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명하 (문서 편집)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0313f 0%, #b0313f 20%, #b0313f 80%, #b0313f)" '''{{{#white {{{+1 최명하}}}[br][ruby(武山隆, ruby=たけやま たかし)] | 다케야마 다카시}}}'''}}}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명하.jpg|width=100%]][br]{{{-2 [[야스쿠니 신사]] 유취관(우슈칸)에 전시된 사진.}}}}}} || ||<|2> {{{#ffffff '''이름'''}}} ||<(> 최명하 (崔鳴夏)|| ||<(> 다케야마 다카시 ([ruby(武, ruby=たけ)][ruby(山, ruby=やま)][ruby(隆, ruby=たかし)]) || ||<|2> {{{#ffffff '''출생'''}}} ||<(> [[1918년]] [[3월 6일]] || ||<(>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br](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2> {{{#ffffff '''사망'''}}} ||<(> [[1942년]] [[1월 20일]](23세) ||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28]] [[네덜란드령 동인도]] [[수마트라]] 섬 페칸바루 || || {{{#ffffff '''학력'''}}} ||<(> [[대구중학교]][br][[일본육군사관학교]][br][[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 || {{{#ffffff '''수훈'''}}} ||<(> 공4급 금치훈장[br]훈6등 욱일장 || || {{{#ffffff '''계급'''}}} ||<(> 대위(사후 추서) || ||<|2> {{{#ffffff '''복무'''}}} ||[[일본제국 육군]] || ||<(> [[1939년]] [[11월 1일]] ~ [[1942년]] [[1월 21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 육군]]의 [[조종사|항공장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남방작전]] 당시 전사했다. == 생애 == [[1918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조선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 3월, [[대구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예과과정을 마쳤고 1939년 9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 육사를 제52기로 졸업했다. == 참전과 최후 == 1939년 11월 최명하는 [[일본군 육군]]의 항공 소위로 임관해 소만(蘇滿, [[소비에트 연방]]과 [[만주국]]) 국경일대에서 경비 업무를 담당했고, 1940년에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화민국의 화남(華南) 방면을 공격하는 데 참전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최명하는 가토 다테오(加藤建夫) 중좌가 이끌고 있던 일본 육군 비행 제 64전대[* 개전 초부터 항복하는 날까지 지상레이더와 숙련된 조종사를 앞세워 영국 및 미국의 신예기와 끈질기게 맞서싸운 부대로,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라 일컫던 부대이다.]에서 중위로 복무하며 부대장기 엄호, 정보 수집등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1941년 12월에는 영국령 [[인도제국]][* 현재의 [[미얀마]]]의 랑군과 영국령 [[해협식민지]][* 현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페낭]]을 폭격했다.[* 당시 태평양전쟁 개전과 함께 참전한 조선인 항공장교는 최명하 외에도 두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중 한명인 노태순은 [[일본령 말라야]]에서 전사하였고, 다른 한 사람인 '''[[김정렬(1917)|김정렬]]'''은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장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이듬해인 1942년 1월 17일 최명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마트라]] 섬 [[팔렘방]] 비행장을 공습하던 중 대지공격을 위해 고도를 낮춘게 화근이 되어 [[네덜란드군]]의 대공포화에 휘말렸다. 최명하는 자신이 탑승한 [[Ki-43 하야부사]] 전투기의 후방에서 [[대공포]]탄이 폭발해 엔진이 손상을 입자 인근 페칸바루의 호수까지 비행해 항공기를 불시착시켰고, 조종석에 항공유를 뿌리고 지도에 불을 붙여 비행기를 소각시키는 데에는 성공 했으나, 연기를 본 주민의 신고를 받고 [[네덜란드]] 경찰이 출동하자 1월 20일 자기를 치료해주던 [[수마트라]] 섬 원주민의 집에서 네덜란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남은 권총탄 한발을 자신에게 쏴 권총[[자살]]했다. [[일본 제국]] 군부는 최명하를 일계급 특진시켜 육군 대위로 추증하였으며 수훈(殊勳) 갑(甲), 공4급 금치훈장, 훈6등 욱일장을 추서하는 한편 여느 전사자들과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일본 군부와 [[조선총독부]]는 최명하의 죽음을,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조선인 청년의 업적으로 선전했는데, 이러한 일환으로 1943년에는 마찬가지로 친일 작곡가였던 [[https://ko.m.wikipedia.org/wiki/%EC%9E%84%EB%8F%99%ED%98%81_(%EC%9E%91%EA%B3%A1%EA%B0%80)|임동혁]](任東爀)[* 일본 이름은 도요하라 토오카쿠(豊原東爀). 해방 직후 실종되었다.]이 그의 행적을 기려 《다케야마 대위를 따라라(武山大尉を續け)》 라는 제목의 친일 가곡을 발표했으며 같은해 친일 극작가였던 [[송영(1903)|송영]](宋影)[* 일본 이름은 야마카와 미노루(山川實).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이 양반 [[친일]]-[[종북]]-[[월북]]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이 그의 행적을 다룬 극본 《창공》을 발표하는 등 전쟁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2009년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최명하의 행적을 감안해 그를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등재했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18년 출생]][[분류:1942년 사망]][[분류:자살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