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베즈 무샤라프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파키스탄 대통령)] ||<-3><#01411C> '''{{{#FFFFFF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제10대 대통령}}}[br]{{{#ffffff {{{+1 페르베즈 무샤라프}}}}}}[br]{{{#ffffff پرویز مشرف[br]Pervez Musharraf}}}''' || ||<-2>[[파일:페르베즈 무샤라프.jpg|width=100%]] || ||<|2> '''{{{#white 출생}}}''' ||[[1943년]] [[8월 11일]] || ||[[영국령 인도 제국]] [[델리]][br](현 [[인도|인도 공화국]] [[델리]]) || ||<|2> '''{{{#white 사망}}}''' ||[[2023년]] [[2월 5일]] (향년 79세) ||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 || '''{{{#white 국적}}}''' ||[[파키스탄]][[파일:파키스탄 국기.svg|width=28]]|| || '''{{{#white 학력}}}'''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 || || '''{{{#white 배우자}}}''' ||Sehba Musharraf (1968~) || || '''{{{#white 자녀}}}''' ||슬하 1남 1녀 || || '''{{{#white 정당}}}'''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2> '''{{{#white 재임기간}}}''' ||<(>제10대 대통령 || ||<#ffffff>[[2001년]] [[6월 20일]] ~ [[2008년]] [[8월 18일]]|| || '''{{{#white 종교}}}''' ||[[이슬람]] || || '''{{{#white 주요 경력}}}''' ||파키스탄군 합참의장 겸 육군참모총장[br]파키스탄 군사정부 최고지도자[br]파키스탄 10대 대통령|| [목차] [clearfix] == 개요 ==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 파키스탄은 [[의원내각제]] 국가라 총리가 실권이 있고 대통령은 허수아비지만 그런 파키스탄에서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1999년]] 10월 쿠데타를 일으켜 나와즈 샤리프 총리를 쫓아내고[* 이듬해인 2000년 사우디로 망명했고 2007년이 되어서야 귀국했다. 이 후 2013년 다시 총리에 올라 2017년까지 집권했다.] 군사정부를 출범시켜 최고지도자로 있다가 [[2001년]] 대선에 출마해서 당선돼 대통령이 되었고 그렇게 [[200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이 때문에 대통령 임기는 7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9년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파키스탄에서 나름 [[케말 아타튀르크]]식의 세속주의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종교세력과 결탁한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 생애 == 영국 식민통치기인 [[1943년]]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태어나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서로 분리독립한 이후 부모를 따라서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무하지르]]이다. [[196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포병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특수부대 SSG 등 요직을 거친 다음 [[1991년]] 장성으로 진급했다. 중장 시절이던 [[1998년]]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신임을 얻으면서,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99년]] [[카길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이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패배하자, 무샤라프 참모총장과 샤리프 총리간의 사이가 벌어져서, 패배의 책임을 누가 지느냐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열받은 샤리프 총리는 무샤라프를 참모총장에서 해임했고, 무샤라프는 군사 쿠데타로 반격했다. 무샤라프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임시헌법령을 발동하여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재자가 되었다. 무샤라프의 쿠데타에 대해서 미국과 서방진영은 비난을 퍼부었고, 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알 카에다가 은신하고 있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공격]]을 결정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안전한 후방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파키스탄에 손을 내민것이다. 무샤라프가 잔인한 군부독재자에서 하루 아침에 [[테러와의 전쟁]]에 함께하는 믿음직한 동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국은 모든 제제를 해제하고, 그동안 유보해 두었던 무기수출을 허용하는 등 무샤라프 정권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입장에선 파키스탄의 이웃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 전진기지로 삼은 파키스탄에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계산 때문이였다. 이러한 미국과의 협력관계와 그의 독재로 인해 국내외에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수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2003년]] [[12월 14일]] 무샤라프 대통령 일행이 지나던 다리에 장착돼 있던 원격 조정 고성능 폭탄이 터졌지만 폭탄은 차량 행렬이 지난 뒤에야 터져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폭발이 지체된 것은 무샤라프의 신변을 염려한 미국의 정보팀이 지원한, 원격신호 차단 장비 덕이었다. [[2003년]] [[12월 25일]]에는 2명의 자살폭탄 테러범이 각각 트럭을 타고 무샤라프의 리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차량이 가까스로 무샤라프를 비껴갔고, 대신 테러범 2명을 포함한 15명이 숨지고 46명이 다쳤다. 이런 식으로 무샤라프는 [[2003년]] 4월 [[카라치]]에서 두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벗어난 데 이어서 2003년에만 무려 4차례의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무샤라프는 [[2004년]]에 간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카이베르파크툰크와 반란|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이유로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시켜 국내외의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특히 그를 몰락하게 만든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2007년]] 무샤라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시위에 무샤라프에 의해 축출되었던 나와지르 샤리프 전 총리와 망명 생활을 했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도 반정부 시위에 가담하여 파키스탄 정국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샤라프는 2007년 9월 재선을 전제로 육군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하여 공식적으로 군복을 벗게 되었으나, 2007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참가가 제한된 가운데 간선 선거에서 9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신 그는 국민들을 무마하기 위해 부토 전 총리를 사면하고 귀국을 허가했다.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이듬해인 [[2008년]] 1월 조기 총선을 약속했으나, 12월 27일 부토 총리가 [[암살]]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다. 파키스탄 당국은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부토 지지자들 사이에선 정적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의 암살공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지지자들이 더 분노하여 무샤라프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며 파키스탄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총선은 연기되었고 2008년 2월 치러진 총선 결과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무샤라프 대한 사임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두 개의 주요 당으로 이뤄진 파키스탄 집권연정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하지 않을 경우 헌정질서 파괴 등의 이유로 탄핵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결국 백기를 들고, 탄핵 절차 개시를 하루 앞둔 시점에 tv생중계를 통한 대국민연설에서 자신의 미래를 국민의 손에 맡긴다며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국가를 위해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무력하게 사퇴한 이유는 파키스탄 인민당 등이 주도하는 집권연정이 2008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 탄핵이 가능한 상하원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했고 자신의 지지세력에서도 이탈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샤라프의 권력기반인 군부와 정보부가 중립을 선언하고 미국마저 등을 돌리면서 무샤라프는 결국 사임으로 내몰리게 됐다. [[2008년]] [[11월 23일]] [[영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떠났다. 망명 생활을 하면서 [[메카]]로 성지순례를 간 적도 있고 중동과 미국, 유럽 등을 떠돌면서 강연을 했고 큰 돈을 벌었다. [[2011년]]부터 귀국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2012년]] [[3월 23일]] 본인 입으로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겠다고 발표했다. [[2013년]] 총선에 출마해 다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2013년]] [[3월 24일]] 망명 4년 4개월만에 [[카라치]] [[진나 국제공항]]을 통해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 죽이겠다는 [[탈레반]]의 살해 위협은 덤. 하지만 [[4월 16일]] 파키스탄 선거 재판소가 무샤라프의 선거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4월 18일]]에는 고등법원에서 체포 명령을 내렸다. 결국 가택 연금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거기다 5월 총선에서 무샤라프가 내쫓았던 샤리프 총리가 승리하면서 14년만에 다시 총리가 되었다. 결국 [[2014년]] [[3월 31일]] 특별 법원에서 반역 등 5개 혐의로 정식 기소됐다 그 중에서도 부토의 암살이 정말로 무샤라프에 의한 암살인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1947년]] 건국 이래 군부가 집권해 온 파키스탄에서 고위 군 장교가 법정에 출석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2017년]] [[7월 27일]]에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샤라프는 2002년에 인도와 무력 대치할 당시 핵무기 공격(!)을 검토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9437397|#]] 그리고 [[2019년]] [[12월 17일]]에 특별 법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https://www.ytn.co.kr/_ln/0104_201912172331010567|#]] 하지만, 고등법원이 사형 선고를 무효라고 뒤집었다.[[http://yna.kr/AKR20200114082100077?did=1195m|#]] 그러나 무샤라프는 이러한 법원의 사형선고를 떠나서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없는데, 이미 나이 70을 넘겼기 때문이다. 이슬람 법에서 나이 70넘으면 그만큼 [[알라]]의 축복을 받았으니 사형시킬 수 없다라고 하기 때문. [[사담 후세인]]도 이래서 만 70살이 되는 2007년을 딱 이틀 남겨두고 얼른 [[사형]]을 선고하고 [[교수형]]시켰다. 비록 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된 것은 아니고 잠적 도주 중에 총살된 [[무아마르 카다피]]도 후세인과 같은 69살이었다. 그리고 [[2023년]] [[2월 5일]] 신병 치료 차 체재하던 두바이에서 사망하였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1/0002554897?sid=104|#]] == 평가 == 군말없이 독재자이고 위에 서술하듯이 문제도 많지만 그나마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여 여성 교육 확대 및 여러 모로 진보적인 정책을 취한 점은 높게 평가받으며, 그의 세속주의 정책 자체는 파키스탄 인민당이나 PTI 집권기때도 어느정도 지속되어서 파키스탄의 교육수준도 어느정도 향상되었고, 문맹률도 꽤 내려갔다. == 관련 문서 == * [[독재자/목록]] [[분류:파키스탄의 군인]][[분류:아시아의 독재자]][[분류:파키스탄 대통령]][[분류:1943년 출생]][[분류:2023년 사망]][[분류:델리 출신 인물]][[분류:파키스탄의 무슬림]][[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외국의 실향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