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대가족 (문단 편집) === 진가(陳家) === 그러나 4대 가문 중에서도 진씨(陳氏) 가문은 유일하게 송씨 일가와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지 않았다. 진씨 가문은 절강성 오흥현(吳興縣)의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원래는 지방의 향신 혹은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태평천국 운동으로 가세가 몰락하고 진기미의 아버지도 1890년에 사망하면서 빈농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후 진기미는 학업을 그만두고 12년 동안 전당포를 운영하면서 그의 형 진기업(陳其業)과 동생 진기채(陳其采)의 학업 자금을 제공했다. 이에 힘입은 진기채가 국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호남과 절강에서 신군의 창설을 이끌게 되자, 동생의 입신에 자극받은 진기미도 전당포를 그만두고 상해로 떠나 회계사로 일하면서 각 방면으로 사회적인 인맥을 만들어나갔다. 이후 3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경감학교(東京警監學校)에 입학한 진기미는 동시에 손문이 일본에서 조직한 혁명조직 동맹회(同盟會)에 들어갔다. 그는 진기채에게 보은하고자 하던 상해 청방(靑幇)의 우두머리 범고두(范高頭)에 힘입어 상해 암흑가의 두목들을 휘하로 끌어들였고, 자신과 같은 절강성 사람인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은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마침내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진기미는 이를 기반으로 상해 혁명군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경쟁자인 도성장(陶成章)의 암살을 사주하고 도준보(陶駿保)를 총살시키며 는 등 암약하다가 정작 그 자신도 1916년에 황제가 되고자 꾀하는 원세개의 마지막 발악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진기미는 허무하게 암살되었지만 그 형제 진기업과 진기채는 계속 혁명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지만 국가에 등용되지 못한 진기업은 가업을 이어받아 비단 장사를 경영하는 한편 지방의 공익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서구의 면포 덤핑에 맞서 그 기술을 받아들여 비단 직조 기술을 개선하고, 자본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고리대로 농민들을 착취하지 않았으며, 현지의 수해를 줄이기 위한 수리사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이는 지방의 향신이 근대적 실업가로 전환한 모습이었다. 반면 진기채는 북경정부에서 이탈해 진기미와 함께 원세개의 독재에 저항하다가 군부에서 퇴출되고 근대적 실업가로 전환해 중국은행과 대풍공사(大豊公司)에서 근무하고, 이후 장개석의 북벌 과정에서 절강성의 재정과 행정을 도맡아 1931년에는 국민정부의 주계청장(主計廳長)까지 올랐다. 하지만 진씨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단연 진기업의 아들인 진조도(陳祖燾)와 진조연(陳祖燕) 형제다. 그들의 자인 [[천궈푸|진과부]](陳果夫)와 [[천리푸|진입부]](陳立夫)로 더욱 잘 알려진 이들은 장개석의 친위대로 악명을 떨쳤던 것이다. 신해혁명에서 무한봉기에 직접 참가했던 진과부는 이후 진기미를 따라 원세개에게 반기를 들면서 상해의 암흑가나 장개석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진기미가 암살당하자 진과부는 상해에서 장개석을 주주로 투기사업을 전개하며 증권무역교역소를 경영했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손문의 광동정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장개석과의 인연은 장개석이 교장이 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게 되면서 더욱 긴밀해졌다. 장개석이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정부를 장악하자 진과부는 국민당의 감찰위원과 조직부장의 자리에 올라서 국민정부 내에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 시기 국민당의 간부직에서 공산당원을 몰아낸다는 정리당무안(整理黨務案)이 바로 장개석의 지시 하에 그가 주도한 정치공작이었다. 더불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입부도 중산함 사건 이전부터 장개석의 비서로 있다가 북벌이 완수된 뒤에는 조직부장을 역임하면서 국민당을 장악해 세간에는 “장가천하(蔣家天下) 진가당(陳家黨)”이라는 말이 나돌 지경이었다. 중일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진과부는 강소성 정부의 주석이자 회하 유역의 수리시설을 관장했고, 진입부는 토지위원회의 주임위원이 되었는데 두 자리에 모두 막대한 이권이 게재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부터 차차 장제스의 장징궈 세습 시도에 반하여 미움을 사게 된 이들은 [[국부천대]] 이후로 [[천청]]에게 밀려 완전히 실각했다. 건강이 좋지 않던 천궈푸는 정치에서 물러났다 곧 죽었고 천리푸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CC계는 곡정강 등 장제스에게 충성하던 일부 세력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국민당 독재를 옹호하는 나팔수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