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우들 융에 (문서 편집)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junge6.jpg|width=100%]]}}} || || 본명 ||Gertraud "Traudl" Junge || || 출생 ||[[1920년]] [[3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독일국]] [[뮌헨]] || || 사망 ||[[2002년]] [[2월 10일]] [[독일연방공화국]] [[뮌헨]] || ||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 [목차] [clearfix] == 개요 == 본명은 게어트라우트 훔프스. 트라우들(Traudl)은 그녀의 애칭이었다.[* 영어 이름 '거트루드(Gertrud/Gertrude)'와 어원이 같은 이름인데, 영어로도 이 이름의 애칭은 '트루디'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원고와 인사만을 기록하는 담당관이었다. 흔히 [[비서]]로 알려져 있지만 타자수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럽에서는 문서 작성 기술상 타자기를 이용하여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특별한 숙련도가 요구되고,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어휘력 수준이 중등교육 이상 거쳐야 하기 때문에 타자 역할만을 전담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나의 투쟁]]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히틀러는 공부에 대한 흥미가 없고 고등학교 과정을 자퇴한 데다 문법도 자주 틀렸다고 한다. 권력을 쥐고 나서도 공문이나 보고서 같은 글을 읽는 것을 싫어했고 젊어서 그나마 흥미를 가지고 본 책들도 대부분 문법적으로 비문이 넘치고, 앞뒤가 안 맞는 내용도 많은데다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로 점철된 정치 팜플렛들이 다수였으니 문법상의 오류를 교정해주고 편집할 비서들의 능력이 중요했다. == 생애 == === 유년기 === 1920년 뮌헨의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장성급 장교|장성]]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익]] 활동을 했던 인물로 [[터키]]로 이주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무용가가 꿈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독일의 실업학교에 진학, 그곳에서 비서직을 공부하게 된다.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한 봉제회사의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세계 2차대전이 터지면서 1942년 , 여동생과 함께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 히틀러의 비서가 되다 === 1942년 12월, 히틀러의 측근이자 그의 4명의 개인비서중 한명이었던 알베르토 보어만[* 히틀러의 비서인 일명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의 동생. 형이나 동생이나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서로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과 알게된 그녀는 히틀러의 여비서인 게르다 크리스티안이 결혼을 하면서 6개월간의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자 [* 1913~1997. 국방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공군 소령과 결혼하면서 장기 휴가를 신청했다. 1943년 복귀를 했고 이후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벙커에 탈출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미군에 넘겨지게 되었다. 전후에는 이혼하고 호텔에서 일하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암으로 사망했다.]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스샨체(Wolfsschanze)[* 늑대소굴이라는 뜻. [[발키리 작전]]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무용수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때까지 그녀는 비서는 임시로 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를 회상하며 그녀는 "히틀러의 비서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고작 22살이었고,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했다. || [[파일:external/cdn2.spiegel.de/image-631129-galleryV9-sijp-631129.jpg]] || 히틀러의 비서로 있던 1943년 7월 14일 히틀러의 [[전속부관]]들 중 한 명인 한스 융에(Hans Junge) [[나치 친위대|SS]] [[대위]]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후에 한스 융에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전장에 투입되어 전사했기 때문이다. 융에 대위와 결혼을 준비할 때, 당시 독일 [[민법]]상 SS [[장병]]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인종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한 수십 통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히틀러에게 슬적 "이렇게 복잡해선 결혼도 못하겠다"고 투덜대자 히틀러가 웃으며 전화 한 통으로 서류 제출을 일체 면제해준 일화가 있다. 이후 [[베를린]]으로 연합군의 총공세가 이어지며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베를린]] 총통관저의 [[퓌러붕커]]에서 [[히틀러]]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https://m.blog.naver.com/freeman46/221393751616|융에가 직접 작성한 그의 유언장을 보려면 여기로]]. 그리고 1945년 4월 30일, 15:00경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이후[* 이때 그녀는 옆방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6명의 자식들과 식사 하는 중이었다.] 지하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후 행적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하나는 융에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 처럼 연합국 지역으로 넘어가던 중 러시아 군에게 억류 되었는데 별탈없이 미군에 보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과, 또 하나는 탈출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하고 부상을 당한 그녀를 치료한 후 소련군 장교에게 보내져 수개월간 그녀를 [[성노예|현지 종군처]]로 데리고 있었다는 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khronika.tistory.com/14|해당 블로그]]를 참조. === 전후 === 전후 게르다 알토라는 가명을 쓰며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 증언은 히틀러에 대해 굉장히 군사적 부문에서 교류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트라우들 융에가 비서로 있던 1942년부터 1945년사이 히틀러가 직접 유대인 학살을 지시한 것을 손에 꼽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진짜 몰랐던게 아니라 전쟁 이전 히틀러가 연설과 [[나의 투쟁]]으로 제공한 유대인 말살론에 의거해 [[친위대]]와 [[국방군]]이 자발적으로 학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유대인에 대한 최종해결책(대량학살)을 결정한 [[빈제 회의]]에 히틀러는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살아남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자리에서는 정치이야기보다 채식의 위대함이라던가 금연의 중요성, 개를 잘 키우는법 같은 이야기를 주로 하여 동석한 장교들을 힘들게 했다고.]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버리는 등 인격적인 문제도 많았다고 한다. 트라우들 융에는 이후 히틀러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 등에 출연하여 1942~45년의 기간 동안 곁에서 지켜본 히틀러의 개인적인 면모와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여러 일화들을 증언하였다. 이런 작업들은 훗날에 말년의 히틀러를 묘사한 [[다운폴]] 등의 영화들을 제작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 [[파일:external/www.rhein-zeitung.de/41871_1_popup_41871_1_org_szene01_.jpg|width=100%]] || || 말년의 모습 || 2001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다큐멘터리 영화인 《히틀러의 여비서( Im toten Winkel - Hitlers Sekretärin )》(또다른 제목은 "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이다)에 본인 역으로 출연하여 히틀러의 여비서로 근무하던 시절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여기서 트라우들 융에는 [[하얀 장미]]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그들에 비하여 나치를 합리화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성찰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들어간 인터뷰의 내용은 영화 [[다운폴]]에 일종의 나레이션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이후 2002년에 영화의 시사회가 끝난 후, 병원에 입원중이었던 트라우들 융에는 [[암]]으로 인하여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4226716|히틀러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 사망]] 시사회 직후 감독이 병원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시사회 이야기를 하자 "그럼 이젠 제가 할 일은 다 끝났군요. 한결 홀가분해지겠어요."라는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영면했다. 사후인 2003년 Bis zur letzten Stunde. Hitlers Sekretärin erzählt ihr Leben.(마지막 순간까지 - 히틀러의 여비서의 회고)라는 제목으로 예전에 썼던 회고록의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재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전사한 한스 융에 외에는 없었다.[* 하인츠 발트라는 사람과 약혼까지 가기도 했으나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마음 역시 멀어지는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우연히도, 융에뿐 아니라 히틀러의 비서였던 사람들은 전쟁 후에 아무도 결혼/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여담 == * [[파일:external/cineplex.media.baselineresearch.com/378481_full.jpg]] 영화 [[다운폴]]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했다. 그녀를 연기한 인물은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배우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Alexandra Maria Lara). [[분류:1920년 출생]] [[분류:2002년 사망]] [[분류:나치당원]][[분류:암으로 죽은 인물]] [[분류:뮌헨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