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3-F (문단 편집) == 쿠데타의 발발 == [[파일:tejerobarriopedroblog.jpg]] [youtube(wHMfbro_-Rc)][* 중간에 총소리가 들리니 주의.] [[징역]] 11개월을 살고 풀려나와 다시 '''[[헌병군]] 중령으로 복귀'''한[* 반란모의는 여러 국가에서 [[중범죄]]로 규정하며 [[사형]] 및 그에 준하는 높은 형량을 선고하지만 테헤로는 [[솜방망이 #s-2|11개월만 살고 풀려나]] 중령으로 복귀했는데 재판 당시(1980년) 스페인 군부와 사법부에 테헤로에 공감하는 골수 프랑코주의자(Franquista, 프랑키스타)들이 많아 민주정의 기반이 취약하여 테헤로와 같은 자들에게 중형을 때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판결을 내린 건 명백한 스페인 사법부의 수치지만.] 안토니오 테헤로는 [[1981년]] [[2월 23일]] 200명의 치안 경비대를 이끌고 [[스페인 하원]] 의사당에 난입해 350여 명의 하원의원과 정당 대표, 수아레스 수상과 다수의 내각 각료들을 인질로 잡았다. 마침 이날은 수아레스 수상이 사의를 표명하고 [[레오폴도 칼보소텔로]] 부수상을 신임 수상으로 선출, 지명하려는 날[* 정확히는 과반 찬성을 가결 조건으로 했던 2월 21일 1차 투표가 과반 미달로 부결된 후 2차 투표가 예정된 날이었다.]이었기 때문에 의사당에는 거의 모든 하원의원들이 모여 있었고 신임 수상의 선출과정을 생중계하기 위해서 방송국과 신문 기자들도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테헤로 중령은 의사당에 난입한 뒤 하원의원들에게 모두 엎드리라 고함을 지르고 쿠데타에 가담한 쿠데타군 병사들이 [[자동소총]]과 [[기관단총]]을 난사하자 거의 모든 하원의원들은 의석 탁자 밑으로 엎드렸다. 야당 [[스페인 사회노동당|사회노동당]]의 [[펠리페 곤살레스]][* 1년 후인 [[1982년]] 총선에 승리하여 수상으로 취임해 [[1996년]]까지 집권했다.] [[서기장]]은 동료의원에 밀려 넘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돌포 수아레스]] 수상과 [[스페인 공산당]]의 산티아고 카리요(Santiago Carrillo) 서기장은 '''"내가 왜 니들 말을 들어야 하냐?"'''면서 엎드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거기에 당시 팔랑헤당, 군부 출신으로 프랑코와도 함께 활동했던 수아레스 내각의 부수상이었던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Manuel Gutiérrez Mellado)도 같이 있었다. 사실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는 반체제 인사로 숱한 고생을 겪어 쿠데타에도 눈 깜짝 안 하고 패기롭게 있을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 시기부터 최전선에서 싸우며 망명 시기에는 공산당 당수로서 숱한 암살,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가 강산이 3번하고도 반 바뀐 뒤에야 모국에 돌아왔던 카리요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살아 보지도 못했던 시대로 역행하려고 드는 철부지들이 고까웠을 것이다. 일단 테헤로 중령에 비해 20년 가까운 연장자여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광기의 시대를 겪었고 그 자신이 내전 도중인 [[1936년]] 12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가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수감되어 있었던 프랑코파 정치범과 우익계 민간인들을 들판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처형한 파라쿠에요스 감옥 학살(Matanzas de Paracuellos) 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당시 역사적 기록과 교차 증언을 참고하면 카리요가 지휘했던 사건이란 게 거의 확실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단위 이상의 규모라고.] 정치인으로서든 사형 집행인으로서든 테헤로에게 겁 먹을 이유는 없었다. 반면 테헤로 중령은 [[1932년]]생으로[* 같은 시기 태어난 한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갑이다.] 20살이 되었을 [[1952년]]을 기점으로 해도 프랑코 정권의 빈곤은 겪어 보았어도 공포정치와 피비린내나는 자국민 대학살 숙청이 정점을 이루었던 [[1940년대]]에는 열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한편 수아레스 수상은 프랑코 정권 시절 [[rtve|RTVE]](스페인 국영 방송사) 사장을 맡는 등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우익 인사였지만 성품이나 정치적 성향에서는 온건한 인물로 민주화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사람이었고 그만큼의 배짱은 있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좌우익 대립이 험악한 스페인 정치판에서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존중하는 초당적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수아레스 수상은 아버지, 삼촌부터 내전 이후 콩밥 먹었던 아빌라의 공화파 가정 출신으로서 프랑코 정권이 살아 있을 때는 프랑코주의자들에게 순종했지만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공공연히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덕분에 '''프랑코 정권의 인사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진 엘리트'''로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게 낙점되었고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코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재임 시기부터 유난히 당시 좌파로 분류되던 언론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망명 후 돌아온 주로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사석에서는 '''내 본심은 [[사회민주주의]]자요'''라고 종종 말하기까지 했다. 23-F와 수아레스 수상에 대한 서적 중 베스트셀러인 한 순간의 해부학(Anatomia del instante, 2009)의 저자 하비에르 세르가스의 평에 따르면 '''어떤 사상이든 한 번도 진실하게 믿어 본 적이 없고, 그렇기에 또 그 시대에 필요했던 위대한 인물'''이라 평했다. 이 쿠데타가 터졌을 당시의 수아레스 내각은 레임덕으로 인해 이미 해산되었고 차기 수상에게 인수인계하던 시절이라 수아레스 수상은 스페인 정치판, 언론 전반에서 까이고 욕 먹고 있었지만 여기서 제대로 된 지도자다운 배짱을 제대로 각인시켜 결국 [[2007년]] 안테나 3 방송국에서 진행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은 누구인가'''란 설문 조사에서 '''5위'''를 먹는 기염을 토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1위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고 2위에서 4위까지 각각 [[미겔 데 세르반테스]], --따지고 보면 스페인 사람도 아닌--[[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소피아 왕비]]가 차지했다. 1위에서 5위 중에 3명이 결국 프랑코 정권 말기와 민주화 과정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스페인 사회의 역사 인식에서 내전, 프랑코 독재, 민주화의 경험이 가진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또 마누엘 프라가는 사상적으로는 골수 프랑코주의자라 할지언정 어떤 형식으로든 의회민주정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당장 하원의원 직책 가지고 군부에 개입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쿠데타에 대해 '''"이게 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으로서 할 짓이냐, 프랑코 각하가 살아 계셨어도 이런 무법패악질이 인정받을 리 없다!"'''라는 어조로 항의했다.[* 수아레스 수상과 마누엘 프라가는 모두 스페인의 정치 지형에서 우파로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둘은 이념이 다르다. 마누엘 프라가는 오늘날 스페인 우파 주요 정당인 [[인민당(스페인)|국민당]]을 창당한 사람인데 마누엘 프라가와 인민당(스페인 전 수상인 [[마리아노 라호이]]의 정당)은 사상적으로 프랑코주의자들 중에서 테헤로보단 덜 과격한 인사들이 제대로 된 내부 합의도 없이 어물슬쩍 현대적 보수우익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골수 프랑코주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초당파적 포용력은 아돌포 수아레스 수상과 옛 중도민주연합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수아레스는 [[마리아노 라호이]] 전 수상보다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초당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수상은 '''육군 중장이자[* 스페인군의 계급은 일반적인 서방권이나 소련 같은 나라하고는 달리 사실상 중장이 최선임이었다. 왕정까지는 중장이 사복군인 최선임이었고 스페인 내전 때는 그냥 장군의 계급이 소장, 준장(국민진영, 참고로 프랑코가 소장이었다.)/그냥 장군(공화진영)인 적도 있었다가 내전이 끝나고 중장 계급이 신설되었다. 물론 중장 위에 capitan general로 원수계급도 있긴 한데 이건 그냥 국왕 전용이었다. 국왕이 아닌 사람이 원수가 된 사례는 두 케이스인데 하나는 명예직으로 추서되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다. 참고로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이후 서거 당시 국왕을 빼면 마지막으로 스페인 육군 원수에 추서되었다.] 당시 군부 최선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새까만 후배인 쿠데타 군인들이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 하는 등의 모욕을 당했다. 당시만 해도 [[징병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경직된 군사 문화를 체감하고 살았던 [[스페인인]]들이 저런 광경을 생중계로 보고 충격에 빠진건 덤. 사실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군인 → 내전 참가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나가던 [[팔랑헤]] 원년 멤버였으나[* 팔랑헤는 1934년 세워졌고 이 사람은 1935년에 가입했다.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팔랑헤의 규모는 미미했다.] 스페인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문민 내각에서 부수상에 임명되어 수아레스 내각이 추진한 군부 개혁의 실무를 맡아 군내 사조직의 정치적 기득권화를 막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 군부 핵심 파벌이 배신자로 간주하고 찢어죽이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는 점에서 사실 쿠테다 군인들의 행동이 마냥 충격적인건 아니었다. 물론 구티에레스 메야도 본인이 공개 석상에서 이를 인정한 적은 없지만 말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민주화, 현대화가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인들과 교류하며 생겼던 심정 변화를 토로하곤 했다. 말년에는 젊었을 때 쿠데타에 가담하여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확실히 느꼈으며 이에 기반한 회개 의식에서 수아레스 수상과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까지 상당히 친밀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팔랑헤당 원년 멤버, 프랑코 정권 개국공신, 군부 최선임이라는 막대한 배경을 지닌 거물급 인사였던지라 단신으로 스페인군 내 사조직 전체와 대적할 수 있었고 짬에서든 계급에서든 경력에서든 인망에서든 꿇릴 게 하나도 없던 그는 무장병력을 대동하고 의사당에 난입한 테헤로 중령을 마음껏 갈궈대며 쿠데타를 방해했다. 테헤로 중령은 급기야 헌병들을 시켜 구티에레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등 뒤에서 어깨를 붙잡아 찍어 누르려고 했으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총리는 위축되기는커녕 도리어 헌병들을 뿌리치며 감히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느냐고 일갈하며 필리버스터(.....)를 시전했다. 이윽고 테헤로 중령의 격발을 시작으로 모든 헌병들이 일제히 천장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지만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수상은 도리어 '''두 손을 옆구리에 올리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물론 메야도 본인이 산전수전 다 겪은 군부의 실세였던데다 1912년 4월생으로 당시 만 69세가 되기 직전의 고령이었던 터라 애초부터 쿠데타 군인들의 총질을 전혀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옆에서 이를 계속 말리던 수아레스 수상이 '''"친구로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나를 봐서라도 앉아 달라."'''고 호소한 끝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이 장면들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스페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와 같은 시각에 미란스 델 보슈 육군중장이 이끄는 전차부대가 [[발렌시아(스페인)|발렌시아]]와 [[마드리드]]로 난입해 마드리드에 있는 RTVE(스페인 국영 TV방송국)을 점령했다. 하지만 행동대장 격이었던 테헤로가 무력으로 의회를 점거하고 미란스 델 보슈가 발렌시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른 사단장들을 설득할 동안, 국왕과 문민 정치인들과 협상하는 역할, 즉 쿠데타의 정치적 브레인이자 주동자 중 가장 높은 직책인 육군참모차장에 있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Alfonso Armada Comyn) 장군이 예측했던 바와는 반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든, 제도적인 차원에서든, 표현의 형태로든 스페인 정계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프랑코 정권]] 출신의 민간 정치인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순간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