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8운동 (문단 편집) === 사상적 배경 === 사상적으로는 일부 학생들이 당시 서유럽에서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 흐름을 주도하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의 변증법적인 시각에 따르면 사회는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인해 사회가 항상 진보하지만은 않는다는 비판 이론의 시각이 확대되었다. 68운동 역시 당시 사회가 보수에 정체되었다고 여겨, 구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시각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68운동이 점차 변질되면서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다른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가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처음에는 68운동을 지지했으나 과격한 68운동의 움직임을 보자 반대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차세대 철학자였던 [[위르겐 하버마스]] 또한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는 [[마조히즘]]이며, 학생운동은 [[좌파 파시즘]]에 불과하다'[[https://de.wikipedia.org/wiki/Linksfaschismus#Jürgen_Habermas_(1967)|#]]고 말했다가 운동권의 십자포화를 받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교직을 옮겼다. 한편 [[마르쿠제]]의 경우 68의 과격함을 아도르노와 같이 반대하기는 했지만 신좌파적 활동을 68 이후에도 전개한 바 있으며, 마르쿠제는 [[신좌파]] 이데올로기의 아버지격인 인물이 된다. 따라서 68운동은 점차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보다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또는 '''반[[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적 [[프리드리히 니체|니체]]주의'''를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구조주의]]는 [[장폴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유행을 밀어내고 1960년대에 점차 주류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런 구조주의의 유행은 [[루이 알튀세르]]의 저작인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년), [[미셸 푸코]]의 저작인 <말과 사물>(1966년)의 출간으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알튀세르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분해하고, 기존의 헤겔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독해를 비판하며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내놓았으며, 이는 "구습"으로 여겨지던 기성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는 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알튀세르의 이론은 68운동 당시 시위대의 주류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기성 좌파 이론들을 비판하고 [[구조주의]]적인 신좌파를 옹호한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등 다른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저작들도 68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인 푸코, 알튀세르, 라캉 등은 68혁명 당시 미묘한 입장을 취했다. 구조는 거리에 나오지 않는다는 구호와 대조적으로 구조는 거리에 나왔다고 한 라캉의 일화가 있다.] 68운동에 참여한 젊은 철학자들, 즉 [[자크 랑시에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는 헤겔-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기성 좌파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새로운 좌파의 길을 찾으려 하였으며, 따라서 68운동을 통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크게 타격을 입은 반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1세대는 68운동으로 몰락하고 이후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2세대로 세대 교체가 진행되었다.]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으로 이어져 전성기를 맞이한다. 구조주의의 유행과는 정 반대편에 속했던 인물이지만,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유행을 타고 68혁명 시위의 또다른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을 통한 의미 창출"을 긍정했으므로 당연히 68운동에도 긍정적이었다. 사실 네임드 철학자 중에서는 이 양반이 제일 우호적이었다. 한편, [[마오이즘]]과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큰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마오쩌둥]], [[호치민]], [[체 게바라]] 등의 공산 혁명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붙인 피켓을 앞세웠고, 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특히 가장 인기 있었던 혁명가는 당시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의 주인공인 마오와 호치민이었다. [[소르본 대학교]]/[[파리 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의 건물에는 [[공산권]] 국가의 관공서처럼 마오와 호치민, 체 게바라 등의 초상화가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화와 함께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으로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실체를 알고서 [[마오주의]]를 추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시 유럽에 알려진 [[문화대혁명]]은 중국이 철저하게 미화, 왜곡한 이미지 정도로만 알려졌고[* 당시 문혁은 [[유교]] [[봉건주의]]의 구습을 타파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운동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모순론" 등 일부 저서가 소개되기만 했을 뿐, [[대약진 운동]] 같은 마오 주석의 삽질들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거기다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까지 붙여져 대학생들이 문혁을 비판적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1956년 [[중소결렬]]의 영향 때문에 마오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스탈린주의]], [[소련]]식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며 마오주의가 유독 유행을 탄 면이 크다. 따라서 1970년대 들어 68세대에 속한 이들은 점차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등 유행하던 사상을 버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68세대에 속한 철학자 중 현재까지 마오주의를 고수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례로 프랑스 대학생들의 사상적 지주였던 [[루이 알튀세르]]는 레닌주의와 문혁을 옹호했지만 1980년대의 후기 저작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뒤엎고 문혁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나마 [[파리 제8대학교]]의 [[알랭 바디우]]가 현재까지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지만 이 역시 애매하다.] 아무튼 이때 68운동 학생들이 마오주의를 지지했던 것은 현재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 [[좌익공산주의]], [[마오주의]] 등 당시 유행하던 극좌파 사상을 추구하는 일부는 [[극과 극은 통한다]] 식으로 [[네오콘]]으로 전향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