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문서 편집) [include(틀:1차세계대전기의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include(틀:독일 국방군/장성급 장교)] |||| '''독일 제국군 육군 보병대장[br]{{{+1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br]Paul von Lettow-Vorbeck'''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General_von_Lettow-Vorbeck.jpg|width=100%]]}}} || || 이름 ||파울 에밀 폰레토포어베크[*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Paul Emil von Lettow-Vorbeck''' || || 출생 ||[[1870년]] [[3월 20일]] {{{-1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 || 사망 ||1964년 3월 9일 {{{-1 [[서독]] [[함부르크]]}}} || || 복무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width=25]] [[독일 제국군]]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25]] [[국가방위군]] || || 최종계급 ||[[파일:General_(Wurttenburg).gif|width=35px]]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 || 참전 ||[[의화단 운동]] [[헤레로족|헤레로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 [[탕가 전투]] || || 주요서훈 ||[[푸르 르 메리트]]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활약한 [[독일 제국]]의 군인. [[탕가 전투]]에서 얻은 '''아프리카의 사자'''(Der Löwe von Afrika)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생애 ==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지방의 레토포어베크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임관하였다.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01년에 독일 참모부로 돌아갔다. 190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배치되었으며, [[로타르 폰 트로타]] 아래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헤레로족의 반란의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헤레로족 포로 심문 과정에서 [[게릴라|게릴라전]]에 대한 가치와 그들의 삶과 규율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07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1913년까지 독일에 배치되었다가 1914년에 [[독일령 서아프리카]]로 잠시 파견되었다가 다시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아프리카의 각국 식민지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을 희망하였으나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탕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스카리로 불리는 현지인 군대를 이끌면서 [[스와힐리어]]를 구사하며 현지인들을 존중하는 방침 덕분에 규율을 다질 수 있었고, 게릴라전을 통한 지연전, 방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1916년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16년부터 영국군의 대대적 증원이 이루어지면서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동아프리카 전선]]의 전황은 더욱 독일 제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레토포어베크가 이끄는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듭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에는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해 지원이 끊기자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본토에서의 전쟁을 포함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도 항복하였지만, 레토포어베크가 이끈 전투 자체는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9년 독일로 복귀하면서도 [[브란덴부르크]]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받을 수 있었다. 전간기 동안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고 [[국가방위군]]에만 남아 있었으며 1920년 보병대장으로 전역한 후 잠시 정계에만 몸담았었을 뿐, 재선을 하지 않고 야인으로 지냈다. 점차 [[나치당]]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나치들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과 같은 전쟁영웅을 선전에 이끌여들였으나 레토포어베크는 나치당을 혐오하였다.[* 레토보어베크가 워낙 정치와 거리를 둔 탓에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차대전 시절 아프리카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이력을 고려하면 인종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 대사직을 부탁하였으나 레토포어베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에게 나치는 보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켄젠 원수가 더욱 레토포어베크를 선전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제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나치당의 감시를 받았으며 1939년 [[독일 국방군]] 명예 보병대장을 수여하는 정도로만 대우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였으며, 두 아들은 국방군에서 복무 중 사망하였다. 전후 경제를 회복하면서 가계도 나아졌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였던 탄자니아를 방문하여 옛 아스카리 전우들과 재회하기도 하였다. 이후 196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으며, 옛 아스카리 부대원들이 초청받아 참석한 아래 [[독일 연방군]] 및 정부에 의해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 해 서독 정부는 아스카리 부대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 여담 ==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을 플레이할 경우 카이저 복귀 루트로 갈 때 '늙은 사자'를 복귀 시키자는 디시전을 통해 현역 장군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유일하게 밀림쥐 속성을 가지고 있어[* 실제 장군의 주 전장도 아프리카 밀림이었다.] 밀림에 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큰 활약을 해줄 수 있다. 모드 중 하나인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Hoi4 카이저라이히]]에서도 현역으로 등장한다. [[분류:1870년 출생]] [[분류:1964년 사망]]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독일의 귀족]] [[분류:독일의 군인]] [[분류:독일 제국의 군인]] [[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라인란트팔츠 주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