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야시 에이다이 (문서 편집) || 필명 ||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본명인 시게노리를 음독으로 읽은 것.]) || || 본명 || 하야시 시게노리(林 栄代) || || 출생지 || 후쿠오카 현 다가와 군 사이도쇼 촌 (現 가와라 정) || || 사망지 || 후쿠오카 현 || || 생몰년도 || 1933년 12월 4일 ~ 2017년 9월 1일 (향년 83세) || [목차] == 개요 == [youtube(JcVSHzVAsTA)] 일본의 기록작가. 일본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강제 연행 문제를 취재해 기록으로 남긴 위인이다. == 생애 == 1933년 후쿠오카(福岡) 사이도쇼(採銅所)에 태어나 지쿠호(筑豊) 탄광지대에서 성장했다. 신사의 신관이던 그의 아버지 하야시 토라지는 인근 탄광에서 도망쳐 나온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숨겨주거나 탈출을 도왔는데, 이때 도움을 받은 한국인들이 대략 3백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로 인해 [[특별고등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석방 후 한 달도 못되어 47세의 이른 나이에 숨졌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부친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귀향 도중 그의 집에 들러 고마움을 표시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소액의 돈을 놓고 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하야시는 평생동안 이 돈을 보관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되새기고 자신의 신념을 다잡았다고 한다. 1955년,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광부로 일하다가 도바타시 직원으로 이직했다. 이 시기 그는 기타큐슈 공업지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푸른 하늘이 좋다’는 구호를 내걸며 시민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공해추방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했다. 1970년에 퇴직한 뒤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기록작가의 길을 걸었다. 이를 위해 군함도부터 사할린 등 한국인의 강제 동원의 한이 서린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해 관련자 증언을 청취하고 자료도 수집하였다. 그렇게 1968년부터 2016년까지 쓴 책이 무려 57권에 이르렀다. 이러한 저술 활동으로 인해 일본 극우단체로부터 여러 협박전화와 "[[비국민]], 비국민의 자식"[* 우리로 치면 매국노]이라는 폭언들을 받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히 일제의 강제징용에 관련된 서적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평화협동저널리스트 기금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7년 9월 1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여담 == * 저서로는 <강제연행 강제노동-지쿠호 조선인 갱부의 기록>(1981), <여자들의 풍선폭탄>(1985), <청산되지 않은 쇼와>(1990), <잊혀진 조선인 황군병사>(1995), <대만고사의용대>(1998) 등이 있다. * 암으로 투병하며 돌아가시기 14일전 강제연행,강제노동 기록을 [[국가기록원]]에 6천여점의 자료를 기증하였다. [[https://youtu.be/fK2NkIZwzy0 |출처:KBS]] * 2018년 8월, EBS [[다큐프라임]]에서 광복절 특집으로 그가 죽기 전의 활동을 보여주었다. [[분류:일본 남성 작가]][[분류:카와라정 출신 인물]][[분류:폐암으로 죽은 인물]][[분류:1933년 출생]][[분류:2017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