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 (문서 편집) [include(틀:황남대총)] [[파일: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1.jpg]] 발굴 직후의 모습. [[파일: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2.jpg]] 복원품의 모습.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904140|사진 출처 : 경향신문 - 황남대총 출토 바둑통에 새겨진 이름 '마랑'···그는 3~4세기 커제?]] [목차] == 개요 ==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황남대총]]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명문칠기 [[바둑]]알 통 2점. 현재 2점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4.jpg]] 출토 당시의 모습.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0452059|사진 출처 : 연합뉴스 - "황남대총 칠기에 등장하는 마랑(馬朗)은 중국 바둑고수"]]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바둑알 통 2점으로, 제작 연대는 대략 3세기 후반~4세기 초(서기 200~30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1973년부터 약 2년동안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을 발굴 조사하였고, 총 7만여 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칠기 공예품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남분의 주곽 수장부에 놓여있던 청동시루에서 확인된 이 2점의 칠기 나무그릇은 당시 신라인들이 [[바둑]]을 둔 후 바둑알을 모아 넣어둔 바둑통으로 확인되었다. [[파일: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3.jpg]] 칠기 바닥에 새겨진 '마랑(馬朗)' 글씨의 모습.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77&aid=0004350805|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 황남대총 칠기에 적힌 '마랑'의 정체…"中 바둑 최고수"]] 이 칠기 그릇은 1973년 최초 발굴 이후 수십년간 그저 바둑알 통이라고만 알려져 있었으나 2018년에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과 정일 목표대 중국언어와문화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 그릇 바닥에 새겨진 마랑이란 인명이 고대 [[동아시아]]의 [[바둑]] 성인인 '기성(棋聖)'이라는 칭호를 얻은 인물로 중국 [[서진]](西晉·266∼316) 시기에 활약한 바둑 최고수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리고 이 칠기는 마랑이 전성기로 활동하던 서기 290년대에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밖에 마랑명 칠기의 바로 옆에 크기가 같고 동일한 화염무늬가 있는 또 다른 칠기 그릇 한점이 나왔는데, 비록 '마랑'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칠기가 사실상 '마랑'명 칠기와 셋트로 바둑알을 넣는 통인 것으로 보고 있다. [[파일: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주칠기 바둑알 통5.jpg]] 용강동 6호분 출토 바둑돌(위), 황남대총 남분 출토 바둑돌(아래). 이 '마랑'명 칠기의 발굴과 동시에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연석도 243점이나 발견되었는데, 이 바둑돌들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깎아 만든 흔적이 보이고, 검은색, 흰색, 회색 등으로 분류되며 크기는 직경 1~2㎝, 두께는 0.3~0.7㎝ 내외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둑돌과는 달리 흰돌과 검은 돌의 차이가 모호했는데,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원래 완전히 [[검은색]]으로 색칠한 돌이 함께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색이 떨어져 나갔거나, 발굴 당시 유물을 세척하던 과정에서 지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바둑돌(추정)은 황남대총 남분 뿐 아니라 [[천마총]](350개)과 [[금관총]](약 200개), 용강동 6호분, [[쪽샘지구 44호분|쪽샘지구 제44호분]] 등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으며, [[분황사]]지에서는 전돌로 만든 15×15줄 바둑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신라와 통일신라 시대를 통틀어 [[바둑]]이 매우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바둑알 통 칠기 작품들로, 당시 [[바둑]] 문화를 향유하며 이루어진 [[중국]]과 신라 양국의 국제 교류 활동 및 고대 칠기공예품 제작술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분류:신라의 공예]] [[분류: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분류:경주시의 문화재]] [[분류:황남대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