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8운동 (문단 편집) == 후폭풍과 결과 == [[비틀즈]]의 [[존 레논]]은 이 때 영국, 미국의 반전 운동, 폴란드의 시위, [[문화대혁명]]과 이 운동을 보고 느낀 점으로 폭력 혁명에 대해 유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Revolution(비틀즈)|Revolution]]'이라는 곡을 썼다. [[The Beatles]] 앨범에는 'Revolution 1'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는데, 폭력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가사 한 구절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후 오히려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Revolution을 개사해서 부르고 [[Power to the People]]([[인민]]에게 권력을)[* '사람들에게 힘을'이라는 식으로 순화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존 레논의 성향과 가사의 전반적 내용으로 보면 위와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욱 알맞다.]과 같이 이전보다 급진적인 내용의 곡들을 발표한다.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는 1968년 당시 런던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거센 시위군중의 함성에 감명을 받아 [[Street Fighting Man]]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 [[https://youtu.be/64nCCjonKW0|#]]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친소]] 공산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동구권]]의 보수파인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좌파'의 또 다른 갈래로 보기도 한다. 물론 1968년 이전에 체코 뿐만 아니라 [[1956년 헝가리 혁명|헝가리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으나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에겐 성가신 일일 뿐이었다. 헝가리 반공시위 역시 진압을 명령한 사람은 다름아닌 흐루쇼프다.[* 참고로 헝가리 반공시위가 일어난 건 1956년의 일로, 스탈린이 죽은 지 3년 뒤의 일이다.] 물론 흐루쇼프도 처음엔 용인하려 하긴 했는데[* 동 시기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집권을 용인한 걸 보면 아예 헝가리에 군대를 보낼 가능성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고무우카도 나중에 [[루이필리프]]처럼 기대에 못미치는 정치를 펼치고 이게 경기침체하고 겹쳐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져서 인민들에 의해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WTO([[바르샤바 조약기구]])탈퇴 구호가 나오자 바로 탄압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또한 체코 말고도 다른 공산권에서도 이러한 반소, 반독재 운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폴란드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처럼 국가적 개혁 분위기를 탄 것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학생 운동의 규모였다. 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해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학생들의 요구안을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소련의 탱크에 처절하게 짓밟혔고 이후 둡체크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현상 유지(status quo)를 주장한 정상화(Normalization)가 1987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뒤 80년대 초반 [[폴란드]]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운동이나 [[헝가리]]의 온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그리고 소련 말기 체코의 [[벨벳 혁명]]의 시점이 됐다는 평이 있다. 그 밖에 [[멕시코]][* 그런데 멕시코에서는 1968년 10월 2일에 틀랄텔롤코 참사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키스탄]], 심지어는 강철의 공산주의 제국 [[소련]]에서도 1월에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만 하다. 결국 68혁명은 [[베트남 전쟁]]과 [[틱꽝득]]의 [[소신공양]]으로 시작해 [[프라하의 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정점을 맞았지만 미국에서 진보파의 지도자이던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프랑스 총선에서 드골파의 초압승[* 485석중 394석을 우파(득표율 58.1%)가 차지했고 좌파는 단 91석(득표율 41.9%)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탈리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 주도의 연립정권 승리, [[소련군]]의 프라하 무력점령, 그해 말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당선, 그해 [[크리스마스]]에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사건인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과 함께 끝났다. [[타임(주간지)|타임]]지의 1968년 [[올해의 인물]]로 68년의 여러 혁명가들이 아닌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이 선정된 것이 가장 상징적이다. 즉 보수파는 1968년 운동 자체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었던 것.]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혁명은 끝나고 68년은 전세계 보수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미국은 68년 이후에도 학생운동 연합체 SDS(민주사회 학생연합)과 그 후신 [[웨더맨]]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69년에 정점을 찍었다가 70년 이후 운동권 세력의 과격화로 급격히 쇠퇴한다. 좌파 사상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2011년]]의 [[뉴욕]] [[월가 점령 시위]]에서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 여러분은 수십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현재의 프랑스 유권자들 중 70%는 68혁명이 프랑스의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http://v.media.daum.net/v/20180503043005854|기사]] 70%의 유권자라면 이들이 전부 좌파라고 보긴 어렵다.[[http://www.liberation.fr/france/2018/05/01/l-opinion-se-rejouit-sans-clivage_1647087|기사]] 이는 좌우를 떠나 68혁명의 영향으로 전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체제나 사회분위기가 완화하거나 해체되고 문화적으로 수직적인 면모에서 점차 수평적으로 바뀌며 [[소수자]]에 대한 인권, [[동성애]]나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적 지향]], [[환경주의|환경보호]]와 다양한 의견 존중, 개인의 자아 실현 등이 서구 사회에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잡은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는 역사적 판단을 바탕으로 얻어진 여론조사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영화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일본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영국 영화]], [[미국 영화]]부터 제3세계 영화의 새로운 조류 역시 이 운동을 기점으로 삼을 정도. 세계 역대 올림픽 개막식의 선수들 입장을 보면 이 68혁명을 기점으로 딱딱하고 군사 퍼레이드 같던 개막식이 좀 더 자유분방해지는 걸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