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대가족 (문단 편집) === 공가(孔家) === 이러한 송씨 가문을 통해 장개석과 동서지간으로 맺어진 공씨 가문은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후손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집안이었다. 그 지파인 61대손 공굉문(孔宏問)이 현령이 되어서 임지인 산서(山西)에 정착했고, 다시 그 후손인 74대손 공번자(孔繁慈)는 청나라 말에 공생(貢生)이 되어 북경에서 선생과 서기로 일하다가 아편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의화단 운동을 피해서 산서성 태곡현(太谷縣)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고향에서 그는 아내 남씨(南氏)에게서 아들 공상희(孔祥熙)와 딸 공상정(孔祥貞)을 보았는데, 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올라가 신문물을 목도하고 공리회(公理會)가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이윽고 의화단이 진압되자 공리회를 도와 뒤처리를 맡았던 공상희는 공리회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해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공상희는 190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명현학교(銘賢學校)를 세워 그 교장을 맡았으며, 이윽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태곡현의 상단과 학생들을 조직하여 민단(民團)을 만들고 산서성 중부의 민군 총사령이 되었다. 이로부터 공상희는 교육과 동시에 상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영국의 아시아각패화유공사(亞細亞殼牌火油公司)로부터 산서성의 등유 전매권을 따내어 돈을 벌었다. 다시 1913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공상희는 재일화교 기독교 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일본으로 망명해 온 손문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가 손문의 비서로 있던 송애령과 혼인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점의 일이었다. 1915년에 산서성으로 돌아온 공상희와 송애령은 산서의 군벌이던 염석산(閻錫山)의 막하로 들어가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후 1919년에는 5.4 운동과 함께 산서에 기근이 들자 이재민을 사업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산서성 서부의 기민들을 구휼하여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 손문 사후 광동정부에서 재정청장을 맡게 된 그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에서도 실업부장(實業部長), 재정부장, 행정원장을 역임하고 장개석이 잠시 사퇴한 동안에는 그를 대리하여 주석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다시 그 이듬해인 1932년부터는 1년 동안 미국과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 등을 순방하고 돌아와 중앙은행 총재로 금융을 거머쥐었고, 위에서 말한 송자문의 뒤를 이어서 11년 동안 재정부장의 자리에 있었다. 바로 이 기간에 그는 송자문이 추진하던 국화운동(國貨運動)을 이어받아 1935년 11월에 화폐긴급령(貨幣緊急令)을 발효하여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달러 외환보유고에 기반한 법폐(法幣)를 유통시키기는 [[법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남경정부 시절에 공씨 가문 내에서 공상희 이외에 딱히 눈에 띄는 인물이 보이지는 않는다. 공상희의 장남 공영간(孔令侃)이 양자회사(楊子會社)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재정부 특무비서로 임명되었고, 차녀 공영위(孔令偉)는 가릉회사(嘉陵會社)의 운영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가졌지만 모두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자본주의 속 귀공자와 귀공녀의 모습이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 기득권의 중심축은 '송가황조(宋家皇朝)'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