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ATUSA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EBC66CEF-2C8D-4A19-A1AB-4C7B56612772.jpg|width=100%]] || || 일본에서 훈련받는 최초의 카투사 1기 || 카투사는 [[한국전쟁]] 중에 미군의 우수한 무기와 한국군의 지리적 지식을 조화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장군의 구두협약에 의해 탄생했다. 최초의 카투사는 1950년 8월에 징집되었으며, 313명의 장병들은 일본에서 훈련받은 후 미 2사단, 7사단, 24사단, 25사단, 1기병사단 등에 배치됐다. 이들 카투사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1950년 9월 15일. 특이하게 아직까지 명확한 성문법은 없고 한미 양군의 규정에만 존재하는데,(미 8군 규정 600-2, 대한민국 육군 규정 302)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창립 목적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캠벨 전 사령관은 미군 전사자의 공백을 본국의 인력만으로 충원할 수 없어 카투사들을 징집했다고 밝혔는데, 인원을 채우기 위해 경범죄로 영창에 간 인원들을 대거 석방해서 충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T-34전차 쇼크로 전선이 붕괴되었을 때는 영연방에서도 KATCOM(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Commonwealth Division)이라는 제도로 비슷하게 운영되었는데, 전쟁 후에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에 따라 카투사는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카트콤은 1954년 7월 정식으로 해체되며 잊혔다.] 미군들이 충분히 충원되기 시작한 전쟁 중반부터 카투사들은 한국 민간인과 북한군을 구별하고 피아식별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전사율이 높은 보직이었음에도 휴전 후 해체될 당시 편하게 지내다 왔다고 오해받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미군 소속으로 있다가 조직이 해체되어 소속이 불명확해져 현재 UN기념공원에 상징적으로 36명만이 안치되어 있다. || [[파일:82F59A89-FEDA-4C28-81BF-158A57AEE4D1.jpg|width=100%]] || || 임진스카웃에 편제된 카투사 || 1960년대와 70년대에 북한의 도발이 최고조로 올랐을 당시에는 카투사들이 미군 2사단의 특수부대인 임진스카웃 정찰대에 편성되어 북한군과 근접 전투를 수행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으며, 카투사들과 한국군 장교로만 이루어졌지만 미군 2사단에 배속된 대간첩중대(CAC)까지 존재하였다. [[https://www.google.co.kr/amp/m.monthly.chosun.com/client/amp/viw.asp%3fctcd=I&nNewsNumb=202205100052|기사로 보는 임진스카웃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