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7폭동 (문서 편집) [목차] == 개요 == 67폭동은 [[1967년]] [[3월]]부터 [[10월]]까지 [[영국령 홍콩]]에서 일어난 [[반영]] 폭동으로, 반영폭동, 6.7 폭동이라고도 불린다. == 배경 == 당시 [[영국령 홍콩]]은 겉으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경제적 번영을 이룬 [[선진국]]이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이 빈부격차는 일본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버블시절 이전만해도 일본도 상류, 중산, 하류층 간의 갭이 매우 컸다.], [[영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홍콩 섬]]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중국 대륙]]에서 피난 온 중국계 [[홍콩인]]이 주로 거주하던 [[구룡반도]] 간의 왕래도 불편했으며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스타페리]]뿐이었다.[* 당시에는 크로스하버 터널과 [[MTR]]도 없었다. 크로스하버 터널은 [[1976년]]에야 개통하고, MTR은 [[1980년]]에야 [[쿤통선]]([[1982년]] [[췬완선]]으로 이관됐다.) 해저터널 구간이 개통했다.] [[부정부패]] 역시 심해, '차값'이라는 [[은어]]로 [[뇌물]]이 성행하며 [[소방서]]에 뇌물을 줘야 화재 진압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와중에 [[1966년]] 스타페리 요금이 인상됐고,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구룡반도 주민들은 비폭력 시위를 벌였고, 홍콩 총독부는 이를 탄압했다. 이에 일부 홍콩인들과 시위대는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1960년대]] 중국 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자극받은 [[홍콩 공회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문화대혁명에 매료된 청년들과 빅토리아항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에 67 구룡폭동이 발생했다. 홍콩 총독부가 시위를 탄압하자 시위는 곧 폭동으로 격화됐고,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일대에서 폭동이 벌어졌으며 [[홍콩 버스]]도 폭리를 취하다 걸려 [[구룡반도]]의 [[버스회사]] KMB도 공격당했다. == 진행 == [[파일:archive_scmp_22may67_riot95-3itd3_3157889.jpg]] 한편 몇몇 홍콩인들은 이 같은 사회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에서 찾으려 했고,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문혁의 실상이 알려지기 전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본토에서 밀려든 피난민들에 의해 문혁의 실상이 알려지게 된다.]에서 찾으려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이용하여 [[홍콩 공회연합회]]를 중심으로 문혁에 호응하던 젊은 층과 빅토리아항[* 당시에는 빅토리아항이 홍콩의 대표 [[항구]]였다. [[1991년]] [[콰이청구]]에 신항이 생기며 점차 위상을 잃어가다 [[2009년]] 화물선 입항이 금지되고 현재는 일부 여객 기능만 남아있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 폭동이 발생한다. [[파일:lZRN7l.jpg]] [[파일:h5NQzl.jpg]] 영국령 홍콩 [[총독부]]는 이 때 [[긴급조치]]법을 만들었고, 홍콩 당국은 이 폭동을 긴급조치법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이에 자극받은 중국 본토의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홍콩의 [[친중화민국]] 세력들과 [[중국국민당]] 홍콩-[[마카오]] 지부도 영국 편에 서서 폭동 세력에 맞서 양안 간의 대리전이 되기도 했다. 비록 대만의 중화민국도 명목상 홍콩을 자국 영토로 여기지만 의외로 [[영국-대만 관계|영국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으며 홍콩이 중공에게 넘어가느니 차라리 영국이 지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영국 편을 들어준 것이다. == 결과 == 이 같은 사건사고는 영국령 홍콩 당국이 더 이상 사회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71년]] 홍콩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25대 [[총독]] 크리포드 [[머레이 맥클레호스]][* 1982년까지 재임했다.]가 부임하고, [[1973년]] 피터 고드버라는 영국계 [[홍콩 경찰]]이 430만 [[홍콩 달러]]를 전횡하고 출국금지도 어긴 채 영국 본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염정공서]]가 창설되었다. 한편 경찰훈련학교, 소방훈련학교가 설립되고 전문적인 폭동진압 기동경찰 PTU대, SDU 대테러 경찰특공대가 설립되고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 젊은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등 홍콩 경찰과 [[홍콩 소방처]]의 문제점이 해소된 것도 이 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이, [[1979년]] [[MTR 쿤통선]][* 지금과는 달리 [[쿤통역]] ~ [[섹깁메이역]] ~ [[몽콕역]](당시 명칭 아가일역) ~ [[침사추이역]] ~ [[센트럴역(홍콩)|센트럴역]](당시 명칭 차터역)을 잇는 노선이었다.]이 개통하며 홍콩 섬과 구룡반도간 [[교통]]이 개선되고, 영국 본토에서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1980년대]] 이후 홍콩은 지금과 같은 선진도시로 자리잡게 된다. 다만 [[1985년]] [[중영공동선언]] 발표 후 [[1997년]] [[홍콩 반환]] 후 중국 본토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다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비리가 벌어지고 있다. 그 후 이 사건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을 가진 [[2014년]] 홍콩 [[우산혁명]]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사건이 재조명 받고 있다. == 더보기 ==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홍콩의 전성기 시작점. * [[문화 대혁명]] * [[천안문 6.4 항쟁|1989년 천안문 사태]] * [[홍콩 민주화 운동]] [[분류:문화대혁명]][[분류:1967년 시위]][[분류:1967년/사건사고]][[분류:홍콩의 역사]][[분류:폭동]][[분류:파업]][[분류:홍콩 특별행정구의 사건사고]][[분류:홍콩의 정치적 억압]][[분류:중영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