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평 윤씨 (문서 편집) [include(틀:한국의 성씨)] ||<-2> '''{{{+2 해평 윤씨[br]海平 尹氏}}}''' || || '''{{{#ece5b6 관향}}}''' ||[[경상북도]] [[구미시]][* 과거 [[선산군]]] [[해평면]]|| || '''{{{#ece5b6 시조}}}''' ||윤군정(尹君正) || ||<|2> '''{{{#ece5b6 집성촌}}}'''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br]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br]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 [br]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모남리[br] [[충청북도]] [[청주시]] 송원동[br] [[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미당리[br]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br]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br] || ||[[황해도]] [[금천군]] 고동면 덕산리|| || '''{{{#ece5b6 인구}}}''' ||32,091명^^(2015년)^^|| [목차] [clearfix] == 개요 == 관향은 [[경상북도]] [[구미시]][* 과거 선산군] 해평면[* [[길(성씨)|길(吉)씨]]와 같다.]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고려)|고종]]~[[원종(고려)|원종]] 시기의 [[무신]]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守司空 尙書左僕射 判工部事)를 지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35|윤군정]](尹君正)[* 부인은 [[경주 이씨]]로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세기(李世基), 어머니는 [[이천 서씨]] 예빈윤(禮賓尹) 서찬(徐瓚)의 딸이다. 윤군정의 처남인 첨의참리(僉議參理) [[이천(고려)|이천]](李蒨)의 가계도 참조.]이다. 그 손자인 윤석(尹碩)이 [[충숙왕]] 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져 본관이 해평이 되었다고 한다. 인구는 [[2015년]] 기준 불과 32,091명으로, 전체 본관별 인구수에서 202위, [[윤(성씨)|윤씨]] 중에서는 [[파평 윤씨]], [[칠원 윤씨]], [[해남 윤씨]]에 이은 4위이며, 70만 명이 넘는 파평 윤씨에 비하면 희성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고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정승]], [[판서]], [[부마]] 등을 배출하긴 했으나, 기본 인구가 워낙 적은 편이라 그나마 알려진 조선시대의 유명인은 10세손인 [[윤은보]], 윤은필[* 동강공파의 파조(派祖)다. 황해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나 [[기묘사화]] 이후 사림을 옹호하고 훈구대신들과 거리를 두었던 일로 인해 승차가 늦은 편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윤승훈]](尹承勳)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8A%B9%ED%9B%88|한글위키]] 의 친할아버지다.] 형제, 12세손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 윤두수의 고손녀이자 [[김만중]]의 어머니인 정경부인 해평 윤씨 정도.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15명, [[상신]] 6명, [[대제학]] 3명, [[공신]] 3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급제자 수 기준 전체 본관 중 34번째에 해당된다.[* 1위는 870명의 [[전주이씨|전주 이씨(全州李氏)]], 2위는 368명의 [[안동 권씨|안동 권씨(安東權氏)]], 3위는 346명의 [[파평윤씨|파평 윤씨(坡平尹氏)]]다.] 조선시대 과거 장원급제자는 다음과 같다. 윤은필(尹殷弼, 생년미상) : 문과(文科) 연산군10년(1504) 별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윤택휴(尹澤休, 1687 丁卯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득경(尹得敬, 1702 壬午生) : 문과(文科) 영조12년(1736)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득우(尹得雨, 1719 己亥生) : 문과(文科) 영조27년(1751)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득성(尹得聖,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45년(1769)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치정(尹致鼎, 1764 甲申生) : 문과(文科) 순조1년(180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치겸(尹致謙, 1772 壬辰生) : 문과(文科) 순조7년(1807)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승구(尹升求, 1825 乙酉生) : 문과(文科) 고종10년(187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횡선(尹宖善, 1832 壬辰生) : 문과(文科) 고종19년(1882)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윤군정의 증손 대에서 소수인 문영공파(文英公派)와 다수인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나뉘었고, 문영공파는 8세에서 4개 분파로 나뉘고 충간공파는 13세에서 16개 분파로 나뉘어 총 20개 분파가 현존한다. 문영공파의 4개 분파는 한성윤공파, 청주공파, 장령공파, 남원공파다. 이 중 장령공파는 10세손인 헌간공(憲簡公) 동강(東岡) 윤은필(尹殷弼)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9D%80%ED%95%84|한글위키]] 대에서 동강공파(東岡公派)로 파조(派祖)하였다. 동강공파는 파조(派祖) 동강(東岡) 윤은필의 증손자이자 [[여주시]]로의 입향조(入鄕祖)인 13세손 서윤공(庶尹公) 윤신(尹璶)의 [[시호]]를 따라 서윤공파로 부르기도 한다. 서윤공 윤신은 숭정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의금부|판의금부사]], [[형조판서]], 증좌찬성, 증영의정을 지낸 숙간공(肅簡公) 남악(南岳) 윤승길(尹承吉)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8A%B9%EA%B8%B8|한글위키]] 의 장남으로 통훈대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첨절제사, 증좌승지를 역임한 [[선조(조선)|선조]] 시대의 문신이다. 임란 중 부친인 윤승길이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하고 있을 동안 양평에서 처가가 있는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沙谷里)로 입향하였다. 동강공파의 종택은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2000년 3월 24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C%A3%BC_%ED%95%B4%ED%8F%89%EC%9C%A4%EC%94%A8_%EB%8F%99%EA%B0%95%EA%B3%B5%ED%8C%8C_%EC%A2%85%ED%83%9D|한글위키]] 종택이 위치한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모래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대에 해평윤씨 집성촌이 있다. [[파일:여주-해평윤씨-동강공파-종택-전경-(1)-full-size.jpg|width=999]]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에 위치한 해평 윤씨 동강공파 종택 전경.[* 원래는 99칸의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솟을대문과 행랑채는 50년대 후반 청미천 범람 때 무너지고 사랑채는 1963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안채 46칸만 남아있다. 2022년 현재 가옥주는 동강공(東岡公)의 17대 종손인 윤중진 씨다. 11대 조부 때부터 만취당(晩趣堂)이란 당호를 쓴다.] 한편 충간공파에 속하는 5개 분파는 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오음공(梧陰公) [[윤두수]](12세)의 후손으로 번성하여 따로 오음공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오음공파에 속하는 치천공파(稺川公派)[* 윤두수의 장남 치천공 윤방의 후손]와 도제공파(都制公派)[* 윤두수의 차남 도제공 윤흔의 후손]에서 아래에서 설명하는 구한말부터의 유력 가문이 탄생했다. 경상도가 관향이지만 의외로 경상도에는 드물고, 경기도 양평군과 여주시, 충청도 쪽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충청북도]]에 더 많이 산다.[* 다만 유명한 집성촌은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 있으며 윤보선의 고향도 이곳이다. 이곳이 바로 윤취동이 재력과 토지를 구축한 곳, 즉 그의 본진이었기 때문.] ~~관향에 '평'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파평 윤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카더라|있으나]] 파평 윤씨와는 무관하고 분파는 더더욱 아니다.[* 실제로 윤씨의 4분의 3 가량이 파평 윤씨 또는 그 분파(남원 윤씨, 함안 윤씨 등)에 속하나, 해평 윤씨는 파평 윤씨와 상관이 없다. 더구나 이들의 관향인 파평은 경기도 파주, 해평은 경상도 구미에 있는 지명으로 서로 '평(平)' 자만 우연히 겹칠 뿐이다.][* 조선시대 당파로 보아도 [[파평 윤씨]]는 [[소론]]의 대표적 가문이지만 해평 윤씨는 [[노론]]이다.] == 가문 번성 == 이처럼 비교적 인구도 적고 평범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유력 가문이 되었다. 여기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 윤철구 파 === 문충공 윤용선(尹容善)은 [[윤두수]]의 장남인 치천공(稺川公) 윤방의 8대손이자 [[내각총리대신]] 및 의정대신([[영의정]]에 해당)을 여러 차례 역임한 정계의 원로였다. 그런데 윤용선에게는 친아들이 없었고, 이에 윤위선(尹爲善)의 아들인 윤철구(尹徹求)가 그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게 되었다. 윤철구는 진사시에만 합격하였을 뿐 변변한 관직을 가진 적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엄청난 양부를 모신 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윤철구의 차남[* 정확히는 삼남이나 작은 형이 일찍 죽어 사실상 차남의 역할을 하였다.]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순종(대한제국)|순종]])의 계비로 책봉되었고, 훗날 [[순정효황후]]가 되면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된 윤택영은 해풍부원군에, 그 아버지인 윤철구는 영돈녕부사에 봉해졌다. 이에 윤철구의 두 아들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윤철구의 장남 윤덕영은 [[한일합방]]조약 당시 황제를 겁박하여 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어전회의를 엿들은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감추고 내어주지 않는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합방조약문에 찍게하는 등 합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경술국적]] 타이틀을 얻었다. 이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윤덕영 자신은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동생 윤택영은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로서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어 열심히 친일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윤덕영은 [[1940년]]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부의장에 오름으로써 친일의 정점을 찍었다.[* 중추원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총독 다음 서열)이 겸임하므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은 부의장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번창한 아래 윤취동 파와 달리, 황실의 외척으로서 나라를 팔아 받은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으로 떵떵거렸던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그냥 몰락했다. 심지어 윤택영은 낭비벽이 너무 심해 그 많은 은사금을 다 날리고 [[파산]] 선고를 받고 [[후작]] 작위를 잃어버리기까지 하였고,[* 나중에 작위를 회복하기는 하였다. 그 작위는 아래와 같이 장남 윤홍섭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까닭에 차남 윤의섭이 이어받았으며, 윤의섭은 아버지처럼 열심히 친일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되었다.] [[빚쟁이]]에게 쫓겨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객사]]했다. 다만 윤택영의 장남인 윤홍섭은 참의원직을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도 물리치고 빈곤하게 살면서도 아버지의 후작 작위 승계를 거부하였으며, 누이인 [[순정효황후]]로부터 10만 원을 얻어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이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 등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으며 [[독립운동가]]가 되어 집안의 체면을 살렸다. [[광복]] 이후에는 아래에 언급된 먼 친척들인 [[윤치영]], [[윤보선]]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했고, [[숙명여자대학교|숙명학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 윤취동 파 === 한편 이들과는 촌수거리가 좀 먼, 윤두수의 차남 도제공(都制公) 윤흔의 6대손인 [[윤취동]](1798. 7. 18. ~ 1863. 12. 21.)이란 인물이 있었다. 말이 양반 가문이지 그의 아버지 [[윤득실]] 대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 직접 나뭇짐을 지고 농삿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품이 후하고 성실했던 윤취동은 고향인 [[천안시|천안]]에서 [[아산시|아산]]으로 온 뒤 열심히 농토를 개간해 결국 아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본인은 중추부지사가 되었을 뿐더러, 모은 재산으로 교육시킨 두 아들 [[윤웅렬]]과 [[윤영렬]]은 각각 [[대한제국]] 군부대신(지금의 [[국방장관]])과 자헌대부로 출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윤웅렬과 윤영렬은 자식을 매우 많이 두었고, 윤취동이 모은 재산과 남다른 교육열로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 유력인사가 되었다. 윤취동의 주요 자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장남 [[윤웅렬|웅렬]](1840. 5. 18. ~ 1911. 9. 22.): 해당 문서 참고. [[대한제국]] 군부대신.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고 1년 만에 죽었다(…).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 총 5남 2녀를 두었는데, 윤치호는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 소생이고 윤치왕·윤치창은 측실 김정순 소생이라 나이차이가 꽤 크다. * 장남 [[윤치호|치호]](1865. 1. 23. ~ 1945. 12. 9.):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정치가]], [[예술가]],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3남 윤광선이 [[남궁억]]의 딸과 결혼하여 그와 사돈 관계가 된다. 증손녀 윤순명은 [[방응모]]의 증손자[* 단 양자인 조카의 손자이므로 친증손자는 아니다.]인 [[방상훈]] 현 [[조선일보]] 대표와 결혼했다. * 3남[* 불확실하지만 윤치왕의 장교자력표에 생모(김정순)의 차남이라 되어있어 [[요절]]한 형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왕|치왕]](1895. 2. 17. ~ 1982. 12. 21.):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된 뒤 [[군의관]]으로 [[소장(계급)|소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창설했다. 의사이자 의학자로서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세브란스 병원]] 2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자손들은 대부분 [[학자]], [[기업가]], [[정치가]]가 되었다. * 4남 [[윤치창|치창]](1899. 3. 5. ~ 1973. 10. 1.): [[시카고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기업가]],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이사를 맡기도 했다. [[손원일]] 제독의 [[매부|매형]]이다. [[탤런트]] [[남궁원]], 전 외무부 장관 [[김동조(1918)|김동조]]와도 사돈관계가 된다. * 차남 [[윤영렬|영렬]](1854. 4. 15. ~ 1939. 11. 4.): 해당 문서 참고. [[대한제국]] 자헌대부. 형과는 달리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가난해졌지만 차남 윤치소의 재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조카 윤치호는 [[윤치호 일기|그의 일기]]에서 "치소가 아니었다면 삼촌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패드립]]을 날렸으며, 학식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리분별력과 수완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한 명의 본처(한진숙)와 두 첩과의 사이에서 총 9남 5녀를 두었으며, 아래의 아들들은 모두 본처 소생이다. * 장남 치오(1869. 9. 10. ~ 1950. 12. 22.)[* 제대로 보면 눈치채겠지만 아버지 윤영렬하고 나이차이가 고작 '''15년이다'''. 중3 나이에 득남을 한 셈.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윤웅렬이 14년 조금 안되는데(...).]: 계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자손이 굉장히 많은데, 장남인 [[윤일선]]은 [[의사]]로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으며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의사]]나 [[예술가]]가 되었다. * 차남 [[윤치소|치소]](1871. 8. 25. ~ 1944. 2. 20.): [[정치가]], [[기업가]]. [[이병도]]의 겹사돈이다. 일찍부터 이재(理財)에 밝아 윤영렬이 집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으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100칸이 넘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도 그가 지은 것이다. 이 사람도 자손이 많다. 장남이 [[대한민국]]의 4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인 '''[[윤보선]]'''이며, 차남 윤완선의 외증손자가 음악인 [[남궁연]]이고, 삼남 윤원선은 [[흥선 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5남 윤택선은 자식이 없었던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윤창구는 [[KIST]] 교수를 지냈다.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정치가]], [[학자]], [[목사]] 등이 되었다. * 3남 [[윤치성|치성]](1875. 4. 7. ~ 1936. 8. 11.): 해당 문서 참고. 이 사람도 자손이 많으며 대부분 [[언론인]], [[기업가]], [[학자]] 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대부분 [[개신교]]였던 이 집안에서)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여담으로 윤치성은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았고, 군대 해산 이후 구 대한제국군 장교들의 취업을 도와주었다.. 자세한 사항은 [[윤치성]] 문서 참고. * 4남 [[윤치병|치병]](1880. 7. 10. ~ 1940. 1. 24.): 관료였으나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 5남 [[윤치명|치명]](1885. 10. 27. ~ 1944. 4. 21.): 윤치병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아산시]]에서 교육자로 살았다. 아들 윤유선은 [[세브란스 병원]] 원장, 국립보건원 원장 등을 지냈다. * 6남 [[윤치영|치영]](1898. 2. 10. ~ 1996. 2. 9.):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주로 [[교수]]가 되었으며, [[KBS]]의 [[윤인구]] [[아나운서]]가 손자다.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의 사돈이기도 하다. 불과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윤취동의 자손들 중 [[정치가]], [[외교관]], [[법관]], [[의사]], [[학자]], [[기업가]], [[예술가]], [[언론인]] 등으로 출세한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며. 게다가 인척, 사돈 관계를 맺은 사람까지 따지면 대한민국의 웬만한 유명인사와 다 연결될 정도. 여기에는 살짝 야사 삘나는 뒷이야기가 있다. 윤취동의 아버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거지]]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승려]]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승려는 이에 보답하고자 [[이순신]]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 후에 윤득실 묘는 근처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심지어 그 승려는 만약 들키면 [[오리발|몰랐다고 잡아떼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가세가 다시 서고 자손이 번성하고 출세했다는 것이다. [[파일:yoon_tree.jpg]] 다소 씁쓸하게도, 저 격랑의 시대에 저런 유력 가문이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 가계도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물론 끝끝내 친일을 거부한 윤보선이나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아버지(윤택영)는 친일파, 아들(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인 등, 가까운 친척 간에도 한쪽에서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한쪽에서는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고 조용히 살기도 했다. 절묘하게도 [[윤치호]] 삼형제는 각각 일본/ 영국/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각각 친일, 친영, 친미파가 되었다. 가공할 분산투자인 셈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다른 [[네임드]](?) 친일파 가문인 [[여흥 민씨]](그래도 일부는 독립운동을 했음 대표적으로 [[민필호]], [[민영익]] 일부), [[전주 이씨]]([[왕공족]] 등 일부) 등은 [[조선귀족]] 작위와 일제 은사금으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먹다가 [[8.15 광복|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이좋게 망한 사람이 많은 반면에, 윤취동의 후손들은 기본적인 경제관념과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가 [[기업가]], [[학자]], [[의사]] 등으로 출세하여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위세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더 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애초에 가세의 근원이 은사금 등이 아니라 대부분 윤취동 개인이 축적한 부(富)와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치왕의 경우 [[1910년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뿐더러 유학 시절 1년에 5천원 정도를 썼는데, 이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이 넘는 액수다. (참고로 당시 [[조선총독부]] [[국장(직위)|국장]]급의 월급이 80원 정도였다.) 한 술 더 떠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교]] 유학 당시 [[피아트]] [[컨버터블]]을 타고 다녔는데, '''내·외국인을 통틀어 [[자가용]]를 가진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집안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윤치명·윤치병 같은 인물들도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 * [[조선 정종|정종]]의 후궁 [[숙의 윤씨(정종)|숙의 윤씨]] * [[태종(조선)|태종]]의 부마 (소숙옹주의 남편 해평군(海平君) 윤연명(尹延命)) * [[연산군]]의 [[간택]] 후궁 [[숙의 윤씨(연산군)|숙의 윤씨]] * [[선조(조선)|선조]]의 부마 ([[정혜옹주(선조)|정혜옹주]]의 남편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 [[인성군]] 군부인 해평 윤씨 * [[숭선군]] 맏사위 윤세정 * [[순조]]의 부마 ([[덕온공주]]의 남편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 [[헌종(조선)|헌종]]의 [[간택]] 후궁 정빈 윤씨 * [[순종(대한제국)|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 윤씨 == [[나무위키]]에 문서가 존재하는 실존 인물 == === 10세손 === * [[윤은보]]: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 [[병조판서]], [[한성판윤|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찬성(관직)|우찬성]], [[찬성(관직)|좌찬성]]에 이어 [[정승|우의정]], [[정승|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 === 12세손 === * [[윤두수]]: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86대 영의정.[* 오음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윤근수]]: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화가. * [[윤승훈]]: 조선 중기의 문신. 92대 영의정. === 17세손[* 종파에 따라 쇠금변(金) 혹은 삼수변(氵)이 들어간 외자를 항렬로 사용.] === * [[윤급]]: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 18세손[* '택(澤)O' 혹은 '득(得)O' 두 가지 항렬 사용.] === === 19세손[* 'O동(東)' 혹은 'O상(相)' 두 가지 항렬 사용.] === * [[윤취동]]: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재력가, 대지주. === 20세손[* 'O렬(烈)' 혹은 'O겸(謙)' 두 가지 항렬 사용.] === * [[윤웅렬]]: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인(온건개화파),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 [[윤영렬]]: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인 === 21세손[* '치(致)O' 혹은 '철(喆)O' 두 가지 항렬 사용.] === * [[윤치호]]: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외교관, 언론인, 교육자, 시민운동가 * [[윤치성]]: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군인, 독립운동가, 기업인 * [[윤치영]]: 제헌국회의원, 전 서울특별시장 === 22세손[* 'O선(善)' 항렬.] === * '''[[윤보선]]: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 [[윤영선(1896)|윤영선]]: 전 농림부장관 * [[윤일선]]: 전 서울대학교 총장, 병리학·해부학자 * [[윤영선(1922)|윤영선]]: 의사 === 23세손[* 'O구(求)' 항렬.] === * [[윤인구]]: KBS 아나운서 === 24세손[* 'O영(榮)' 항렬.] === * [[윤택영]]: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장인, 관료 * [[윤덕영]]: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술국적]], 일제강점기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부의장 * [[윤극영]]: 동요작곡가, 아동문학가 * [[윤세영]]: [[태영그룹]] 설립자, [[SBS]] 설립자 * [[윤주영]]: 전 무임소 · 문화공보부 장관, 전 국회의원, 사진작가 * [[윤오영]]: 수필가, 대표작으로 [[방망이 깎던 노인]], 마고자가 있다. * [[윤소영]]: 전 [[한신대학교]] 국제경제학과 교수.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가이자 저술가. === 25세손[* 'O섭(燮)' 항렬.] === * [[순정효황후|윤증순]]: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계후[* '''[[대한제국]]'''의 황후가 '''[[윤보선|대한민국 대통령]]'''의 '''증손녀''' 뻘이다(...).] * [[윤기섭]]: 독립운동가, 제2대 국회의원 * [[윤형섭]]: 교수, 전 교육부 장관 * [[윤석민(기업인)|윤석민]]: [[태영그룹]] 회장, 전 SBS 미디어홀딩스 부회장 === 26세손[* 'O로·노(老)' 항렬.] === * [[윤국노]]: 10, 11, 12대 국회의원 * [[윤창로]]: 전 국방부 대변인 * [[윤영필]]: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 27세손[* 'O진(鎭)' 항렬.] === * [[윤대진]]: [[대한민국]]의 전직 [[검사(법조인)|검사]].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 [[윤우현]]: [[버즈(한국 밴드)|버즈]] 기타리스트 * [[윤정진]]: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 예비역 [[대령]] 및 정치학박사. [[프라임법학원]]에서 5급공채, 국립외교원 2차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 28세손[* '홍(洪)O' 항렬.] === * [[윤홍빈]]: 배우 * [[윤홍정]]: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연구위원 === 29세손[* 'O식(植)' 항렬.] === [[분류:해평 윤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