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15 (문단 편집) == 개발 == F-15의 기원은 미 공군과 미 해군이 미래의 전략 항공기를 가지고 서로 싸웠던 F-111에서 비롯되었다.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공군과 해군에 대해 성능 타협을 해서라도 같은 항공기를 쓸 것을 원했다. 그래서 미 공군은 해군이 도입한 F-4를 들여왔고 미 해군과 함께 TFX ([[F-111]]) 프로그램에 착수한다. 그러나 미 공군은 전술 [[폭격기]]를, 미 해군은 장거리 요격기를 요구했으므로 양측의 의견은 맞춰지지 않았고, 맥나마라 장관이 직접 F-111의 길이에 간섭하면서 타협을 요구했으나 해군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F-111은 미 공군만 이용하게 된다. 이후 F-111을 호위할 전투기로 F-X 전투기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Department of Defense Research and Engineering의 해럴드 브라운은 'F-X'의 연구 시작과 F-5를 고려하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8월 1일 가브리엘 디소스웨이(Gabriel Disosway) 장군은 전술공군사령부를 지휘하고 F-X의 개발을 요구하지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요구 성능을 마하 3에서 마하 2.5로 낮췄다. F-X에 대한 공식 요구 문서는 1965년 10월 완성되었고, 12월 8일 13개 회사들에 보내진다. 제안에 8개 회사가 응답했고, 검토 끝에 최종적으로 4개 회사가 선정되었다. 회사들은 약 500여개의 모델을 개발하였는데, 대부분의 구상안은 가변익 구조에 6만 파운드(27,000kg)를 넘는 무게, 최고속도 마하 2.7과 추중비 0.75를 포함한 특징을 가졌다. 1966년 6월까지 연구된 결과물은 대략 F-111과 비슷한 크기와 무게였고, 공중 우세 전투기의 컨셉과는 거리가 멀었다. F-111과 함께 F-15를 개발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 월남전이었다. 베트남에서의 공중전 결과는 예상보다 실망스러웠다. 당시에는 [[미사일 만능주의|미사일을 이용한 BVR 전투가 대세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이에 맞춰 항공기를 개발했다. 그 결과 항공기의 속도와 레이더 성능에 집중하는 대신 기동성과 기총 등 근접전 성능이 희생되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미 공군, 미 해군, 미 해병대가 모두 사용한 [[F-4 팬텀 II]]다. F-4는 높은 속도, 상당한 무장량, 훌륭한 성능의 레이더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총이 생략되는 등 근접전에 유리한 전투기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조종사들의 근접전 실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 WVR(가시거리 전투) 상황이 더 자주 발생했고, 근접전에서는 미사일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결국 F-4는 MiG-19, MiG-21보다 성능상으로 월등했음에도 상당한 고전을 강요당했다. 이에 미군은 훈련 개선과 공군용 F-4의 후기형(D형, E형)에 M61 기관포를 도입하여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시도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것은 존 보이드의 에너지 기동 이론으로 이어져 F-15 개발방침이 선회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그 동안 미 해군은 F-111이 자신들의 요구를 맞출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해군용 전투기 개발을 시작했다(VFAX 프로그램). 1966년 5월 맥나마라 장관은 다시 미 공군과 미 해군에게 공군의 F-X의 요구사항이 VFAX에서도 해당되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8개월동안 연구한 결과, 미 해군은 체공 시간과 임무 유연성을 강조한 반면 미 공군은 주로 기동성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미 해군과 미 공군은 다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고 그렇게 나온 게 [[F-14]]이다. 1967년, 마하 2.8을 넘는 초음속 고고도 요격기인 [[MiG-25]]가 나타났다. 그 뒤 MiG-25가 F-4보다 좋은 전투기라는 인식이 순식간에 퍼지게 되었고, [[MiG-23]]에게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고 평가되는 F-X 프로그램조차도 MiG-25보다 속도, 상승한도, 내구도 면에서 열세에 놓였다는 추측이 나왔다. 이에 미 공군과 전략공군사령부는 F-X 프로그램을 개편하여 더욱 강력한 전투기를 주문하기로 한다. 디소스웨이 장군과 브루스 K. 홀로웨이(Bruce K. Holloway) 공군참모총장은 MiG-25의 예상 성능을 뛰어넘는 전투기 개발을 요구했다. 1968년 8월 '추중비 1 이상의 쌍발엔진을 갖춘 단좌형 전투기' 개발 요청이 주요 항공기 제작사들에게 보내졌다. 1969년 6월까지 여러 도안들이 제출되었고, 1969년 12월 23일 공군은 맥도넬 더글라스가 선택되었음을 발표한다. F-15의 초기형은 단좌형이 F-15A, 복좌형이 F-15B로 명명되었다. F-15A의 첫 비행은 1972년 7월 27일, F-15B의 첫 비행은 1973년 7월에 이루어졌고, 이후 성공적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F-15는 이스라엘이나 일본 같은 고객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F-15는 도그파이터로 이용하기에 너무 거대했고, 높은 단가로 인해 많이 도입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지적과 비판은 [[F-16]]이 도입되는 Lightweight Fighter(LWF) 프로그램과 해군의 [[F/A-18]]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