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비 (문서 편집) [목차] == 소개 == 崔毖 생몰년도 미상 [[서진]] 및 [[고구려]]의 인물로 [[최염]]의 증손자였으며, [[왕준(서진)|왕준]]의 처남으로[* 원문은 妻舅인데, 오늘날 [[중국어]]의 용례로는 [[처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다만 권중달 교수는 《[[자치통감]]》 번역 과정에서 이를 처삼촌이라고 풀이해 차이를 보인다.] 기주 청하국 동무성현 사람이었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면서 왕준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311년]]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석(封釋)이 사망하자 왕준이 그 후임으로 최비를 임명했다. 이후 중원의 난리를 피해 동북으로 유입되는 한족 인재들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비가 아닌 [[모용외]]에게 의탁했다. 최비의 후원자였던 왕준이 [[313년]] 후조의 [[석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세력도 와해되면서 최비는 [[요동]]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317년]]에는 낭야왕 [[원제(동진)|사마예]]를 [[동진]]의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했고, 그 덕분에 동이교위에서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들이 모용외에게로 흘러가자 최비는 마침내 [[고구려]]와 [[선비족]]의 우문부 및 단부를 꾀어서 연합군을 만들어 모용부를 공격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이에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중심지인 극성을 포위했지만, 모용외의 이간계로 실패하고 오히려 최비가 배후에 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모용외는 >"항복하는 것이 상책, 도망가는 것이 하책" 이라면서 요동으로 밀고 들어왔다. 최비는 [[319년]]([[미천왕]] 19년) 12월에 수십 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단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했다. 다만 기록의 부재로 고구려에 망명한 뒤에는 무얼하고 살았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모용황]]은 최비의 딸 최씨를 장수인 선우량(鮮于亮)과 혼인시켰다. [[우산하 3319호]] 무덤의 주인이라는 설이 있다.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include(틀:최비 진영)]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소설)|고구려]]》에서 엄청난 왜곡이 수반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280년에 벌어진 오나라 정벌때 오나라 장강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일을 왕준이 아닌 두예 휘하에 있었던 최비가 한 것으로 나오며, 원목중걸과 함께 서진 세조 무황제 [[사마염]]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298년에 동해왕 [[사마월]]의 권세를 등에 업고 낙랑군을 감찰하러 갔다가 그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을 점령했으며, [[팔왕의 난]]을 조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각주] [[분류:서진의 인물]][[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중국계 한국인]][[분류:청하 최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