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대가족 (문단 편집) === 장가(蔣家) === [[장제스]]의 가문인 장씨는 본래 절강성 봉화현(奉化縣) 계구(溪口)의 소금 상인이었다. 장제스의 할아버지 장사천(蔣斯千)이 농사 대신 상업에 뛰어들어 옥태염포(玉泰鹽鋪)를 열고 소금, 쌀, 석탄 등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집안이 부유해졌고, 중간에 [[태평천국의 난]]으로 잠시 사업을 접기도 했지만 이내 난리가 수그러들자 그 아들 장조총(蔣肇聰)이 사업을 이어받아 세를 더욱 키웠다. 이 장조총은 전처 서씨(徐氏)에게서 아들 장서생(蔣瑞生)과 딸 장서춘(蔣瑞春)을 보았고, 서씨가 죽자 다시 과부로 있던 왕채옥(王采玉)을 맞아들여서 아들 장서원(蔣瑞元), 딸 장서련(蔣瑞蓮)과 장서국(蔣瑞菊), 그리고 막내아들 장서청(蔣瑞靑)을 보았다. 이 가운데 장남 장서생은 뒤에 제칭(介卿 개경)이라는 자를 받았고, 차남 장서원은 개석(介石)이라는 자를 받고 다시 중정(中正)이라 개명하는데 바로 우리가 아는 [[장제스]]다. ||<-7> 장사천 || || 장조해 ||<-6> 장조총 || || ||<-2> 전처 서씨 소생 ||<-4> 후처 왕씨 소생 || || || 장서생[br]장개경 || 장서춘 || 장서원[br][[장제스|장개석]] || 장서련 || 장서국 || 장서청 || 하지만 장제스가 고작 8살 되던 1894년에 장사천이, 다시 이듬해에는 장조총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이들 남매는 곧 갈라졌다. 이미 장성한 전처 소생의 장제칭은 큰아버지 장조해(蔣肇海)의 양자로 입적되어 옥태염포를 경영하기 시작했고, 후처 소생의 장제스 등은 풍호방(豊鎬房) 저택에서 살았다. 여기에 이윽고 막내 장서청이 요절하면서 강인한 성품의 왕씨는 장제스를 교육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장제스는 17세부터 봉록학당(鳳麓學堂)에서 신식 교육을 받다가 20세에는 하북의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로 진학했고, 다시 이듬해에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진무학교(振武學校)에서 5년 동안 유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본 유학 기간에 장제스는 일본에서 [[쑨원]]이 세운 혁명조직인 동맹회에 들어가 그 간부이자 상해 암흑가의 거물인 천치메이(陳其美)와 의형제를 맺었고, 1910년에 천치메이와 함께 귀국해 [[신해혁명]]에 참여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자신의 이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의 친족이라고는 어머니 왕채옥과 이복형 장제칭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장제칭은 일찍이 영파(寧波)에서 법학교육을 받고 법관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슬하에 아들 장궈빙(蔣國柄)과 딸 장화쇼(蔣華秀)를 두고 있었고, 장제스도 이미 15세 되던 해에 같은 근처 동네의 마오푸메이(毛福美)와 결혼해 1910년에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낳았고 또 1916년에는 친구 대계도(戴季陶)의 아들이라는 비화가 있는 일본 기녀 소생의 장웨이궈(蔣緯國)를 양자로 들였다. 이후 1921년에 장제스는 마오푸메이와 이혼한 뒤 쑨원이 있는 광주로 건너가고 이를 따라 장제칭도 광동정부로 가서 지방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장제스가 우여곡절 끝에 천중밍(陳炯明)의 쿠데타에서 손문을 구해내고 광동정부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되자, 평소 집안에서 장제스와 응어리가 있던 장제칭은 고향으로 돌아가 전장(錢莊)을 경영했다. 전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고 그냥 규모 좀 있는 대금업, [[전당포]] 수준이었다. 장제칭의 아들 장궈빙도 이렇다 할 권력이 없이 지방 경찰서장에 머물게 된 것은 덤.(...) 한편 장제스에게 이혼당한 마오푸메이는 계속 봉화현의 본가에 남아서 장징궈와 장웨이궈를 키우고 있었다.[* 이혼당하긴 했지만 장제스의 고향의 풍습에 따라서 본가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장제스가 꼼수를 하나 썼는데 전처를 족보상으로 자신의 모친인 왕씨의 수양딸로 입적, 다시 말해서 '''전처를 자신의 누나(전처가 나이가 5살이나 많았다.)'''로 만들어 버린 셈. --어째 서쪽 [[잉글랜드|영길리국]]의 [[헨리 8세]]와 [[클레페의 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장징궈는 1925년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공산주의, 특히 그 중에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추종하게 되어 중국공산당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장제스에게 반대해서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기까지 12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경제학을 공부하던 장웨이궈는 1937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독일군에 복무하다가 1939년에 중일전쟁이 개시되자 비로소 돌아왔다. 그리고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내에서 완전히 집권한 뒤 다시 쑹메이링과 결혼했음에도 ~~고자~~ 더 이상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장씨 가문 내에서 이렇다 할 사람은 장제스밖에 없는 셈.[* 물론 천치메이가 죽고난 뒤 상해에서 장제스가 워낙 문란한 생활을 한 탓도 있을 것이지만, 송미령 평전에 따르면 쑹메이링이 미리 불임수술을 받았었다고 한다.] 장제스는 중앙은행(中央銀行)과 자원위원회(資源委員會)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후 귀국한 장징궈가 신감남국민경제건설공사(新贛南國民經濟建設公司)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아래의 다른 가문들과 비교해보면 이 정도로 4대 가문에 끼는 것은 부족한 감이.(...) [[장웨이궈]]는 장징궈보다도 더 젊은데다 장징궈의 견제를 받아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장제스의 양자라는 후광을 제외하면 별다른 실권도 없었다. ~~그래도 장제스가 있잖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