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HJ중공업 (문단 편집) == [[노동운동]] == 타 조선업체들에 비해 노사분규가 크게 이슈화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조선소의 기나긴 역사와 궤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박정희]] 정부의 대한노총(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노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규모의 민주적 [[노동조합]]이 존재했다[*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서로 남화숙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 1960년대 말 조선공사 민영화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뒤 70년대에는 당시 대다수 노조들이 그랬듯이 관제적 성격을 띄게 되나, 중공업 부문에서 민주적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부활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다시 부산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80년대 이후 활약한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여성 용접공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 단지 1971년 입사한 여성을 포함하여 누가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인지 자료나 증언이 확실하지 않아 김 씨가 언론을 통해 임의로 본인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지난 2020년 11월 8일 방영된 KBS 교양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 '굳세어라! 그 시절 여자 기술자' 편에 대한조선공사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했던 황순란 씨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황 씨는 20년 근속 공로패를 보여주는데 입사한 해를 역산해 보면 김 씨가 입사한 1981년으로 같은 해 인데다 심지어 입사일조차 김 씨보다 한참 빠르다. 황순란 씨가 본인을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라 소개하지 않는 이유도 입사 당시 이미 선배 여성 용접공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조선중공업이 창립한 1937년부터 김 씨가 입사한 1981년까지 여성 용접공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선업계에서는 6.25 전쟁 당시 남자들이 징집되어 여성들을 대체 용접공으로 투입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러한 전후 사정에 비추어 보면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은 해방으로 조선중공업이 대한조선공사로 바뀐 1945년부터 6.25 전쟁 전후인 1950년대 사이에 근무했던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으로 알려진 [[김진숙(노동운동가)|김진숙]](이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노동변호사로 활약하던 [[노무현]] 역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돌연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장례를 치르려던 그의 시신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가는 짓거리가 벌어지기도 했다.(시신 탈취를 방지하기 위해 보초까지 서고 있었으나 경찰은 영안실 벽을 부수어 뚫고 시신을 탈취한다.) 이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며, 당시의 [[분신정국]]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2003년에는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031017040848598|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사건을 소개한 [[https://youtu.be/C8u97Dsgem0|라디오 방송분이 있다.]]], 얼마 후 곽재규 조합원도 따라서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한때 노동자들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정권 때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직전에 일어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자살 사건을 두고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2011년에는 [[희망버스]] 사건이 있었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위에서 언급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을 계기로 크게 이슈화되었다. 희망버스 투쟁 이후에는 2012년에는 최강서 조합원이, 2013년에는 또 다른 김 모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