉정하게 한국에서 르노의 브랜드 파워가 없다고 판단했고, 훗날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후 삼성에 로열티를 지불해가면서까지 르노삼성이라는 사명을 만들어 이를 20년 넘게 고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김석원 회장은 최고급 럭셔리 세단을 생산하기 위해 유럽 자동차사와 기술 제휴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91년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메르세데스 벤츠]]와 상용차 및 [[디젤 엔진]] 기술제휴가 성사됐다. 하지만 처음에 벤츠와 맺은 기술 제휴는 승용차와는 무관했고, 트럭, 버스, 승합차 등 [[상용차]] 부문이었다. 어쨌든 김석원 회장은 벤츠와 상용차 기술 제휴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일본차 기반의 동아자동차의 트럭, 버스 모델들을 단산시킬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1993년부터 1995년에 걸쳐 기존 동아자동차 시절부터 주력 모델이었던 일본차 기반의 [[쌍용 DA트럭|DA 트럭]]과 [[쌍용 에어로버스|에어로 버스]]를 차례로 단종시킨 후 벤츠 기반의 [[쌍용 SY트럭|SY트럭]] ([[메르세데스-벤츠 SK|메르세데스 벤츠 SK]] 기반), [[쌍용 트랜스타|트랜스타]] ([[메르세데스-벤츠 O404|메르세데스 벤츠 0404]] 기반), [[쌍용 이스타나|이스타나]] 등이 잇달아 출시됐다. 물론 벤츠와 최초로 성사된 것은 트럭 상용차 기술 제휴였지만 많은 트럭 회사를 두고 굳이 벤츠와 제휴한 것은 결국 벤츠와 승용차 부분까지 기술제휴를 맺으려는 복안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고, 얼마 후 실제로 현실화됐다. 쌍용자동차의 정점은 1991~1992년경이다. 1992년 당시 언론 인터뷰를 보면 김석원 회장은 쌍용자동차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1년 [[현대모비스|현대정공]]이 코란도와 매우 유사한 [[현대 갤로퍼|갤로퍼]]를 출시, 크게 성공하면서 코란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코란도는 당시 쌍용자동차의 사실상 유일한 생산 차종이었지만, 이미 개발된지 6년 가량 지난 모델로, 갤로퍼는 모든 면에서 코란도와 넘사벽이었다. 1992년부터 쌍용자동차에 위기가 시작됐다. 1992년 쌍용차의 시장점유율은 1.6%에 불과했다. 1992년 1월에 스포츠카 모델인 [[팬더 칼리스타|'칼리스타']] 를 출시했다. 김석원 회장의 관심은 '''고급 승용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쌍용을 인수한 직후부터 김석원 회장의 대부분의 관심과 노력은 럭셔리 세단을 출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김석원 회장이 기술 제휴를 추진했던 볼보, 르노, 벤츠 모두 럭셔리 세단을 생산하던 회사들이었다. 르노의 경우 현재는 대중차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김석원 회장이 르노에서 관심을 가진 모델은 오직 [[르노 25]] 뿐이었는데, 르노 25는 당시 벤츠, BMW, 아우디, 볼보 못지 않은 고가의 플래그쉽 세단이었다.[* 1988년 쌍용이 르노 25를 국내에 수입, 출시했을 때 판매가가 무려 5,200만원이었는데, 당시 현대 자동차의 1세대 그랜저 최상위 트림의 2배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현대 자동차의 갤로퍼로 타격을 입은 김석원 회장은 이제 SUV가 아닌 [[승용차]]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보통 판매량이 높고 대중적인 세그먼트부터 시작하여 고급차로 급을 올리며 확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쌍용은 정반대로 최고급 대형 세단부터 출시하고 이후 중형차, 소형차로 내려오며 라인업을 확장한다는 신박한 전략을 세웠다. 쌍용차는 승용차 개발 경험이 없었다. 가지고 있던 30여대의 차 중에서 벤츠 S600을 주로 탔던 김석원 회장은 벤츠에게 끈질기게 기술제휴 러브콜을 보냈다. 처음에 벤츠 측에서 거절했으나 김석원 회장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벤츠도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1992년 벤츠와 가솔린 엔진 기술 제휴를 맺었다.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은 직후인 1992년 '월드카 프로젝트(W)', 즉 [[쌍용 체어맨|체어맨]] 개발을 시작했다. 이어 1993년 초 '이노베이션 원년'을 선포하며 벤츠랑 승용차 생산에 합의했다. 김석원 회장은 수시로 체어맨 개발 현장을 드나들며 엔지니어들을 독려하며, 최고급 제품의 기본 특질을 설파했다고 한다.[* 체어맨 이전 출시된 차종인 무쏘를 디자인했던 켄 그린리가 무쏘를 소개하는 영국 왓카?(What Car?)지의 기사에서도 무쏘가 한국의 부유층들을 목표하여 개발한 고급 차종임을 엿볼 수 있다. 켄 그린리는 한국의 고위 인사들을 4륜차 고객으로 유치하려면 경쟁력 있는 4륜차 패키징에 일반 승용차의 장점들을 결합해야 했다고 밝혔으며, "한국의 도로 환경에서 무쏘를 보면 운전자가 고급 세단을 탄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디자인을 자평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부유층들이 매우 보수적이고 한국에서 운행되는 차들도 거의 무채색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등, 오히려 쌍용자동차 입장에서 너무 미래지향적인 컨셉트일 수 있다는 염려까지 내비쳤다.[[https://twitter.com/addict_car/status/1635297069836693506?t=FXSYN7Cip6SeZO6FSwwecw&s=19|#]]] 1993년 8월 SUV [[쌍용 무쏘|무쏘]]를 출시했다. 코란도가 사실상 거화-동아자동차가 완성해 놓은 차라면, 무쏘는 김석원 회장이 처음부터 관여해서 만든 차였다. 그 해 11월 벤츠와 대형 디젤 엔진 조립생산 계약을 맺었다. 1994년 6월 창원에 엔진공장을 준공하여 엔진은 여기서 생산한다.[* 원래 쌍용자동차는 [[이스즈자동차|이스즈]] 라이선스 [[대우중공업|대우 중공업]]의 엔진을 공급받다 대우 중공업의 노사분규로 이스즈와 프랑스의 [[푸조]]의 엔진을 수입해서 썼다가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게 되면서 벤츠의 엔진을 수입해서 무쏘에 장착했으나, 수입 단가 문제로 인해 이스타나를 생산하게 되면서 창원공장을 만들고 여기서 생산하게 된다. 다만 상용차와 체어맨 W 5000 모델은 엔진을 수입해서 장착했다.] 1995년 독일에 첫 해외 판매법인 '쌍용 오토모빌 도이칠란트' 를 세우고 1996년에는 중국 베이징에 첫 해외 A/S 지사를 세웠고, [[쌍용 코란도/2세대|뉴 코란도]]를 출시했다. 쌍용자동차는 [[4WD]] 차량을 대표하는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또한 기술제휴를 Ra맺으며 동남아시아 등 일부 지역에 벤츠 대신 저가 라인업을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이어진 적자에 [[쌍용 체어맨|체어맨]]의 막대한 개발비[* 체어맨 개발에 무려 4,500억을 사용했다. 최근 출시된 신형 코란도의 개발비가 3,500억이라는 점을 볼 때 20년 전과 지금의 물가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어마어마한 돈임을 알 수 있다.]까지 더해지면서 '''3조 4,000억원(!)'''이라는 엄청난 빚이 쌍용차 앞에 놓였다.[* 이 금액이 충공깽인 것은, [[두산]]의 핵심 계열사들이 사분 오열하고 그룹 자체를 휘청이게 만든 원흉 쌍두마차 중 하나인 [[두산건설]]이, 그것도 2010년대에 빨아먹은 그룹 자금이 2조가 조금 안됐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면, 무려 20년도 전에 그 두배를 빨아먹은 쌍용자동차가 그룹에 얼마나 큰 위기를 만들어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 때는 몰랐겠지만, 머지않아 [[1997년 외환 위기|한국 경제 사상 최대의 칼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쌍용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은 시멘트[* 현 쌍용C&E. 유동성 위기로 최대 주주가 김석원에서 일본 태평양시멘트로 변경됐다가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매각됐다. 시멘트 분야에서 아직도 국내 1위다.], 제지[* 현 쌍용 제지. 한국 P&G에 인수되고 화장지 부문을 2005년에 주식회사 모나리자로 매각, 나머지는 후에 DK코리아(50%)와 소프크뱅크벤처스(49.9%)가 인수한다. 현재는 원래의 본업이었던 지류 제조 및 판매를 중단하고 원목 수출입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정유[* 자세한 내용안 [[S-OIL]] 문서를 참조하자.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 아람코|아람코]]의 자회사이다.] 등 경기 부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업종이어서 쌍용자동차를 제외하면 대부분 꾸준히 흑자 상태였고, 일부 적자 상태의 계열사도 크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그룹 임원들 사이에서는 자동차를 접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김석원 회장은 이런 목소리를 외면하고, 해당 임원들을 소외시켰다. 이들의 다수는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는 자동차 기업을 비싼 돈에 팔기 좋은 시기였다. 똑같이 자동차광이 총수로 있던 [[삼성]]은 199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려 했으나 정부가 허가를 하지 않는 관계로 하지 못했다. 기존 자동차 회사가 매물로 나온다면 얼씨구 좋다하고 좋은 값에 매입할게 뻔한 상황.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삼성의 쌍용, 기아 인수설이 꾸준히 나왔고 삼성이 [[기아]] 주식을 매집하네 마네하고 말들이 나왔다.] 반면 일부 임원들은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에 미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오히려 김석원 회장에게 자동차산업에 대한 장래빛 미래만 제시하며 회장의 눈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김석원 회장 또한 이런 간신들을 중용하여 그룹 핵심에 두루 포진시켰고, 자동차 산업을 접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임원들은 내쳤다. 이 와중에 김석원 회장은 1996년 4월 총선에 출마하여, 대구 달성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쌍용자동차의 적자와 김석원 회장의 무리한 경영 활동으로 인한 경영 소홀로 그룹의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1996년 말 쌍용자동차 매각설이 본격적으로 나왔다. 실제로는 1995년부터 이미 매각을 추진했었다고 한다. 1996년 말 [[삼성그룹]]과 [[쌍용그룹]]이 쌍용자동차 인수에 합의했으며, 1997년 1월 삼성그룹은 쌍용자동차 인수를 위해 정부의 금융/세제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이후 삼성의 인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김석원 회장은 대우그룹에도 인수를 타진했는데,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이 경쟁이 붙으면 인수가가 뛸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도 상황이 좋지 않았고, 쌍용차의 엄청난 부채 규모에 결국 발을 뺐다고 한다. 한편 쌍용그룹은 독일의 벤츠에도 인수를 타진했다. 삼성그룹과의 인수 논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쌍용그룹은 오히려 벤츠 쪽에 큰 기대를 걸었고, 벤츠 역시 긍정적인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1997년 7월말 벤츠가 쌍용이 실시하는 증자에 1천6백억원을 투자하여 지분이 45%로 늘어나 2대 주주로 등극하기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어 9월 벤츠의 인수 내지는 자금 지원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체어맨이 출시되기 며칠 전인 10월 7일과 9일 사이 벤츠가 쌍용차의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보도가 주요 언론사를 통해 일제히 보도되었다. 하지만 벤츠는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이 높아지자 발을 뺐고, 위와 같은 보도가 나온 바로 다음날인 10월 10일, 벤츠사는 대변인을 통해 "다임러 벤츠사가 쌍용차의 지분을 추가 매입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현재 이와 관련하여 쌍용차와 전혀 아무런 협상이 없는 상태"라면서 강력 부인했다. 1997년 10월 14일 드디어 염원의 체어맨이 출시됐다. 1997년 12월 3일 [[1997년 외환 위기|외환 위기]]가 터지자 결국 외환 위기 직전 기준 대한민국 재계 6위 대기업이었던 쌍용그룹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우그룹과 긴급하게 협상을 진행한 끝에 IMF가 터진지 일주일만인 12월 9일 대우로 쌍용차를 매각하는 것이 결정됐다. 당시 양측 모두 너무나 긴박하게 협상을 진행하는 바람에 실사조차 건너뛰었다. 1998년 1월 인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됐다. 쌍용차를 매각하면서 부채는 쌍용과 대우가 각각 반씩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쌍용그룹은 쌍용차가 남기고 간 1조 8천억원의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공중 분해되어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