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64년 (문단 편집) ==== 6월 ==== * [[6월]] 중: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인체실험]]에 대한 의료 윤리 선언인 [[헬싱키 선언]]이 처음으로 선포되었다. [[http://ko.wikisource.org/wiki/%ED%97%AC%EC%8B%B1%ED%82%A4_%EC%84%A0%EC%96%B8|# 전문]] * [[6월 1일]] * 국회의장과 여야 총무단은 시국타협 모색에 실패하였다. * 민정당은 중앙정보부 해체를 요구하였다. * 경찰은 32개대 대표 학생 35명을 연행하였다. * [[6월 2일]] * 서울대생 약 6,000여 명은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 고대생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 [[6월 3일]] * 이날 전국적으로 학생 10,000여 명이 한일수교 반대와 매판자본 반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6.3 항쟁]]). * 정부는 밤 8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 계엄사는 집회/시위금지, 언론 사전검열, 각급 학교 무기휴교, 통금 연장, 무영장 체포/구금 등을 담은 계엄포고 1, 2호를 공포하였다. * [[6월 4일]] * 계엄사는 계엄포고 3, 4호를 공포하였다. * 경희대생 200여 명이 시위를 시도하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 [[6월 5일]] *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후 그는 당월 18일에 미국으로 떠났다. * 계엄사는 계엄포고 5, 6호를 공포하여 전국 대학에 방학 조치를 내리고 옥내외 집회를 금지시켰다. * 문교부는 서울시내 각 대학 학장들에게 시위 주동학생들의 처리 방책을 제시하였다. * [[6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조작하는 불순분자를 철저히 엄단하라고 지시하였다. * [[6월 7일]] * 민주공화당은 후임 의장에 정구영을 추천하였다. * 청와대 대변인은 반공과 국가안전을 위해 중정을 존속시킨다고 언명하였다. * 계엄사는 포고령 7호를 공포하여 통금시간을 1시간 단축시켰다. * 건대생 이윤식이 시위 중 트럭에서 추락해 숨을 거두었다. * [[부산문화방송]] 라디오에서 [[자갈치 아지매]]의 방송을 시작하였다. * [[6월 8일]] *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신설되었다. * 수경사 1공수단 장교 8명이 동아일보사에 난입하였다. * [[6월 12일]]: 여야 24명으로 구성된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