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한일본공사관 (문서 편집) [[분류:한일관계]][[분류:조일관계]][[분류:일본의 외교]][[분류:외교공관]][[분류:관저]][[분류:중구(서울)]][[분류:서대문구]] [include(틀:다른 뜻1, other1=현재 대한민국 내 일본의 외교공관, rd1=주한일본대사관)] [include(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include(틀:한일관계)] ---- ||<-3> [[파일:대한제국 국장.svg|width=28]] '''[[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ffd800 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3> [[파일:일본 황실.svg|width=9%]] [br] {{{+1 {{{#b0313f,#ce4e5c '''주한일본공사관'''}}}}}}'''[br]'''{{{#b0313f,#ce4e5c '''[ruby(駐韓, ruby=ちゅうかん)][ruby(日本公使館, ruby=にっぽんこうしかん)]'''}}} || ||<-2><#fff,#12121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100%]]}}} ||<#fff,#12121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 황실.svg|width=40%]]}}} || ||<-2><#fff,#1F2023> {{{#b0313f,#ce4e5c '''국기'''}}} ||<#fff,#1F2023> {{{#b0313f,#ce4e5c '''국장'''}}}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통감관저 터, 너비=100%, 높이=100%)]}}} || || '''위치''' ||<-2>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퇴계로(서울)|퇴계로]]26가길 6''' || || '''상급기관''' ||<-2> '''[[일본 제국]] [[일본 외무성|외무성]]''' || || '''공사관 설치''' ||<-2> '''1880년''' || || '''공사관 폐쇄''' ||<-2> '''190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과 [[중구(서울)|중구]] 예장동에 있었던 [[일본 제국]]의 옛 [[공사관]]이다. == 역사 ==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일본 제국|일제]]는 4년 뒤인 1879년(고종 16년)에 조선에 공사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부사 요시모토|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대리공사로 임명한 뒤 조선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인은 [[한성부|한성]] [[사대문안]]에서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부사는 [[돈의문]] 밖 [[천연동]]에 있는 경기중군영을 공사관으로 삼고 그곳에 입주했다. 경기중군영은 조선 후기 경기도 순영의 지휘관인 중군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에서 맑고(淸) 차가운 물(水)이 솟아난다 하여 '청수관(淸水館)'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군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했다.] >반접관 홍우창이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A 《고종실록》 번역판에는 '요시'''타다''''로 적혀있으나 '요시'''모토''''가 맞다.]가 청수관에 들어왔다고 보고하다 >---- >반접관(伴接官) 홍우창(洪祐昌)이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A]와 수행원 15인, 호위병 15명, 종자(從者) 4명이 오늘 신시(申時)에 관소(館所) 청수관(淸水館)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 >《[[고종실록]]》 16권, 고종 16년([[1879년]] 4월 24일(정묘)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1604024_001|#]] 1년 뒤인 1880년(고종 17년) 11월에 하나부사가 정식 공사로 임명받으면서 청수관은 정식으로 공사관이 되었다. 이는 조선이 외국과 근대식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 처음 생긴 외교공관이었다. >일본 판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A]와 수원들이 청수관에 들어오다 >---- >반접관(伴接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A]와 수원(隨員) 4인(人), 함장(艦長) 1인, 전어관(傳語官) 2인, 호위병(護衛兵) 22명, 순사(巡査) 10명, 종자(從者) 2명이 오늘 술시(戌時) 경에 청수관(淸水館)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1880년]] 11월 16일(경진)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11016_00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 공사관 습격.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오군란 직후 청수관.png|width=100%]]}}} || || {{{#b0313f,#ce4e5c '''임오군란 때 습격받는 일본공사관'''}}} || {{{#b0313f,#ce4e5c '''불탄 일본공사관'''}}} || 1882년(고종 19년)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구식 군인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공사관 직원 3명이 살해당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하나부사]]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인천광역시|인천]]으로 도주했다. 이때 공사관 건물도 불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교동 일본공사관.png|width=100%]]}}} || || {{{#b0313f,#ce4e5c '''교동 일본공사관'''}}} || 청수관이 불탄 후 일본공사관 측은 교동[*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관훈동 일대.]에 새 공사관을 짓기로 하고, 1882년(고종 19년) 8월부터 [[남산(서울)|남산]] 밑, 지금의 예장동에 있는 이종승(李鐘承)의 집을 임시로 빌려 입주했다. 1년 8개월 뒤인 1884년(고종 21년)에는 교동에 있는 [[박영효]]의 집으로 옮겨 새로 짓는 공사관의 완성된 건물과 함께 사용했다. 새 공사관은 그해 11월 [[천황탄생일|천장절]]에 맞춰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1달 뒤에 [[갑신정변]]으로 다시 불타 사라졌다.[* 한때 민중들의 방화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본공사관에서 문서를 소각하다 불이 옮겨붙었다는 학설이 타당성을 얻고 있다.] 다시 갈 곳이 없어진 일본 공사관은 1885년(고종 22년) 1월 3일부터 전 경기감사 [[김보현(1826)|김보현]]의 집과 [[선화당|경기감영 선화당]]에 잠시 머물렀다. [[일본 제국|일제]]는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및 피해 보상을 위해 [[조선]]과 《[[한성조약]]》을 체결했고, 그 중 4조에 의거해 공사관 부지 및 건축비를 조선 측에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1885년(고종 22년) 1월 12일에 예장동으로 옮겼고 서양식 공관 공사를 시작했다. 그해부터 일본인들의 한성 거주가 허용되자 일본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살았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곳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건축)|성]]을 쌓았던 곳이라 하여 '왜성대(倭城臺)' 혹은 '왜장대(倭將臺)'라 불렀다. 그리고 이 왜성대 일본공사관은 [[일본 제국|일제]]의 조선 침략 핵심 기지가 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는 서양식 공관을 완공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109921_40138_1822.jpg|width=100%]]}}} || || {{{#b0313f,#ce4e5c '''남산에 있었던 일본공사관 건물. 한국통감부 설치 이후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는 [[을사조약|을사늑약]]을 강제 체결시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공사관은 한동안 유지되었다가 이듬해인 1906년(광무 10년) 2월에 [[한국통감부]]의 신설로 폐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통감부]] 문서 참조. 구 일본공사관 건물은 통감관저로 바뀌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에 이른바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을 이곳에서 체결했다. 일주일 뒤인 8월 29일에 공식 발표를 하면서 조선왕조는 518년 역사를 끝으로 멸망했고, 조선은 1945년 8월 15일까지 34년 11개월 16일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개편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탄압하는 식민통치기관으로 기능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문서 참조. [[8.15 광복]] 후 20년 뒤인 1965년에 [[대한민국|대한민국]]과 [[일본]]은 [[한일관계|외교관계]]를 재개했으며, 일본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주한일본대사관]] 문서 참조. === 일제강점기 이후 건물 및 터의 역사 === ==== 청수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향상회관.png|width=100%]]}}} || || {{{#b0313f,#ce4e5c '''일제강점기 청수관 자리에 들어선 향상회관[*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D&arcvGroupNo=2901&arcvMetaSeq=26010&arcvNo=75596#layer_exhibit|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 첫 일본공사관이었던 청수관은 [[임오군란]] 때 불탄 후 한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일제강점기]]에 '향상회관(向上會館)'이란 건물이 들어섰다. 향상회관은 [[일본]] [[불교]] 종파 중 하나인 정토진종 대곡파가 세운 것으로,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미화하고 추진하는 장소로 쓰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청수관 터.png|width=100%]]}}} || || {{{#b0313f,#ce4e5c '''현재 청수관 터[* [[https://map.naver.com/v5/search/%EC%A2%85%EB%A1%9C%EA%B5%AC/address/14135219.198063333,4519352.545785977,%EC%84%9C%EC%9A%B8%ED%8A%B9%EB%B3%84%EC%8B%9C%20%EC%A2%85%EB%A1%9C%EA%B5%AC,adm?c=14133397.7440272,4518674.7248419,17,0,0,2,dh|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 [[8.15 광복]] 이후에는 동명재단에서 인수했고, 그 자리에는 동명여자중학교가 들어섰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6%A5%EC%83%81%ED%9A%8C%EA%B4%80(%E5%90%91%E4%B8%8A%E6%9C%83%E9%A4%A8)|#]] ==== 구 통감관저 ====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룻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나아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 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 >1940년 11월 22일 《[[매일신보]]》 기사. 통감관저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1946년 4월에는 국립민족박물관이 들어섰고, 1950년에 국립민족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되면서 남산 분관으로 쓰였다. 1954년 6월에는 신설된 연합참모본부가 입주했고 국립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갔다. >정부는 시내 중구 예장동에 있는 '연합참모본부 건물'을 개수 내지 증축해서 국무총리 관저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되어 있는바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합병조인을 하였던 구관은 건물이 낡았기 때문에 허물어 버리고 신관만을 개수 또는 증축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 >1960년 9월 22일 《동아일보》 기사.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통감관저를 국무총리 관저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져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후 이 일대는 완전히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었고, 구 통감관저 건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10820017301782_thumb_400.jpg|width=100%]]}}} || || {{{#b0313f,#ce4e5c '''통감관저 알림 표석'''}}} || 건물은 현재 헐려 사라진 상태이며 언제 헐렸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한동안 이 자리는 그냥 빈 터로 남았으며 통감관저 터임을 알리는 그 어떤 구조물도 없었다. 그러다 2003년 경부터 근현대문화재 전문가 이순우가 각종 자료를 뒤지며 3년간 추적하고 고증한 끝에 2005년에야 거의 망각에 빠진 통감관저 터를 찾아냈다. 그후 이순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경술국치가 시작된 '통감관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고자 노력했지만, [[서울특별시]]와 [[중구(서울)|중구청]]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했다가 2010년 8월 29일에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표석을 세울 수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NxqjCrvNms)]}}} || || {{{#b0313f,#ce4e5c '''서울특별시에서 제작한 〈경술국치 106주년, 남산 통감관저터에 들어선 위안부 기억의 터〉 영상 '''}}} || 2016년 8월 2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통감관저 터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 피해기록, 일제 만행 기록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를 조성하여 개장했다. 대지의 눈[*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구조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란 문구가 상단에 있고, 그 옆에는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그림 〈끌려감〉이 조각되어 있다.], 세상의 배꼽[* 인위적으로 다듬은 큰 돌(배꼽을 형상화) 사방에 다듬지 않은 여러 돌들이 놓여있는 공간. 큰 돌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구절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총 4개 국어로 새겨져있다.]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기릴 수 있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0081701690001300_P2.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hani.co.kr/125073549412_20090821.jpg|width=100%]]}}} || || {{{#b0313f,#ce4e5c '''통감관저 앞에 있던 하야시 곤스케 동상'''}}} || {{{#b0313f,#ce4e5c '''잔디밭에 파묻힌 하야시 곤스케 동상 좌대의 판석'''}}} || 일제가 사용하던 시절 이곳에 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도 있었는데, [[8.15 광복]] 이후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이 2005년 8월 구 통감관저 터를 찾다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던 좌대에 쓰인 판석 몇 점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2010년에는 판석에 새긴 명문을 누군가가 훼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는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판석을 모아 야외에 거꾸로 세워서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http://world.kbs.co.kr/service/news_view.htm?lang=k&Seq_Code=245521|KBS 보도]] 좌대 위에 있던 동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역대 공사 (1880 ~ 1906) == || '''{{{#b0313f,#ce4e5c 이름}}}''' || {{{#b0313f,#ce4e5c '''임기 시작일'''}}} || '''{{{#b0313f,#ce4e5c 임기 종료일}}}''' || {{{#b0313f,#ce4e5c '''지위'''}}} || {{{#b0313f,#ce4e5c '''비고'''}}} || || [[하나부사 요시모토]] || 1880년 4월 17일 || 1882년 11월 6일 || 변리공사 || 1877년 ~ 1880년[br]조선차견 · 외무대서기관 겸 대리공사 || || [[다케조에 신이치로]] || 1882년 11월 6일 || 1887년 8월 6일 || 변리공사 || || || 곤도 마스키 || 1887년 8월 6일 || 1890년 12월 17일 || 대리공사 || || || 가와키타 도시스케 || 1890년 12월 17일 || 1891년 3월 10일 || 대리공사 || 재임 중 사망 || || 가지야마 데이스케 || 1891년 3월 24일 || 1892년 12월 16일 || 변리공사 || || || 오오이시 마사미 || 1892년 12월 16일 || 1893년 7월 26일 || 변리공사 || || || [[오토리 게이스케]] || 1893년 7월 26일 || 1894년 10월 15일 || 특명전권공사 || || || [[이노우에 가오루]] || 1894년 10월 15일 || 1895년 8월 17일 || 특명전권공사 || || || [[미우라 고로]] || 1895년 8월 17일 || 1895년 10월 17일 || 특명전권공사 || [[을미사변]] 원흉 || ||<|2> 고무라 주타로 || 1895년 10월 17일 || 1896년 4월 8일 || 변리공사 || || || 1896년 4월 8일 || 1896년 6월 11일 || 특명전권공사 || || || 하라 타카시 || 1896년 6월 11일 || 1897년 2월 23일 || 특명전권공사 || || ||<|2> 가토 마스오 || 1897년 2월 23일 || 1898년 11월 29일 || 변리공사 || 마지막 주조선일본공사[br]첫 주한일본공사 || || 1898년 11월 29일 || 1899년 6월 1일 || 특명전권공사 || || || [[하야시 곤스케]] || 1899년 6월 1일 || 1906년 1월 31일 || 특명전권공사 || 최장 재임[br]마지막 주한일본공사 ||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하야시 곤스케, version=42, title2=남산(서울), version2=286, paragraph2=4.9, title3=갑신정변, version3=644, paragraph3=4.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