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DC-10 (문단 편집) == 개발 과정 == 시초는 [[미 공군]]의 신형 수송기 사업으로 [[보잉]]과 [[록히드]]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와중에[* 이때 [[록히드]]에게 패배한 [[보잉]]에서 자신들의 모델을 여객기형으로 만든 것이 여객기 역사에 남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보잉 747|B747]]이다.] 도저히 설 자리가 없었던 [[맥도넬 더글라스]]가 [[C-5]]A의 구상안에 기초를 두어서 대형 여객기 시장에 뛰어들려는 계획이었는데, 더글라스는 이를 위해 최대 550명을 수용할 수 있고 길이가 [[DC-8]]과 비슷한 2층 구조의 동체를 가진 4발 여객기를 제작할 계획이었는데, 이미 더글라스 사내에서는 단거리용 중형 제트기 [[DC-9]]이 개발중이었기 때문에 이 기종은 회사 내에서는 DC-10이라 불렀다.[* [[A380]]을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MD-11]] 다음으로 MD-12라는 4발 2층구조 여객기 개발 계획도 있었으나 [[보잉]]과의 합병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최대 399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고 길이가 DC-8 Super 60과 비슷한 단층 3발 광동체 여객기 계획이 더 설득력을 얻자 취소되었다. [[1966년]]에 [[아메리칸 항공]]의 경영진이 [[제너럴 일렉트릭]]의 공장을 시찰했을 때 [[C-5|C-5A]]에 장착하기 위해 개발 중이던 [[TF39]] 엔진을 보았다. 그들은 이 엔진을 여객기용으로 개발해서 탑재하면 250석 규모에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 가능한 대형 여객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같은 해 3월 25일에 새로운 쌍발의 대형 여객기 개발을 요구했는데 그 요구 사항이란, 1. 추력 4만 파운드의 고바이패스비 엔진 탑재 2. 좌석은 시트 피치 36인치로 250석 3. 승객 1인당 250파운드의 수하물과 5천 파운드의 화물 4. 항속거리는 1,850해리 (약 3,426 km) 이었고, 당시 구상중이던 여객기로 이 요구사항을 딱 맞춰줄 수 있었던 맥도넬 더글라스는 "진짜로 발주하면 요구한 사양의 여객기를 1966년 안에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요구는 더글러스가 구상하고 있던 대형 여객기의 방향성과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사 측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2발 엔진을 원하고 있었는데, [[TF39]] 엔진은 아직 개발 중인 데다가 이를 민수용으로 바꾼 [[제너럴 일렉트릭 CF6|CF6]] 엔진도 성능이나 신뢰성 면에서 불안하였다. 더군다나 중장거리 노선에도 운용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DC-10의 특성상 당시 적용되던 [[ETOPS]]를 피할 수 있는 3발 엔진을 채용해야만 했다. 이 의견을 [[아메리칸 항공]]과 [[유나이티드 항공]]이 받아들이게 된다.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맥도넬 더글라스는[* 더글라스는 1967년 4월 28일에 맥도넬 사와 합병하여 '맥도넬 더글라스'가 되었다.] 1967년 봄에 미국 국내선용의 3발, 국제선용의 4발 기종[* 조종석이 [[보잉 747]]과 마찬가지로 2층에 설치할 계획이었다.]을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4발 기종 구상은 이미 [[보잉 747]] 덕분에 어느 항공사에서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4발 기종은 취소되고 중거리형과 장거리형으로 가닥을 잡고 차분히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동안은 쌍발기 제작도 고려되었지만, 미국 국내에는 고지도 존재하고 있어, 1발 정지시의 안전성을 생각한 3발기가 되었고, 또한 당시 혼잡했던 [[라과디아 공항]]의 좁은 게이트에 탑승할 수 있도록 날개 폭도 좁혔다. 그런데 하필이면 공장의 여유가 남았던 록히드가 [[1967년]] 9월에 L-1011의 개발을 발표하면서 맥도넬 더글라스의 설계가 한창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고, 같은 해 11월에 무리수를 둬서 DC-10의 개발계획을 발표했으나 이 시점에서도 설계 중이었여서 상세 사양을 밝힐 수 없었다. 어찌어찌 다음 해인 [[1968년]] 2월 19일에 아메리칸 항공에게 옵션 포함으로 L-1011보다 빨리 50대 발주를 받았는데, 아메리칸 항공은 L-1011도 발주했고, 동년 4월 3일에 L-1011의 런치가 발표되었는데도 아직 기본설계가 다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S덕트를 내장하여 깔끔히 마감한 L-1011과 달리 3번째 엔진 덕트를 수직 미익(꼬리날개) 중앙에 집어넣은 어수선한 모습으로 급조하는 등 부랴부랴 설계 마감에 서둘렀고, 그 후 4월 25일에 유나이티드 항공에게 옵션 포함 60대 주문을 받고 간신히 런치를 발표했다. 원체 좀 더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boeingimages.com/BI217244.jpg|width=100%]]}}} || || '''DC-10의 초도비행''' [[http://www.boeingimages.com/archive/McDonnell%20Douglas%20DC-10%20on%20its%20First%20Flight-2F3XC5J6EFA.html|출처]] || 이후 상술한 것처럼 시제기는 [[1970년]] 7월 23일에 롤아웃된 후 같은 해 [[8월 29일]]에 첫 비행을 했고, 여객 운항은 [[1971년]] 8월 5일에 [[아메리칸 항공]]이 N103AA가 로스앤젤레스-시카고 노선을 비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보잉 747이 국제선에서의 장거리 대량 수송을 담당하는 기체 시리즈로 재인식되며 미국 국내선 중심으로 운영되던 DC-10도 장거리형의 -30형과 -40형이 개발되게 되었다. DC-10과 L-1011의 경쟁은 1981년 록히드가 여객기 사업을 철수하면서 DC-10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맥도넬 더글라스의 경영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이후 보잉에 합병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나 [[터키항공 981편 추락사고]]로 인한 배상 건이 회사를 추락시켰다. 2014년 2월 24일에 [[비만 방글라데시 항공]] 소속 DC-10-30(S2-ACR)[* 원래 [[페덱스 익스프레스]]에 배송될 기체였으나 배송이 실패하자 비만 방글라데시 항공에 [[1988년]] 12월에 배송된 기체였다.]이 [[버밍엄]]-[[다카(방글라데시)|다카]] 전세비행을 마치면서, 모든 DC-10 여객기는 운항을 종료했다[* 참고로 DC-10의 마지막 정기 여객비행 역시 동년 2월 20일에 있던 같은 항공사 소속의 다카-버밍엄 노선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