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GIGN (문단 편집) === 우베아 동굴 인질사태(1988, 빅토르 작전) === ||[[파일:1530178578.jpg|width=100%]]||[[파일:1530178563 (1).jpg|width=100%]]|| {{{+1 La prise d'otages d'Ouvéa (L'opération Victor)}}} [[1988년]] [[4월]] [[누벨칼레도니]] 우베아 섬의 헌병대 치안서가 누벨칼레도니의 독립을 주장하는 현지 원주민 카낙의 무장세력인 FLNKS(Le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kanak et socialiste)의 습격을 받아 4명의 헌병대원이 사망하고 군인과 판사를 포함해 27명이 인질로 잡혀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치안서에 있던 중기관총을 포함한 다수의 무기가 FLNKS에게 탈취당했으며 이에 프랑스 정부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국가 헌병대 소속의 GIGN를 주력으로, EPIGN, 해군 소속 [[코만도 위베르]], [[DGSE]]의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부대인 [[세르비스 악시옹#s-4.1|제11충격낙하산연대]][* 11e régiment parachutiste de choc. 프랑스 해외정보부에 편재된 육군 공수부대로 현 [[DGSE]]의 전신인 SDECE 시절부터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무장부대로서 특수작전을 수행했으며 이후 조직개편으로 인해 1993년 해산되었다.] 등 프랑스군의 정예특수부대 대원 74명을 현지로 급파한다. 인질구출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GIGN(국가 헌병대) - 12명 * EPIGN(국가 헌병대) - 8명 * [[세르비스 악시옹#s-4.1|제11충격낙하산연대]]([[DGSE]]) - 34명 * [[코만도 위베르]](해군) - 16명 * 제17낙하산공병연대(육군) - 2명 당시 인질구출팀의 GIGN 지휘관이었던 필립 레고르쥐 헌병 대위(Phiippe Legorjus)[* 과거 세 곳의 특수부대에서 복무한 전적이 있는 베테랑 군인으로 해군 특수부대인 [[해군 코만도]] 소속 부대인 '드 팡펭탕요'에서 복무했으며 1977년에 해군에서 퇴역한 후, 1978년 프랑스 국가 헌병대에 지원해 EPIGN에서 복무했으며, 1982년에는 국가 헌병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신분으로 GIGN에 배치되었다.]는 협상가로서 동굴로 들어가 FLNKS의 지도자와 협상을 진행하였으며, FLNKS와의 첫 접촉과정에서 필립 레고르쥐 대위와 5명의 GIGN대원이 포로가 되었다. FLNKS에게 풀려난 이후 무전상으로 협상하는 과정에서 습격사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임을 알게되어 상부에 협상으로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건의했지만 당시의 누벨칼레도니의 독립 여론과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 기간이 맞물려 프랑스 중앙정부는 사건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문했고 최종적으로 무력진압이 단행되었다. || [youtube(axKTWu7SMkQ)] ||[[파일:1588760780-1671012470-6.jpg|width=100%]]|| ||<-2>우베아 인질사태를 다룬 2011년작 [[프랑스 영화]] 리벨리온(L'Ordre et la Morale). GIGN 필립 레고르쥐 대위의 시점으로 1차 진압작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 진압작전은 GIGN, EPIGN, 코만도 위베르가 주력부대로 동굴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측면을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진 제11충격낙하산연대가 전담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 진압작전은 5월 15일 새벽 6시에 시작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테러작전사에서 흔치않은 치열한 정글전투가 펼쳐졌으며 양측 모두 자동화기, 산탄총,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상태에서 총알을 주고받는 난전이 펼쳐졌다. FLNKS은 헌병대에서 탈취한 파마스 소총, 산탄총을 가지고 동굴 외부에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으며 FR-F1 저격총과 AA-52 기관총을 이용해 기관총진지까지 구축해 두었기 때문에 진압작전 과정에서 코만도 위베르가 화염방사기로 기관총진지를 제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진압부대는 1차 공격으로 동굴 앞 진지를 제압했으며 남은 FLNKS을 동굴로 내부로 몰아넣었다. 복잡한 정글지형 때문에 예상보다 점령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정면 공격부대와 측면으로 공격해 들어간 제11충격낙하산연대가 난전속에서 통신이 엇갈려 서로 오사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1차 진압작전을 통해 동굴주변에 FLNKS이 구축해놓았던 방어선과 진지를 모두 제압하고 동굴입구 앞에 도달했으며 이 과정에서 12명의 FLNKS이 사망하고 2명의 11충격낙하산연대 대원이 사망했다. 2차 진압작전은 5월 15일 오전 12시에 시작되었으며 동굴입구에서 2명의 인질을 인간방패 삼아 농성하던 FLNKS 2명을 [[코만도 위베르]]소속 저격수 2명이 동시저격으로 사살하면서 시작되었으며 GIGN이 동굴 내부로 가스탄을 투척하면서 자동화기를 동굴입구에 놓고 권총만으로 돌입했다. 동굴가장 밑바닥에 억류되어있던 인질무리는 인질극이 진행되는 기간동안에 동굴과 부대를 오가며 전령역할을 하던 장 비앙코니 치안판사[* 누메아지역의 지역명예판사로 평소에 우베아 섬 주민에게 어느정도 친분이 있어 경계심이 덜했으며 진압부대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서 작전에 성공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가 진압작전이 실행되기 전날에 GIGN의 요청으로 자신의 사타구니 부위에 몰래 숨겨온[* [[파일:Loelm-MR 73-4.jpg|width=70%]] 카낙족들과 평소에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던 장 비앙코니 치안판사 또한 동굴에 들릴때마다 수시로 몸수색을 당한걸 생각하면 실로 대담하고 용기있는 행동을 한것이며 당시 작전당사자들은 그를 작전성공의 1등 공신으로 평가한다. 다행히 작전전날 방문에서는 FLNKS가 몸수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작전이 개시되면 인질들에게 채워진 수갑을 풀게 하기 위해 자기 입속 껌속에 수갑열쇠도 숨겨서 전달했으나 열쇠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수갑을 찬 상태에서도 권총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6연발 리볼버 권총 2정을 동굴에 억류되있던 GIGN 소속 인질 2명에게 몰래 전달한 상태였으며, 2차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2명의 GIGN 대원이 리볼버를 사용해 FLNKS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FLNKS와 인질무리를 동굴내부에서 분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무리는 동굴 밖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작은 입구을 발견해 GIGN이 그곳으로 모든 인질들을 인솔해서 동굴밖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동굴에서 저항하던 나머지 FLNKS이 항복하면서 인질극은 종료되었다. 인질구출부대는 최종적으로 FLNKS이 은신하고 있는 정글 속 동굴을 포위하고 치열한 교전 끝에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작전결과, 27명의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고 FLNKS조직원 19명이 태스크포스와의 전투중에 사살되고 14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태스크포스 소속의 [[제11충격낙하산연대]] 대원 2명이 진압작전과정에서 전사했다.[* 안타깝게도 2명의 대원 모두 안면부에 총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당시 프랑스 중앙정부도 FLNKS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해 진압작전으로 최소 20명 이상의 진압 부대 대원 사망 + 수 십 명의 인질이 사망하는 결과를 각오하고 무력진압을 최종승인했다. 하지만 작전 결과, 억류되었던 인질 전원 무사, 진압대원 2명 사망, 인질범들은 전원 사살 및 체포되어 경미한 피해로 작전이 종료되어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GIGN을 포함해 진압부대는 어려운 작전조건(정글속 중무장한 다수의 인질범+동굴에 억류된 다수의 인질)에서 최소한의 피해(인질피해 0명, 진압부대 2명 사망)로 작전을 성공시켜 작전성과만으로는 6년뒤에 발생한 1994년 에어 프랑스 8969편 사건에 비견될만큼 성공적인 대테러작전이지만, 정치적으론 대실패한 작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누벨칼레도니는 경제적 문제만 해결된다면 프랑스와의 독립을 금방이라도 행할 극단적인 반프랑스 여론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인종차별에서 시작한 다툼과 그로 인한 사건을 프랑스 정부에서는 독립 시도로 오인하였고, 국내 여론을 의식하여 말로도 해결할 수 있던 사건[* 프랑스정부의 진압작전결심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데, 인질들을 억류한 FLNKS이 군대와의 협상과정에서 프랑스측이 절대로 양보할수 없던 안건인 '''누벨칼레도니 무조건 즉시독립'''을 주장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장시간동안의 협상이 전혀 진전이 되지않은 '''불가능한 협상'''이었다는 점과 그들이 사전에 4명의 프랑스인 헌병을 사살한 사실도 프랑스측의 무력진압 결심에 한 몫했다. FLNKS측은 치안서 습격과 인원사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는 없었으며 그들의 범행을 변호하기위한 입장일뿐이었다. ]을 무력으로 해결했다는 당시 프랑스정부는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의 여론을 맞이해야했다. GIGN은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 인질구출작전을 최소한의 피해로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1994년 하이재킹 사건의 완벽한 해결 이전에 GIGN이라는 부대가 세계에 인지도가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