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60년대 (문단 편집) === 세계 === * 서양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JaCwp5faTk)]}}}|| || 1960년대,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의 모습 || 현대사회의 표준점이 정립된 시기이다. 인권의 개념이 구체화 되고, 그것이 대중화된 시기이다. 비록 68혁명으로 대변되는 청년들의 반발은 명목상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서 사회 전반은 크게 성숙했다. 대표적으로 60년대 이전의 미국은 권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국가였으며,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민주화와 인권중심으로 변화된다.[* 물론 아직도 진행중인 상황이다.] 군사적으로 [[냉전]]이 잠시 격해졌다. [[1961년]]의 서베를린 위기,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의 [[존 F. 케네디]]와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다행히 소련의 양보로 인해 [[핵전쟁]]은 피하게 되었다. 외교상으로 이때 들어서 [[대한민국]]이 [[미국]] 등의 일부 국가를 넘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던 자유진영 국가를 비롯해 [[중립]]국가 그리고 범아프리카 일부 국가 등과 외교관계를 활발히 맺으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하면서 [[인도]]([[자와할랄 네루]]),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나세르]]) 등과 함께 [[유엔]]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1960년]]은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1967년]]에는 동남아에서 [[ASEAN]]이 성립되었으나, 한국처럼 서구식 민주주의 실험이 한계로 접어들자 군사쿠데타가 점차 벌어져 비민주적인 체제로 전환되었다.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는 50년대 말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서, 60년대는 우주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미소양국의 '[[우주 경쟁|Moon Race]]'가 치열했다. 이 문 레이스의 정점은 주지하다시피 [[1969년]] 최고의 이벤트였던 [[아폴로 계획]]에 따른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반면 소련은 [[N1]] 로켓 발사에 실패하면서 달착륙 경쟁은 포기하고, 이후 [[우주정거장]] 건설로 나아간다. 1960년대 초반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 참전 이전에 제일 잘 살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천문학적인 군비 사용과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안좋아져서 소련 붕괴 후인 1991년 후에야 30년전의 영광을 되찾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TMv2FmSXWg)]}}}|| ||Anti-Vietnam War Movement Documentary || 사회적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는 [[베트남 전쟁]]과 결부되어 [[미국]] 내에서는 권위주의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청년이 주도가 된 [[히피]] 문화를 촉발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있다. 유럽에서는 청년들의 불만이 [[68혁명]]과 [[프라하의 봄]]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기성세대와 권력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청년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학계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퍼져나간다. 실제로 60년대 미국은 사실상의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색인종차별은 매우 당연한 상식이었고, 강제적 거세가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6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나 미국의 모습이나 사실 다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이 모조리 바뀌게 되는 시기가 60년대 이다. 미국의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며 차별적이었는지는 트리얼 시카고 7을 통해 볼 수 있다.[* 시카고에서 반전시위운동을 폭력사태로 연관지여 기소한 사건에 보비 실이라는 흑인이 피고인으로 동석하게 된다. 보비 실은 자신의 변호인이 수술로 인해서 참석할 수 없으므로 재판연기를 요청하나 재판장이 거부했으며, 이후 재판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하나 재판장이 변호인이 아니므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심지어는 애덤스 대 메케인 판례에 따른 자기변호를 요청하지만 이조차도 거부한다. 헌법상 보장된 권리조차 재판장이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자기 권리가 침해된 보비 실이 항의의 의사표시를 격하게 하자 보비 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쇠사슬에 묶어서 피고인석에 앉힌다. 이것이 1969년 재판에 있었던 일이다. [[https://www.nybooks.com/articles/1969/12/04/a-special-supplement-the-trial-of-bobby-seale/|#]]] 비록 이러한 운동이 소련의 [[프라하의 봄]] 진압과 [[리처드 닉슨]]의 당선으로 인해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평가하지만, 이러한 운동과 경험을 통해 미국사회는 분명하게 변화하였다. 시민의 인권과 흑인차별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흑인차별조치가 점점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게이 등 소수자의 인권이 신장되는 기점이 된다. 또 [[존 F. 케네디]], [[마틴 루서 킹]] 목사, [[맬컴 엑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고, 종교적으로는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면서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일본 이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이자 혁명의 시대로, 1956년 이후 전전(戰前)시대 수준으로 회복한 일본 경제는 성장에 성장을 더해 1961년부터 '소득배가계획'을 실시해 흑백TV-전기 세탁기-전기 냉동고 3종 신기를 필두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후 경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여 1965~1970년까지 '이자나기 경기'로 호황세를 더했다. 반면 1955년 자민당 출범 이래 거듭 탄압받은 일본의 좌익세력은 강성화되어 사회적으로 동요됐고, [[학생운동]]도 [[전학공투회의]]를 중심으로 더 치열해졌다. 이들의 불만은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일명 신안보조약) 체결 후 미국이 반공전선 교두보를 일본에 떠넘기면서 더 격화됐고, 거기에 탄압받은 좌익세력의 원한과 자민당의 독주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더해져 5월 [[안보투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투쟁은 물거품이 되어 되려 자민당 득표율 감소에도 야당의 다당화 현상이 두드러졌고, 국민들은 경제에 더 관심을 지녔다. 이에 더 절망에 빠진 일본의 좌파운동세력은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태 같은 폭력과 테러를 일으키며 투쟁 방식에 관한 논쟁과 세력 다툼(우치게바), 국민여론 악화 등으로 점점 사라져갔고, 1972년 아스마 산장 사태 이후 거의 사라지고 만다. 다만 1960~70년대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였고 가난하던 제국 ~1950년대 시절을 지나서 이때부터 일본은 분위기가 밝아졌다. 1980년대에는 미국과 자웅을 겨루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거다. *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마오쩌둥]] 하에서 1950년대부터 사회주의 정책이 지속되었다. 사회주의 정책임은 틀림없으나 기조가 조금 바뀌었는데, 58년의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원칙에 반대하여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고,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1960년대에는 58년부터 이어진 '제 2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하였다.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대약진 운동]]을 62년까지 전개 하였으나 크게 실패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적극적 의사결정에서 물러나고 다양한 책임들을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에게 떠넘겼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아래 실용주의 경제정책이 추진되었으나, 마오쩌둥은 1966년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며 실용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한 세력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앞선 58년~ 62년 간 대약진운동이 기근을 일으키고 중국 경제부흥을 뒤로 잡고끌었다면, 1966년 문을 연 문화 대혁명은 중국의 문화의 질적하락을 매우매우 발생시켰다. 중국 전통문화가 뿌리채 뽑히고, 예술인과 지식인은 탄압받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불신을,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경제성장도 50년대부터 약 20년간 정체되어 다른나라의 경제 역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핵개발]] 및 핵 관련기술이 크게 진보한다. 1950년대에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핵기술 및 관련기술을 이전 받으려 했으나, 중국 입장에서 거액을 지불했음에도 핵심기술을 보여주지 않았고, [[중소결렬]]로 59년, 관련 기술자들이 중국에서 철수하며 독자적으로 연구 할수밖에 없었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미국, 소련, 신생국 인도와도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중국은 잇따른 외교 및 경제적 포위에도, 국민들이 대약진 운동으로 굶어 죽을때도 핵개발을 그냥 단행했다. --무친놈-- 결국 중국의 천재들과 관련 기술자를 모아 미사일 개발부터 시작해, 62년부터 핵무기 연구를 시작했고 무려 2년만인 64년에 596 프로젝트에서 핵실험으로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다. 또한 1967년에는 [[수소폭탄]]의 개발을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