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G4M (문단 편집) === 몰락 === 베티가 높은 작전고도를 비롯한 비교적 우수한 비행성능, 특히 무엇보다 연합군을 당혹하게 만든 엄청난 항속거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A6M|제로센]]을 비롯한 일본군의 여러 항공기들처럼, 기체의 ''경량화''에 몰두한 결과였다. G4M1형을 미군의 [[B-25]]나 독일의 [[He 111]] 같은, 당시 미국이나 독일 등의 비슷한 포지션의 쌍발 중형폭격기들과 비교해보면, 익폭이나 동체길이 등 기체의 사이즈는 도리어 G4M 쪽이 좀 더 크지만, 반대로 자체중량은 거의 2톤 가까이 더 가볍다. 기체 중량으로 따지면 한 체급 아래인 영국의 [[브리스톨 블렌헤임|보포트]] 등과 차라리 더 가깝다. 심지어는 보포트 폭격기의 야간전투기 버전인 [[브리스톨 보파이터|보파이터]]보다도 기체중량이 가볍다. 연료는 비슷한 양, 아니 심지어 더 많이 실으면서 기체의 중량은 다른 경쟁기종의 80% 미만이니 당연히 월등히 더 멀리 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무장량이 동급 쌍발기들에 비해 2/3에서 절반 정도로 상당히 적은 편이라 투입 소티에 비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다.] 즉, 태평양 전쟁 초기의 화려한 전과의 주역이던 초기형 G4M1들은 연료가 탑재된 동체 내부와 긴 주익에 방탄 장갑도, 자동방루 연료탱크 등의 방어설비도 미비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가벼운 피탄에도 불이 붙어 격추당하기 일쑤인 기체가 된 것이다. 이는 전쟁 극초반, 일본군이 거의 완전한 제해권, 제공권 우세를 누리던 시점이 끝나고 [[미드웨이 해전|미드웨이]]에서 [[과달카날 전투|과달카날]]로 이어지는 피말리는 공방전에 접어들자마자 극명해진다.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한 다음 날인 1942년 8월 8일, 일본군은 어뢰를 탑재한 G4M1 폭격기 23대를 동원 룽가곶의 미군 함선들에 공습을 가했다. 그러나 [[F4F 와일드캣]] 전투기들의 요격과 대공포화로 23기 중 18기가 격추당하고, 120여명의 항공 승무원을 잃었다. 이후 1942년 10월까지, 2개월여 동안의 일본군은 과달카날 인근의 전투에서만 100대 이상의 G4M1와 승무원을 잃는다. 게다가 원래 '더 높은 고도로, 더 멀리서' 날아와 공격해서 전투기의 요격이나 대공포화에 노출될 기회를 줄이는 것으로 생존성을 높인다는 컨셉(으로 방어력을 '다이어트' 한 것)이었다지만, 다른 한편으로 베티는 중고도 및 고고도에서의 통상폭탄을 사용한 폭격 뿐 아니라 [[뇌격기]]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말레이 해전]]때도 26기의 G4M이 [[G3M]] '넬리'와 함께 작전에 참여, 전함 [[킹 조지 5세급 전함|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3발의 어뢰를, [[리펄스]]에 4발 이상의 어뢰를 명중시켜 치명타를 가했다. 그러나 [[과달카날]]과 [[솔로몬 제도]] 인근의 전장은, 적 전투기 세력의 위협도 거의 없고, 상대의 대공방어도 허점이 많았던 [[말레이 해전]] 등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상대의 항공엄호 밖은 커녕 정반대로, 바다에선 쌍방의 항공모함들이 사투를 벌이고 헨더슨 비행장에 자리잡은 [[캑터스 항공대]]가 날아다니는 쌍방의 항공전력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한복판이었다. 또한 과달카날의 미 지상군은 물론이고 특히 미 해군 함정들의 대공방어 수준은 초기 영국 해군이나 일본 해군 함정의 대공방어와는 차원이 다르게 충실했다. 과달카날 등에서 베티는 단독이 아니라, 주로는 역시 기나긴 항속거리를 자랑하던 제로센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격임무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나 라바울 '타이난 항공대'의 전투기들이 연합군 항공전력을 일소해 준 것도 아닌 이상, 베티들은 언제나 반가이 맞이해주는 F4F 와일드캣, [[P-40]] 전투기들을(나중에는 [[P-38 라이트닝]] 전투기도 배치된다) 뿌리치고, 맹렬한 대공포화를 뚫고 들어가 헨더슨 비행장에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함대원형진|대공원형진]]"을 비집고 들어가 함선에 뇌격을 가해야 하는 고난이도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체의 취약한 방어력과 일본군의 자살공격에 가까운 지나치게 공격적인 전술이 겹치며 G4M은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된 룽가곶 공습처럼 출격했던 기체의 대다수가 살아돌아가지 못하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잖았다.[* 유럽전선의 미 육군 항공대가 [[B-17]]을 동원한 주간폭격을 중단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대규모 손실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던 "검은 목요일" 즉, 1943년 10월 14일의 [[슈바인푸르트 공습]] 당시 격추당한 폭격기의 숫자는 전체 공습 참여 기체의 1/3 정도였다. 나아가 애초 거의 '자살임무'를 각오하고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던 [[플로이에슈티 공습]]에서 격추당한 [[B-24]] 폭격기의 숫자는 공습에 동원된 기체의 30% 정도, 기타 손상으로 귀환하지 못한 기체를 포함 작전 중 손실을 모두 합하면 약 절반 정도의 기체를 잃었다. 앞의 독일 상공에서 격추당한 B-17들은 호위 전투기 없이 폭격기 단독으로 수행된 주간폭격 과정에서 잃은 기체들이었다. 이를 비교해보면 - 비록 전투에 동원된 기체의 숫자가 훨씬 적어서 덜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손실 비율을 따져본다면 - 일본군의 베티들이 과달카날 전투를 치르며 입은 피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라바울에 주둔하며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되던 일본해군 제25항공전단에 원래 처음 배치된 폭격대는 제4항공대였으나, G4M을 주력으로 운용하던 이들은 전투 개시 한달여만인 1942년 9월, 지나친 손실을 버틸 수 없어 철수하고 만다. 그런데 사실 제4항공대는 이미 그 이전, 1942년 2월 20일 부건빌 인근에서 항모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포함된 미 해군 제11기동부대를 공격하다, 투입된 17기의 G4M 중 15기를 잃는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이 전투는 호위전투기 없이 공격하다 미군 전투기들에 일방적으로 당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바로 이 전투에서 미 해군 최초의 에이스로 기록된 [[에드워드 오헤어]] 소령이 하루에 G4M 5대를 격추시키며 에이스로 등극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후 제로센의 호위를 받으며 이뤄진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전투에서도 역시 큰 손실을 입는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설계자는 그래도 승무원들을 배려해서 후방 사수석에 방어무장으로 [[20mm]] [[기관포]]를 설치해 주었으나,[* 굳이 일본기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방어기총으로 20mm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동 시기 미국의 경우 12.7mm 기총을 사용했고 영국은 아예 7.7mm 기총이 방어무장이었다.] 애초에 빠르게 지나가는 전투기들에게 포신이 짧고 탄속이 느린 [[99식 20mm 기총|99식 1호 기관포]]가 먹히기는 어려웠다. 사실 이건 방어기총으로 쓰인 다른 병기들도 겪었던 문제들로, 미국의 12.7mm 기관총은 탄속, 탄도 -그리고 제어- 가 매우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0kph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공중전에서는 맞추기가 매우 어려웠다. 방어기총을 쏘는 입장에서는 12.7mm던 20mm던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항공기를 잡는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도 20mm는 20mm라고 맞추기만 하면 위력만큼은 확실했기에 미군 조종사들은 항상 일본 폭격기의 후방 총좌를 주의하며 접근했다고 한다. 미국은 몇 번 상대해본 결과 탄환이 스치기만해도 불이 붙는다면서[* 많은 국가의 [[전투기]]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미군]]의 전투기들 역시 탄환의 궤도를 확인하면서(예광탄) 파괴력도 높이려는(소이탄) 의도로 '''[[소이탄]]과 [[예광탄]]을 [[철갑탄]]과 섞어서 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는데, 이것이 [[일본군]]의 [[폭격기]]들을 상대할 때 예상 이상으로 좋은 전과를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알게 된 미군은 전훈을 반영하여 이후 대부분의 장탄을 소이탄으로 도배해 버리는 끔찍한(?) 짓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G4M은 쌍발폭격기여서 피탄면적도 넓고 날개도 상대적으로 컸기에 피탄 확률이 더 높아서 많은 피해를 봤다고 한다.] '''"원샷 [[라이터]]"''' 또는 '''"날아다니는 [[지포]] 라이터"''', 모양이 [[시가(담배)|시가]]랑 비슷해서 '''"날아다니는 시가"'''란 별명을 붙였다. 일본해군에서는 담배를 닮았다고 해서 '''''하마키(葉巻, [[시가(담배)|시가]])'''''라 불렀다. 방어력이 좋다는 연합군의 중폭격기들도 많이 격추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원 샷 라이터' 또는 '플라잉 지포'라는 별명이 붙은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연합군의 중폭격기를 격추하기 위해서 독일은 20mm 기관포도 모자라서 30mm [[MK 108]]은 물론이고 [[MK 103]]도 탑재하려고 시도했으며 공대공 로켓까지 사용해야 했으며 [[8,8cm FlaK]]과 128mm이 열심히 굴러야 했다. 게다가 다른 일본의 비행기처럼 베티도 숙련된 조종사가 필요했으며, 신참 조종사가 조종하는 경우 대형폭격기의 특성을 넘지 못해 뇌격같은 어려운 임무를 할 때 뇌격을 하기도 전에 연합군의 대공포에 쳐맞고 추락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견디다 못해, 1943년 3월, 663번째 생산기부터는 주익 외판 안쪽에 30mm 두께의 고무시트를 붙여 연료탱크 아랫면의 방호력을 강화한다. 또한 동체 내부 연료탱크 주변에도 적층된 고무시트와 스폰지를 대는 조치를 취한다.[[http://pwencycl.kgbudge.com/G/4/G4M_Betty.htm|#]] [[https://en.wikipedia.org/wiki/Mitsubishi_G4M#Variants|##]] 그러나 이 시기의 대책은 완전한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를 설치한 것은 아닌, 연료탱크를 부분적으로 보강한 임시조치에 가까웠고, 제대로된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가 적용되는 것은 1944년, 후기형인 "G4M3"형에 가서야 이뤄진다. 또한 동 663호 생산기부터 후방 총좌 사수석에 방탄장갑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다만 5mm로, 후방 총좌와 같은 피탄위험이 높은 부위의 방어장갑으로는 다소 얇은 편이다. 그러나 임시방편에 가까운 이 정도 개수만으로 속도는 9km, 항속거리는 315km가 감소했다. 이후 1943년 후반 생산되기 시작한 G4M2에서는 기체 상부에 20mm 기관포탑을 증설하는 등, 방어무장을 강화하고, 비행고도를 8,950m까지 높인다. 그리고 1944년부터 생산된 G4M3에 이르러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드디어 온전한 자동방루식 연료탱크를 장비하고 방어 장갑도 증설한다. 이 시점이면 사실상 설계 컨셉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 G4M이 어찌어찌 허술한 방어력 등 취약점을 개선하려 안간힘을 쓰던 시점엔, 이미 미국은 신형 전투기들을 대거 양산, 태평양 전역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초반 몇 대 없던 육군항공대의 [[P-38 라이트닝]]들도 이미 과달카날 전투 후반부엔 헨더슨 비행장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이어서 [[F4U 콜세어]], [[F6F 헬캣]]이 해병대와 항모기동부대의 와일드캣을 교체한다. 태평양 전쟁 말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선에서 [[Bf 109]]의 카운터로 활약한 육군항공대의 [[P-51 머스탱]]마저 태평양 전역에 투입되기에 이른다. 여전히 제로센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일본 해군항공대 전투기 세력은 삽시간에 몰락했고, 베티보다 더 높이 날 수 있으며, 훨씬 고속 성능을 가진 기체들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제로센]]과 함께 [[야라레메카]]로 전락했다. 애초에 베티는 방어력이 우수한 게 아니라 높은 상승 고도와 기동성에 긴 항속거리를 더해 적기가 쫓을 수 없어 활약할 수 있던 기체이지만, 그 장점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의미없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항속거리까지 지닌 P-38 라이트닝에 의해 이루어진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거 작전은 전쟁 후반기 G4M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태평양 전쟁 후반부에는 [[카미카제]] 공격에 투입되거나, 유인 자살폭탄으로 유명한 [[MXY-7 오카]]를 견인해주기 위해 투입되기도 하였으며, 개조를 하여 [[B-29]]를 요격하기 위한 요격작전에도 투입이 되었다. 그래봤자 전쟁 전에 개발된 기체를 큰 개조없이 주욱 쓰고 있었으니 될 리가… 제로기보다 피탄면적이 훨씬 넓고 방어력은 더 떨어지며 훨씬 느린 G4M으로 반자이 어택을 하려는 것은 당시 미군의 방공망을 고려했을 때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별의 별 기체들을 총동원해야 했던 일본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짓이었지만. 전후, 일본에서는 퇴역했지만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버리고 간 기체를 입수하여 1949년까지 운용하였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독립 문제]]로 다투면서 다 깨먹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되었듯,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부건빌 섬의 일본군 전선 시찰을 위해 이 기체를 탔다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출동한 [[P-38 라이트닝]] 편대의 기관포탄에 맞고 밀림에 격추되어 사망했다. 자세한 사항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서 참고. 무게중심이 기체 중앙에 있어서 이착륙 시에는 조종사를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 6명이 기체 후미에 몰려있어야 했다. 문제는 승무원이 비행 중 죽어서 승무원이 모자랄 경우였는데, 이 경우에는 랜딩 기어의 브레이크를 풀로 밟았다가 툭 떼면 그 반동 때문인지 기체가 후미쪽으로 살짝 가라앉아서 그렇게 착륙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