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CCM(음악) (문단 편집) ==== 각 지역 찬양선교단의 활동 ====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찬양선교단이 CCM의 보급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예수전도단]]의 화요 찬양집회가 유명했는데, 특별히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은 찬양사역, 혹은 CCM 가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최인혁과 박종호이며, 2000년대에는 윤주형 목사가 이름을 알렸다. 2000년대부터는 캠퍼스워십 팀의 심형진 간사, 마커스워십의 소진영, 심종호 간사가 대표적인 찬양선교단이다. 예수전도단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팀은 온누리교회에서 후원하는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이었는데, 이 팀의 인도자인 '하 스데반' 선교사는 형인 [[하용조]] 목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한국교회 내에 '경배와 찬양'으로 익숙한 찬양예배를 보급하며 교회의 예배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 팀의 주 활동지역은 서울이었으나, 전국 투어, 혹은 지방 훈련 등도 활발히 진행했다. 또한,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찬양팀 중에서 '보이시스'라는 팀을 결성하고 CCM 앨범을 발매한 케이스도 있었고, 대구 지역에서는 '찬미워십'이 유명했다. 찬미워십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악보집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찬미예수'의 발행인인 최용덕 간사가 주축이 되었던 팀이었다. 특별히 찬미예수는 당시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곡들을 수록하여 교회에 확산, 보급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용덕 간사 특유의 손글씨와 손으로 직접 그린 악보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데, 디지털 조판으로 넘어와서도 이 특유의 악보와 손글씨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찬미워십 출신 사역자로는 '소망의바다'의 [[민호기]] [[목사]]가 대표적이며, 그는 현재 찬미워십의 [[리더]]이기도 하다. 특정지역은 아니지만, 찬양선교단체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팀이 '주찬양 선교단'과 '컨티넨탈 싱어즈'이다. 1. 주찬양 선교단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던 팀으로, 사실상 한국 CCM의 산실 역할을 했던 팀이었다. 최덕신이 팀을 이끌었으며, 자신의 자작곡을 중심으로 해외 번안곡, 혹은 단원들의 다른 곡들로 앨범을 구성하였고, 곡들의 퀄리티도 꽤 높다. 90년대 교회 청년부에서 자주 불렀던 곡들이 주찬양 앨범에 다수 수록되어 있었고, 성가대에서도 자주 주찬양의 악보로 찬양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팀이 해체되었는데, 이는 하단 각중에서 설명된 최덕신의 스캔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활동했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음원 사이트에 주찬양의 앨범 전체가 서비스되어 있다. 지금 듣기에는 상당히 옛스러운 사운드이지만, 당시(80~90년대)에는 상당히 세련된 곡들이었다. 이곳 출신의 대표적인 사역자가 바로 강명식. 실제로도 곡을 몇 곡 쓰기도 했고, 10집과 11집에서는 듀엣, 혹은 솔로로 한 곡씩을 불렀다. 2. 한국컨티넨탈싱어즈는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다. 미국의 '국제 컨티넨탈 싱어즈'에서 곡이 나오면, 각 나라에 있는 일종의 지부에서 이 곡을 번안하고, 곡에 맞춰서 만들어진 댄스를 함께 익히면서 그 나라의 말로 활동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컨티넨탈싱어즈는 전국투어 등을 통하여 많은 교회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 높은 안무와 곡들로 "아! 교회 안에서도 저런 찬양이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 팀에서도 당대 CCM계를 이끌어갔던 사역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김명식(단장)이다. 그 외에도 여성듀오 '창문'의 박재옥, 디사이플스의 리더였던 천관웅 목사 등이 컨티넨탈 출신이다. 이렇게 각 지역에서도 찬양집회가 활성화 되면서 CCM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교회에서도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던 "교회 내에 드럼과 전자악기를 놓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논쟁은 대개 "괜찮다."라는 것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단, 신학교들은 예외였는데, 대표적인 보수교단 신학교인 [[총신대학교]]에서는 90년대 후반에서야 밴드에 대한 거부감이 공식적으로 사라졌으며, 부산의 [[고신대학교]]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