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0년대 (문단 편집) ==== 대한민국 ==== ||<:> [[파일:external/ca58753c6d7fa11f6d569e37e1ed410191451ae331be1ced4d93561c48c59c12.jpg|width=100%]] || || {{{#white ▲ '''올드보이 촬영장의 송강호'''}}}[*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올드보이(2003)]] 문서 참고.] || 2000년에는 전년도의 <[[쉬리(영화)|쉬리]]>의 성공으로 인한 비약적 발전을 발판삼아 영화계 질과 양 모두 안정기로 돌입했다. 동년도 국산영화 제작편수는 57편, 시장점유율은 32%였다. 비록 시장점유율은 전년도에 비해 떨어졌으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굉장했다. 이 해를 대표하는 작품은 9월 9일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인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단기간인 개봉 보름 만에 서울관객 100만명, 10월 26일 200만명을 각각 넘었고, 2001년 1월 4일에는 244만 8천명을 찍어 <쉬리>의 기록을 깼다. 냉전시대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난 <쉬리>와는 달리 <공동경비구역 JSA>는 대중적 재미와 남북 화해를 동시에 다룸으로써 의미가 더 컸다. 이 영화의 성공에는 영화적 요소 외에 사회적 요인도 컸는데,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서울에선 40개 이상의 개봉관을 지닐 수 있었으며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진 것도 이에 한몫했다. 위와 같은 약진으로 금융자본의 영화투자도 더욱 활발해졌고, 7월 22일에 북한 SF영화 <불가사리>가 분단 55년만에 합법적으로 개봉됐다. 비록 서울관객 283명에 그쳤으나 처음으로 정식 상영한 북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001년 한 해 동안 국산 영화가 시장점유율 46.1%, 1천만 관객, 해외수출고 1천만불을 각각 찍어 전성기에 돌입했다. 상반기부터 <[[친구(영화)|친구]]>가 전국 820만명이란 대기록을 세운 후 <엽기적인 그녀>,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등이 흥행 행진을 벌였다. 다만 흥행을 이어간 몇몇 영화들이 스크린을 독점하는 부작용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고양이를 부탁해> 등 저예산 영화들이 개봉 1주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등 영화계의 '빈익빈 부익부'가 더 부각됐다. 그 증거로 국산 영화를 본 서울 관객 약 1,600만명 중에 53.7%가 상위 5위권 안에 속하는 영화를 본 걸로 나타났다. 동년도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바로 '조폭'인데, <친구>를 비롯해 <파이란>,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 등 흥행 영화 상당수가 조폭을 소재로 했다. 이는 경제침체 및 정치 혼란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면도 있지만, 진부한 기획과 인기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상업주의 등 한국 영화계의 잘못된 현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했다. 반면 해외진출도 활발해 베니스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에 송일곤 감독의 <꽃섬>과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이 각각 초청됐고, 송일곤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다. <나비>의 주인공 김호정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도 영국 리즈 영화제에서 국제신인감독상을 각각 받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쉬리> 외에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돼 흥행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한국 영화의 성공신화는 계속됐는데, 특히 해외 영화제에서 크게 드러났다. 5월 말에 열린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을 만든 임권택 감독이, 9월 초엔 <오아시스>를 만든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각각 받는 등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을 모두 해냈다. 내수 시장점유율도 45.2%를 기록해 여전히 순항했으며, <가문의 영광>을 비롯해 <집으로...>, <광복절 특사> 등이 각각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집으로...>는 개봉 초기에 흥행에서 망할 것이 예상됐으나,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와 따뜻한 시선으로 전국 413명을 동원했다. 같은 시기 관객 1억명 시대가 되면서 극장시장의 경쟁력은 치열해졌고, 21세기 들어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해 개정 영화진흥법 시행에 따라 '제한상영가 제도'가 도입돼 70대 노인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아 논란이 됐다. 결국 이 영화는 3차례에 걸친 심의 끝에 '18세 미만 관람불가' 판정을 받아 개봉됐다. 2003년에는 <실미도>의 첫 천만관객 돌파로 내수 점유율이 전국 51.6%, 서울 49.97%를 각각 기록해 처음으로 전국에서 50%대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2007년까지 내수점유율 50% 이상을 각각 기록했으며 2004년에는 최고 66.8%를 찍기도 했으나, 2008년에는 스크린쿼터 축소의 여파 등으로 40%대로 회귀했다. 2008년 이전까지 한국 영화가 반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보인 1차 요인은 영상세대의 등장 때문인데, 2000년대 내내 천만관객 이상 영화는 <실미도>를 비롯해 <[[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 <괴물(이하 2006)> 등 4편이며 500만명대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이하 2000)>, <가문의 영광(2002)>, <살인의 추억(2003)>, <웰컴 투 동막골,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 2(이하 2005)>, <투사부일체>, <타짜(이하 2006)>, <화려한 휴가>, <디워(이하 2007)>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반면 손익분기점인 20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손에 꼽는다. 두 번째 요인은 토종 영화업계가 치밀하게 구축해 놓은 영화제작/공급 시스템인데, 이는 감독, 배우, 스태프,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의 질을 담보할 만한 풍부한 인적 자원 덕에 시장점유율 확충이 가능했다. 영화제작에서 예술/기술적 외에 산업적 측면에서 뒷받침할 자본의 참여가 있었다. 제작비가 1백억원을 상회하는 영화가 즐비한 상황에서 CJ나 오리온 같은 대기업의 직접참여가 없었으면 대형 영화는 꿈도 못 꾼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배급망을 갖추지 못하면 실패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산업으로 보고 접근한 영화자본은 제작 외에 다양한 콘텐츠의 개발, 참여, 배급망 확충 등에 기여하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인은 스크린쿼터 같은 보호장치 덕인데, 이 제도가 성공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미국의 거대 영화자본들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어막 역할을 해줬다. 당연히 미국 입장에선 1990년대 이래 스크린쿼터 제도 자체를 좋지 않게 여겼다. 본격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게 노무현 정부 출범 뒤부터인데, 2003년 초부터 스크린쿼터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관료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퍼졌다. 미국도 당연히 WTO 서비스분야 양자협상이나 한미 재계회의 등지에서 압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이에 영화인들과 시민사회단체가 7월 '영화인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전면투쟁에 나서자 정부도 11월에 한발짝 양보했다. 문화관광부도 대안책으로 점유율과 연동해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결정하자며 불씨를 살렸으나 이마저도 영화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정부는 2006년 1월 26일부터 한미 FTA를 앞두고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인다고 발표하자, 영화인들이 격렬히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마저도 흐지부지됐다. 정부도 7월부터 스크린쿼터 축소를 시행했다. 굳이 스크린쿼터 축소 때문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0%대로 하락했으며, 여러 측면에서 한국 영화의 위기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 외에도 한국 영화계가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론 국제적 위상 상승이다. 이 시기 동안 한국 영화계는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많은 수상작들을 탄생시켜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고, 외국인들도 한국 영화에 관심을 보여 세계 각국에서 한국 영화들을 활발히 수입하여 한국은 영화 수출국으로 점차 변모해나갔다. 이에 따라 한국 영화계도 흥행 외에 예술적 측면에도 집중하며 온갖 장르의 영화에도 관심을 지니는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등 국제 영화제들의 성공적인 개최도 이에 한몫했다. 2003년에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가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을,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산 세바스타인 영화제 및 토리노 영화제, 도쿄영화제 등을, <바람난 가족>도 스톡홀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문소리) 및 촬영상, 플랑드르 국제영화제 감독상, 베르겐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각각 석권했으며, 전년도 작품 <집으로...>도 블라디보스토크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2004년에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와 <빈 집>으로 베를린영화제 및 베니스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을 받았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아 '3대 영화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심지어 성백엽 감독의 극장애니 <오세암>도 프랑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한국 영화들은 영화 319편이 해외 영화제에 824회나 출품돼 66개가 수상작에 올랐다. 같은 시기 한류 열풍이 불면서 일본에서 배용준, 최지우, 이병헌 등이 스타로 등극했고, 한국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 작품 <밀양>에서 주연으로 열연한 배우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는 1987년 <씨받이>의 주연 강수연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지 20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다만 위와 같은 한국 영화의 성공 뒤에는 그림자가 있는데, 초대형 성공작의 상영관 독점과 저예산 영화 등 다양한 영화들의 개봉기회 박탈, 안정적인 영화 제작/배급 시스템의 문제,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부작용, 유명 스타들의 과도한 개런티와 제작비 상승, 묻지마식 투자와 제작 및 극심한 경쟁에 따른 수익률 저하, 영화 시나리오의 원천 콘텐츠 부족, 극장 수입과 DVD 판매 등에 의존하는 수익구조 등 적지 않은 문제가 산재해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한 영화배우 [[송강호]], [[최민식]] 등은 국민 배우 반열에 오르며 인기를 누렸다. [[임권택]], [[강제규]], [[곽경택]] 등의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이름을 날렸던 감독들에서 [[봉준호]], [[나홍진]], [[박찬욱]] 등 200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감독들도 끊임없이 발굴되는 등 인재풀도 상당했다. 80~90년대 최고 부흥기를 누렸던 홍콩 영화가 빠르게 몰락했던 이유는 [[영웅본색]] 이후의 양산형들로 인해 영화들 자체가 식상해진데다 1997년 [[홍콩 반환]] 때문에 홍콩 영화계 전체가 혼란스러워진 탓인데, 반면 90년대 말까지도 질적으로 암담했던[* 그 당시 국내 영화는 사전검열 등 여러 요인으로 창작의 폭이 좁은 탓에 대중들 사이에서 극장에서 돈주고 보기 아깝다는 정서가 만연 했을정도로 인식이 안 좋았고, [[왕가위]]같은 홍콩 영화 스타일을 표절할만큼 수준 저하가 심했다.] 한국 영화계는 [[쉬리(영화)|쉬리]] 이후부터 이 시기에 대폭 성장하여 스릴러, 액션, 로맨스, 사극 등 장르의 다양성을 겸비하여 현재까지도 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외에도 2004년에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서비스를 시작해 종전에 극장별로 집계했던 관람객 집계시스템을 일률적으로 통일시켜 한국 영화산업의 투명성을 더 높이도록 했고, 같은 시기에 인터넷의 발달로 P2P나 웹하드를 통한 영화의 합법/불법공유가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자막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에는 외국영화 최초로 [[아바타]]가 천만관객을 동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