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B-29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 일단 좀 늦게 개발되다보니 미 [[육군 항공대]]에 배치되어 실전 투입된 것은 1944년 부터이다.[* 그래도 '''동시에''' 개발되던 [[B-32]]보다는 일찍 투입되었다.] B-29가 빨리 실전 투입된 이유는 사실 미 국방부와 육군 항공대가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B-29 계획이 승인되자마자 1,600대를 선주문을 하는 바람에 이 폭격기에만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더 큰 30억달러를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돈을 질렀으니 B-29의 가장 중요한 개발 이유인 '''일본 본토 폭격''' 목적을 달성하고, 일본 본토에 궤멸적 피해를 입힐 정도로 본전을 뽑으려면[* [[진주만 공습]]의 치욕을 갚아주지 못한채 종전을 맞을 경우, 정치적으로 큰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실전에 최대한 빨리 투입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보잉사는 기존 [[B-17]]과는 달리 테스트 비행을 거의 생략하고 실전 배치를 서둘렀으며 그 과정에서 엔진문제, 당시 생소한 제원의 폭격기라는 변수로 인해 초기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탑승을 보이콧했다. 이때 B-29 테스트에 관여했던 폴 티비츠 중령[*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람이다.]은 신뢰도를 문제삼아 저항하는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을 납득하게 하려고, 여성 조종사를 테스트 파일럿으로 투입한다. 여성도 B-29를 조종할 수 있다면 그들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이유로 당시 미국에서 흔치 않던 여성 조종사 도라 도허티와 도로테아 무어맨을 투입해 테스트 비행을 실시했고, 이 두 여성이 성공적으로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미 육군 항공대에 B-29 조종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써, 폭격기 조종사들의 불안감을 날리고 B-29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가 PBS에서 방영되었었다. [[https://www.pbs.org/wgbh/americanexperience/features/flygirls-wasp-and-b-29/|#]] 유럽 전선에서는 이미 [[B-17]]과 [[B-24]]가 나치 독일을 충분히 갈아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B-29는 양산될 때마다 그 어마어마한 항속거리와 폭장량, 고고도 비행능력을 이용하여 [[일본을 공격한다|일본을 공격하는데]] 집중되었다. 상술한 대로 B-29의 존재 이유 자체가 항속거리와 폭장량이었기 때문. 원래 39년 소요 제기가 있었을때까지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 했었는데, [[진주만 공습]]을 맞고 나니 미국 입장에선 반드시 복수해야되는데, [[둘리틀 특공대]]때 동원한 [[B-25]]라는 굉장히 위험천만하고 가성비가 안나오는 작전이 아닌한 당시 미국 어떤 항공기도 일본 본토까지 때릴 수 있는 항속거리가 안나왔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이 터진 이후의 B-29는 '''[[까라면 까|"설계도면 나오면 무조건 띄워!"]]'''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지며, [[공밀레]]를 총동원해 시제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제식 채용되고 상술한대로 선주문을 띄웠다. 당시 미국의 전장에서 최고의 항속거리와 고공 비행능력이 필요한 전장은 오직 일본 본토뿐이라 B-29는 [[사이판]], [[티니안]], [[괌]] 탈환 이후 태평양 전역에 거의 몰빵했고, 그 성능으로 전쟁 후반의 판도를 일방적인 미국의 구타(...)로 바꾼 것이 B-29이며, 이 시기에 영국에는 기만을 목적으로 1기가 전개된적이있다. 이미 B-17과 B-24, 영국 왕립공군의 랭커스터가 신나게 때려부수고 있으니 투입해도 별 이점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난 뒤 1950년, 보유중인 폭격기의 노후화와 신규 폭격기의 개발 지연으로 당장 핵 폭격기가 필요했던 영국 공군이 1950년 B-29를 '워싱턴 B.1 (Washington B.1)' 이라는 제식명으로 87기를 도입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캔버라 폭격기가 등장했고, 사고로 손실된 기체나 호주로 보내진 2기를 제외한 전량이 1952년 미 공군으로 반환되면서, 남아있는 워싱턴 폭격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https://forum.warthunder.com/index.php?/topic/112485-raf-washington-b1-the-british-b-29/|#]]] 미국의 전략가들은 어디에서 B-29를 출격시켜 일본을 공격할지를 연구했다. 별별 후보지가 다 있었는데 나중에 개발되는 마리아나 제도를 비롯해서 인도, 필리핀, 만주, 대만, 시베리아도 있었다. 특기할만한 계획으로는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를 기지로 개발해서 일본을 치자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1943년 [[알류샨 열도 전역|알류샨 전투]]를 치르면서, 이 동네는 전투를 치르기는커녕 사람 사는 것조차도 적절치 않은 곳임을 깨닫고 B-29 운영계획을 포기했다. 그 다음으로 인도를 B-29 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뜨다가, 그 뒤에는 중화민국 청두로 옮겨가고, 인도를 후방기지로 삼고 중국을 전진기지로 하여 일본을 치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육지와 해상으로는 마땅한 보급로가 없었고, 남은 방법이라곤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 일명 '험프'(hump)를 넘어 중국 청두로 항공 보급하는 방법뿐이었다. 폭탄과 기름은 물론이고 기지 병력들이 쓸 화장지조차도 하나하나 항공 보급을 하려다보니 당연하게도 가동율이 처참하게 낮았다. B-29 1기가 폭격임무 출격을 하기 위해 같은 B-29가 6회 이상의 험프 수송을 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비효율적인,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또한 당시 히말라야 산맥 험프를 넘는 항공 보급로는 그 자체로 대단히 위험해서 비전투 손실이 적지 않았다.[* 항공기가 엄청나게 발달한 현재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 항공편은 사실상 없다.] 타임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B-29의 일본폭격 편에서는 험프 수송을 이렇게 묘사한다. '''"험프는 단지 높은 봉우리였을 뿐만 아니라, 험상궂은 날씨의 번식처였다. 혹독한 추위와 갑작스런 폭풍 그리고 급작스런 낙하 현상은 마치 바윗돌로 비행기를 하늘에서 내리치는것 같았다."''' 험프 수송이 시작된 초기 수개월 간 손실은 무려 B-29 12기였으며 여기에 당시 비행단이 보유한 [[C-46]] 수송기 절반 손실이 더해진다.[* 라이프, WORLD WAR II B-29의 일본 폭격, p. 54.] 손실이 이렇게 심각했으니 당시 추락한 항공기의 잔해만으로도 항로를 잡을 수 있었다는 카더라가 나돌 지경이었다. 험프 수송비행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지 이 물자수송 비행 임무는 전투 비행과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으며, 험프 수송 비행을 무사히 마치면 B-29의 [[노즈 아트]]에 폭격 임무와 동일하게 표시를 할 수 있었다. B-29 기수에 낙타가 표시되어 있으면 험프 수송비행 임무 1회를 뜻한다. 폭탄 1개 그림은 당연히 폭격임무 1회다. || [[파일:b29_cu_05.jpg|width=100%]] || || 1944년 인도 주둔 중인 B-29 "Eddie Allen"[* [[https://en.wikipedia.org/wiki/Edmund_T._Allen|에디 앨런(Eddie Allen)]]은 보잉의 유명 테스트 파일럿이자 설계자이다. 그는 B-29 설계와 제작에 직접 관여하였고 무엇보다 원형 제1호기로 B-29 처녀비행을 성공시킨 사람이다. 에디 앨런은 1943년 2월 원형 제2호기 시험비행을 하던 중 엔진 화재로 인한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본 기체는 그를 기리기 위해 보잉 직원들이 돈을 모금하여 미 육군항공대에 기증한 기체다. 총 24회의 전투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45년 전투비행 중 심하게 손상되어 티니안 기지로 귀환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그 뒤로 다시 이륙하지 못했다. 티니안 섬에는 에디 앨런 기체의 잔해가 남아있다.](일련번호 42-24579)의 기수 노즈아트 || 폭격 임무 23회와 더불어 험프 수송(낙타) 10회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기 3회 격추 킬마크는 덤이다. 당시 미군기들은 일본기 격추 표시를 [[욱일기]]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미군 최고의 에이스 [[리처드 봉]] 같은 경우 자신의 애기를 욱일기 킬마크로 도배하고 다녔다. 유럽전선에서 활약한 [[개비 가브레스키]] 같은 경우에는 [[하켄크로이츠]] 수집가다.] 인도-버마를 지나는 도로인 이른바 '레도 공로'는 1945년에나 제대로 기능했고, 그나마 매우 험악한 지형 때문에 제대로 운용하기 힘들었다. 거기에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작전기지가 노출되었다.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해서 중국 남부 해안마저 장악하고 내륙으로 달려들기 시작하면서 B-29 기지가 일본군의 작전권에 들어가 버린 것. 이를 막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조지프 스틸웰]]을 위시한 미군 참모진의 오판 때문에 정예부대이자 유일한 전략 예비대인 Y군 및 [[클레어 셰놀트]]의 중미연합공군을 버마로 보낸 상황이었고, 여기에 자체 역량 부족이 겹친 결과 말 그대로 대패했다. 마침 마리아나 제도가 미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B-29 운용 기지를 태평양 쪽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미군은 1944년 일련의 전투들을 통해 [[괌]], [[사이판]], [[티니안]] 등 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섬들을 손에 넣는다. 이에 미군은 얼씨구나 하고 인도,청두에 있던 B-29들을 이곳으로 옮겨 배치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폭격기만 배치해서는 될 리가 없었기에, 미국은 이들 섬에 원래 있던 일본군의 허접한 비행장을 새롭게 개발하고 거기다 그 옆의 빽빽한 밀림까지 깔끔하게 밀어버리면서 불과 몇달만에 거대한 비행장을 깔아버린뒤 B-29를 줄줄이 띄우는 신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해군의 [[쇼미더머니]]급 해상 보급로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험프 수송같은 비효율적인 작전은 필요가 없었으며, 수송선들이 B-29 운용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들을 날라와서 기지마다 가득가득 쌓아올리고 있었기에 가동율이 크게 오를 수 있었다. [[파일:2012.195.168_1.jpg]] 1945년 초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North Field). 불과 몇달 전까지 조그마한 일본군 비행장이었고 그 주변은 열대 밀림이던 곳이다. 미국은 괌에도 사이판에도 이와 똑같은 거대 비행장을 깔았다. 이 확장 공사로 인해 1945년 당시 티니안 섬 북부 비행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장이었다. 중국보다는 괌, 사이판 등이 훨씬 일본 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서 발진하는 B-29 폭격기들은 연료는 아끼고 폭탄을 더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는 유럽 전선처럼 정밀 조준 폭격을 실시했다. B-29의 성능을 살려서 더욱 더 높은 고도에서. 그런데 [[제트기류]]라는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면서 폭격 성공률이 개판이 되어버렸다.[* 일본 상공은 편서풍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는 제트기류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극소수의 기상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었고 미국 과학계는 제트기류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초기 개판이었던 폭격효과로 인해 일본 본토 국민들은 폭격이 언제 오나 하며 날짜를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었으며, 폭격이 오면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본영]]의 엉터리 선전 덕분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이런 조준 폭격 대신 [[커티스 르메이]][* 그래서 커티스 르메이는 이전의 조준 폭격 전술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이자 조준 폭격 작전을 주장하고 이를 시행한 인물인 해이우드 핸셀 소장 본인에겐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르메이는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의 한계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의 [[소이탄]] 작전으로 무려 336대의 폭격기가 참가한 [[도쿄 대공습]]과 같은 융단폭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대도시들은 전부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이때 X자로 소이탄을 뿌려서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고, 4개월동안의 사이판 정비,비행장 건설등을 통해 기지를 완성해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하게 된 1944년 11월부터 본토 폭격을 시작해, 4개월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초창기 시행착오는 제트기류 외에도, 하늘을 확실히 덮는 수준의 B-29 물량 확보 부족과 GPS의 부재로 선도기의 충분한 선도없이는 폭격 타겟팅이 불가능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작전 경험부족, 레이더 기능의 강화, 이오지마의 확보 이후 뜨게 된 저고도 호위기인 P-51의 투입가능등이 영향을 미쳤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확실한 공습 작전 성공 공식을 찾고, 종전까지 르메이의 B-29 부대는 일본 본토 전역에 골고루 폭격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29s_dropping_bombs.jpg]] 폭격기가 자기 폭탄에 맞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유럽 전선에서 초창기에 빽빽한 컴뱃 박스를 이루고 폭격할 시기에는 실제로 위에서 떨군 폭탄에 맞아 추락한 [[B-17]]들도 있었다. 때문에 그 이후로는 모든 폭격기들은 폭격 직전에 고도를 똑같이 맞춰 이전과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려 했다. 당장 윗 사진도 실제로는 모두 같은 고도에서 투하하는 장면으로 촬영 각도 등의 문제 때문에 이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폭격이 계속되자 그동안 일본 군부의 일방적인 선전만 듣고 이를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던 일본 국민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 군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심리가 은연 중에 확대되어갔다. B-29의 폭격은 일본의 생산능력과 국민들의 전의에 큰 악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유럽 전선에서 독일에 대한 공습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 B-29의 활약에는 일본의 열악한 방공능력도 한몫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조기 경보능력부터가 최악이었다.''' 일단 지리적인 조건에서 이미 불리했는데, 태평양 방향의 일본 본토 바깥에 조기 경보용 레이더를 안정적으로 설치할 수 있는 땅이라고는 본토와 마리아나 사이에 있는 [[이오지마]] 같은 일련의 섬들뿐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이오지마를 점령하면서 조기 경보능력도 같이 잃어버렸다. 또한 기본 장비인 [[레이더]]의 성능은 참전국 중 최악이었고,[* 일본 과학기술자들은 1920년대 '[[야기-우다 안테나]]'라는 선구적인 기술을 확보했으나 일본군이 '''적에게 전파를 쏘는 건 자기 위치를 적에게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속 연구를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레이더 개발에서 미국한테 뒤쳐지게 된다.] 일본 관료제의 경직성 때문에 공습 경보와 요격 명령의 전파속도마저 느려서 경보가 울리는 시점에서는 이미 B-29들이 머리 위에 와 있기 일쑤였다. 레이더 성능이 부족하던 일본은 조기 경보를 위해 이오지마와 같은 일련의 섬이나 조기 경보 목적으로 태평양에 띄운 어선 등에 의존했는데, 이오지마와 같은 섬이 상실되고 재해권까지 뺏기면서 활용이 불가능해졌다. * '''[[요격기]]의 능력이 부족했다.''' B-29가 고고도 폭격을 하던 시절에는 B-29의 작전고도까지 올라가서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있는 기종이 얼마 없었다. 일단 해군의 [[제로센]] 같은 것들은 추격해서 올라가다가 뚝하고 추락하기 일쑤였고[* 당시 목격한 미국 조종사의 말로는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에프킬라 맞은 모기 마냥 갑자기 연료 부족으로 뚝하고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제로센 자체가 문제가 많았었다.] 육군 항공대의 경우도 [[Ki-61 히엔]]이 수랭엔진을 갖추어 그나마 고도 10,000 m 까지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일본 육군의 기체 중 이 고도에서 전투가 가능한 기체는 히엔 뿐이었다. (太平洋戦争研究会 2001, pp. 62-63) [[Ki-84 하야테]]가 더 고성능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카지마 호마레]]에도 터보슈퍼차저 같은 설비는 없기 때문에 고고도 성능에는 특출난 구석이 없다. 2단 3속 과급기를 장비한 고고도 배리에이션 NK9A가 있었지만 A라는 기호에서 보이듯 가장 먼저 개발된 버전임에도 프로토타입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전말 일본의 열악한 공업능력으로 양산된 숫자도 그리 많지 않는 데다가 품질까지 형편없어서 카탈로그상의 성능에 훨씬 못미치는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B-29가 고도를 낮춘 뒤에야 어찌저찌 따라 붙었지만 이제는 고질적인 화력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거기에다 전쟁 후반기에 들어서 심각해진 본토의 공업능력 저하는 전투기 자체의 신뢰성과 성능을 제대로 갉아먹었다. 게다가 연료 수급 상황마저 열악해졌고, 전투기들을 운용하는 조종사와 정비사들의 자질도 수준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제대로 된 요격 전략이나 전술을 펼칠 수가 없어서 제각기 요격에 나선 전투기들은 20mm 기관포를 위시한 B-29의 우람한 방어화력에 공중분해당하기 일쑤였고, 궁여지책으로 [[카미카제]]까지 동원되는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P-51 머스탱]] 같은 강력한 전투기들이 [[호위기]]로 붙기 시작하자, 일본 [[일본군 육군|육]], [[일본군 해군|해군]] 전투기들의 손실은 급증했고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사실상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아예 건드리지도 못한 건 아니어서 1945년 5월 25일 저녁에서 26일 새벽 사이 [[J1N]] 겟코로 B-29 5기를 격추한 해군의 쿠라모토 쥬조(倉本十三) [[상사(계급)|상등비행병조]](B-29 총 6기 격추 2기 중파)와 [[Ki-45 토류]]로 격추 기록은 세운 육군의 카시이데 이사무(樫出勇) 항공[[대위]](B-29 7기 격추), [[Ki-44]]로 6대를 격추시킨 요시다 요시오 대위[* 나중에 5식전으로 기종을 전환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투입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등 일부 조종사들은 어찌어찌 격추시키기는 했다. 일본의 항공기에 의해서 격추된 B-29는 74대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 전선에서 영국이나 독일이 보여준 방공능력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치다.[* B-29는 유럽 전선에 배치된 B-17, B-24보다 고성능인데다가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공습하기 시작할 무렵이면 미군의 폭격 교리 자체도 완성단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B-29가 본격적으로 일본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게 1944년 중반쯤인데 이 무렵이면 유럽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 8공군의 월간 소티 대비 손실률은 1%까지 떨어지게 된다.1943년에는 심할 때는 6.6%까지도 기록했다. 하물며 독일보다 상황이 더 떨어지는 일본이다. 1% 손실이라 독일군이 성과를 많이 못냈을 것 같지만 전쟁기간 동안 독일군은 랭커스터와 B17, 24에게 두들겨 맞고 머스탱에게 농락당하면서도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 9949대 영국 왕립 공군 폭격기 11965대, 전투기의 경우 영국군 10045기, 미군 8045기를 격추했다.] * '''[[대공포]]가 부족했다.''' 일본은 '신주불멸'[* 신이 계신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다(망하지 않는다)' 라는 뜻인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결과는 다들 아는대로...]]] 운운하며 본토의 대공화기 개발과 배치를 등한시한 탓에 B-29가 들이닥치던 시점에서 B-29에 대해 유효한 대공화기는 소수의 독일제 대공포의 복제품들뿐이었다. B-29의 작전고도인 9,000~10,000m에 크게 못미치는 사거리였으니 고고도 작전시 위협도 안되고, 대공포탄에 근접신관이 없어 저고도에서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계속된 공습에 차츰 소모되어갔고, 전쟁 말기의 미군 조종사들은 일본군의 대공포를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고 [[일본 본토 공습]] 과정에서 54기가량이 대공포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한다. * '''[[조종사|파일럿]]이 부족했다.''' 전쟁 후반 일본은 [[일본 본토 공습|안 그래도 요격기 성능이 형편없기까지 했던데다, 아군의 대공방어도 글러먹은 상태에, 그놈의 카미카제에 쓰느라 숙련된 조종사도, 신참 조종사도 한참 모자랐다.]] 거기다 상대방은 그 반대여서, 허구한 날 폭탄 맞고 포격당하고 자살공격하다가 털리는 상태였다. * '''이를 알면서도 고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신이 지켜주는 나라니 운운하면서 본토 방어를 등한시한데는 그동안 일본이 태평양에 외따로 떨어진 섬나라라 반드시 육군과 해군이 동시에 들어와 상륙작전을 하지 않는한 일본 본토에 올라가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군이 막지 못하면 상륙만 저지해도 일본 본토 방어가 가능했고, 그나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한반도외에는 일본 본토를 쉽게 드나들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지난 수천년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타국에 공격받아 본토가 불탄다는 사태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원나라의 일본원정때도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규슈지역 일부에서만 전진했을뿐 혼슈에는 근처도 못왔다. 그때문에 메이지 유신이후 본토 바깥에서 전쟁에 개입하거나 전쟁을 일으켜서 몇번이나 경제위기를 타개하다보니 일본인들은 내전이 아닌이상 전쟁을 돈벌이정도로 쉽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고, 설사 국력 차이가 한참 나는 미국에 선빵을 날려도 절대국방권이 있는한 이렇게 멀리 있는 본토가 맞을 일은 없으니 준비를 잘 해서 잘 막고 한번만 잘 싸우면 우리가 이기거나 미국이 먼저 협상할거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팽배했었다. 진주만공습 이후 불과 4개월만에 받은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그 자체로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믿고 있던 대전제가 깨졌음에도 B-29가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면서 몇달간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졌고 그때문에 또다시 방어할 생각은 안하고 결전준비,가미카제등에만 몰두하며 상술한 허접한 본토의 대공능력 강화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결국 뜨거운 불맛을 제대로 보고 말았다. 도쿄가 불바다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그들을 지켜주는 신 따위는 압도적인 돈과 기술으로 제압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고 수많은 도시가 폭격으로 갈려나갔다. 몇달의 시행착오끝에 정답을 찾은 르메이와 육군 항공대는 당연히 성공방식을 일본 전역에 동원해 골고루 폭탄을 퍼부었다. 한편, B-29들은 본토 폭격외에도 주요 도시들에 대한 공습의 와중에 일본 근해에 대해 [[기뢰]] 부설 작전도 실시했는데 [[일본 본토 공습#s-7.2|작전명이 Starvation(기아)]]이었다. 당시 일본의 물자 이동량 중 큰 비중을 가졌던 해상 수송을 사실상 마비시켜 전쟁 말기의 일본을 말 그대로 굶겨죽였다. 일벌레인 르메이와 30억짜리 무기를 놀려두기 싫은 높으신 분들, 특히 가미카제때문에 골치아프던 니미츠는 전략폭격외에도 가미카제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규슈 비행장 전술폭격도 퍼부어 일본 항공기가 제대로 뜰 여력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작전으로 B-29는 그 불멸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된다. || [[파일:b29_65.jpg|width=100%]] || || B-29 "Enola Gay" 일련번호 44-86292[br]티니안 North Field 주둔[br]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 투하 || || [[파일:b29_64.jpg|width=100%]] || || B-29 "Bockscar" 일련번호 44-27297[br]티니안 North Field 주둔[br]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 투하 ||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B-29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태평양함대 사령관 [[미 해군]][[원수(계급)|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태평양방면 지상군 총사령관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같은 지역사령관이 아닌 총사령부격인 합동참모본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작전권은 육군 항공대 대장 [[헨리 아놀드]]가 주도했다. 그래서 기뢰부설작전 시행시에도 니미츠는 B-29를 운용하던 20폭격사령부에 직접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합참에 동원을 요청해야 했다. 전략무기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B-29의 특성을 반영한 편제였는데, 이는 종전 후 미 육군 항공대가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미합중국 공군]]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