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묘 (문서 편집) [include(틀:관련 문서, top1=종묘제례)]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중국을 비롯한 넓은 범위의 종묘사직, rd1=칠묘)] [include(틀: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종묘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의 국가제례시설)] ---- [include(틀:대한제국의 국가제례시설)] ---- [include(틀:종묘 배향공신)] ---- }}} || ---- ||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5호}}}]]''' || ||<-2> {{{#fff {{{+1 '''종묘'''}}}[br]{{{-1 宗廟 | Jongmyo Shrine}}}}}} || ||<-2>{{{#!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종로 종묘, 높이=200, 너비=100%)]}}} ||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1-2]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사우 || || '''{{{#fff 면적}}}''' || 200,545㎡ || || '''{{{#fff 지정연도}}}''' || [[1963년]] [[1월 18일]] || || '''{{{#fff 건축시기}}}''' || [[조선]] [[태조(조선)|태조]] 4년([[1396년]]) || || '''{{{#fff 링크}}}''' || [[https://jm.cha.go.kr/|공식 홈페이지]] | [include(틀:트위터 로고, 링크=LoveJONGMYO, 크기=22)] || ---- ||<-2>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28]] '''[[세계유산#s-2.1|{{{#000,#fff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2> {{{#fff {{{+1 '''종묘'''}}}[br]{{{-1 Jongmyo Shrine[br]Sanctuaire de Jongmyo}}}}}} || || '''국가·위치''' ||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738|738]] || || '''등재연도''' || [[1995년]] || || '''등재기준''' ||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jongmyopicturesmall.jpg|width=100%]]}}} || || {{{#gold '''조선왕조의 종묘 정전(宗廟 正殿) 전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jm.cha.go.kr/jm01_01_01_01.gif|width=100%]]}}} || || {{{#gold '''종묘 안내도'''}}} || [목차] [clearfix] == 개요 == {{{+3 '''[[宗]][[廟]]'''}}}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법정동 전체가 종묘와 종묘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종묘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종로3가역]] 3호선 출구는 [[종로구]] 묘동 소재인데, 정작 종묘는 묘동 소재가 아니다.]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조선/왕사|역대 왕]]과 [[조선/역대 왕비|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면적은 186,786 ㎡.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조선]]의 종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정전_2007년_촬영(출처___문화재청_대변인실).jpg|width=100%]]}}} || || {{{#gold '''조선왕조의 종묘'''}}}[br]{{{-1 {{{#white 출처: 문화재청[[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11111022700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PQWUK5tGiw)]}}} || || {{{#gold '''EBS에서 제작한〈문화유산 코리아 - 조선왕도 갈 수 없는 길? 종묘〉 영상'''}}} || === 역사 === ==== 창건과 정립 ==== '''1. [[태조(조선)|태조]]''' 새 왕조의 태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 교서 제 1항이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었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7028_003|태조 실록의 즉위 교서]]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전조(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이는 옛 제도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새 왕조의 종묘사직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태조는 처음부터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자,[*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8013_002|태조 1년 8월 13일]]][*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9003_001|태조 1년 9월 3일]]] 태조는 개경 내에서(당시 종묘는 성 밖에 있었다.) 새로운 입지를 찾아 지으려 하였다. 이마저도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자[*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09030_001|태조 1년 9월 30일]]] 결국 기존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110013_003|태조 1년 10월 13일]]]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 이 "대실"(태실 - 영인본에는 "대"인바, 해당 편집자는 이를 "태"로 수정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주를 모시는 곳은 "석실"로서 이는 실록에는 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처음에는 5인용이었다.],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aa_10409029_006|태조 4년 9월]]][* 왕위를 미리 예상했는지 정도전이 24칸으로 정전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성계가 더 늘려 달라고 졸라서 반 칸을 더 늘려 24칸 반으로 제일 처음부터 지었다는 설이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까지는 사실 마냥 매우 유명했다.] 제도적으로는 5묘(시조묘 + 당대 군주의 4대조)였으며, 고려 종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당이실(同堂異室)[* 후한 명제(明帝) 이후 보급된 양식, 단일 건물에 신위를 모아 모시되, 각 신위는 분리된 방(신실)에 모시는 것], 서상(西上)[*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음, 원래는 소목제(昭穆制) - 시조 신위를 중앙에, 2대/4대를 소위(昭位), 1대/3대를 목위(穆位)로 좌우로 나누어 배열] 제도를 취했다. 이 때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 태종 11년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격상[[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104022_001|태종 11년 4월 22일]]]을 모셨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ba_10106027_004|정종 1년 6월 27일]]][* [[https://sillok.history.go.kr/id/kba_10202002_004|예시1]][[https://sillok.history.go.kr/id/kba_10203015_003|예시2]]] 이러한 상황은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2. [[태종(조선)|태종]]''' 태종은 조선 종묘의 건축적 특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 제도가 아닙니다. 후일(後日)에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 태종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또한, 공신당이 비루하다 하여 크게 수리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005013_004|태종 10년 5월 13일]]] '''3. [[세종(조선)|세종]]''' 세종은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확정하는 등 제도 상 주요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위 초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조선)|세종]] 2년(1419년)에 [[정종(조선)|정종]](당시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이 당시에는 아직 태종이 생존한 상태였다.]이 되자, 예조에서 조사한 결과 (1) 목조를 시조묘로 삼고, 익조의 신위를 협실(夾室)에 옮길 것 (송나라 신종[神宗]의 예) (2) 별묘를 지어 태조 4대조의 신위를 하나씩 이안(移安: 신위를 옮김)할 것 (당나라 덕종[德宗], 송나라 영종[寧宗]의 예) (3) 별묘를 짓지 않고 매안(埋安: 땅에 신위를 묻음)할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원칙)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04026_004|세종 3년 4월 26일]]], 대신들의 최종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이 (송나라 영종의 예를 따른) 의견이 모이자 세종은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1) 조선의 시조묘는 태조이다. (2) 태조의 4대조는 별묘(영녕전永寧殿)에 모신다. 이로써 조선 종묘 제도의 중요한 원칙이 확립되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07018_001|세종 3년 7월 18일]]]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0009_002|세종 3년 10월 9일]]]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312016_003|세종 3년 12월 16일]]]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조선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 증축과 중건 ==== '''4. [[연산군]]''' 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wiki style="text-align: center" ['''태조|'''태종'''|'''세종'''|'''문종|세조'''|'''덕종|예종]}}}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 추존된 왕]·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5세는 세대 별로 셈한다.]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ja_10110002_001|연산군 1년 10월 2일]]]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wiki style="text-align: center"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5. [[명종(조선)|명종]]'''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wiki style="text-align: center" ['''태조|태종|세종|'''세조'''|'''덕종|예종'''|'''성종]}}}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 [[https://sillok.history.go.kr/id/kma_10104008_004|명종 1년 4월 8일]]]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조선)|선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비명횡사로 급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 지금의 서울 남산 혹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부근]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써,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2014_002|선조 40년 2월 14일]]]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2019_002|선조 40년 2월 19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3017_003|선조 40년 3월 17일]], 홍문관의 발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07_003|선조 40년 4월 7일]], 예조의 발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14_003|선조 40년 4월 14일]], 예조가 정리한 대신들의 의견][*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17_002|선조 40년 4월 17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22_004|선조 40년 4월 22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4026_003|선조 40년 4월 26일]]] (1)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 5묘의 경우 시조·2소(2,4대)·2목(1,3대)]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 시조가 중앙에, 소(昭)는 좌편에, 목(穆)은 우편에 차례로 배열됨]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2)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3)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선조 40년 4월 26일)]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조선)|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년|1726]])에 4칸을, [[헌종(조선)|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조선)|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조선)|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 정전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width=100%]]}}} || || {{{#gold '''1909년 종묘 정전[*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했다.]'''}}} || '''7. 고종'''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시점에는 정말 우연히도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실에 [[영친왕|의민태자]]와 [[이방자|자행비]]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감실이 정확히 딱 채워져서 감실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친왕]] 내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위를 추가할 일도 없기 때문에 마치 딱 맞춘 것처럼 일이 된 것. {{{#!wiki style="text-align: center" ['''태조|태종|세종|세조|성종|중종|선조|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 현재 조선의 종묘는 형식적으로는 태조 + 순조~순종의 7묘제를 따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천위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나머지 신위 또한 영녕전에 따로 모시므로, 매안(埋安)되는 신위 없이 전부 종묘에 그대로 모시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조선)|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의경세자|덕종]], [[정원군|원종]],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문조]] 등 [[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 일제강점기 ====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통하려 했다. 그러나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그것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바로 착공하고 완공시켜버렸다. 이 도로가 바로 지금의 '''[[율곡로(서울)|율곡로]]'''.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콘크리트 육교로 연결되었는데, 2011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이 구간을 복원하면서 육교를 철거했다. 이때 끊어져 버린 구간이 다시 이어지는 데까지는 '''90년이나''' 걸렸다. [[조선총독부]]에서 종묘 담장에 새긴 '쇼와 8년 3월 개축'[* 1933년]이라는 문구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154506|#]]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0828788?view_best=1|#]] 이후, 안내판을 붙인채 존치하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모든 문구 위치에 붙은 것은 아니라 이후 국감에서 다시 문제제기가 되었다. [[https://www.fnnews.com/news/202110051317020439|#]] ==== 대한민국 시기 ==== [[1985년]] 종묘광장공원(宗廟廣場公圓)이 조성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정리 사업이었다. 그리고 [[1991년]] 민자 유치로 종묘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임금이 종묘에 배향할 때 쓰던 우물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80899&cid=46656&categoryId=46656|어정]](御井)이 마르고 상당한 지하 유물이 멸실되었다. 당시 관점에는 비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쓰자는 목적이었겠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세계유산 종묘 권역에 주차장을 건설하거나 세계 유산인 태릉에 선수촌을 건설하는 것은 기겁할 노릇이다. [[2011년]] [[5월 3일]]부터 853억 원을 들여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율곡로를 지하화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기 시작했다.[[http://news.donga.com/3/all/20110503/36887987/1|#]] 2010년 10월 착공한 율곡로 구조개선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인 궁궐 담장 기초석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해 공사가 연기되어 2014년말 [[http://infra.seoul.go.kr/archives/11537|복원 완료 예정]]이었다. 그러나 설계, 공사 방식 변경으로 [[2020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종묘의 정문 바로 앞에는 [[1985년]]부터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탑골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어서 종묘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었다. 1985년 공원 조성 당시 부터 공연장인 국악정, 대형버스 주차장, 무료급식소 등의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데다가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들이 등장하면서 각종 소음과 고성방가, 무료급식소로 인해 꼬이는 노숙자들[* 종묘 성역화 사업 이전까지만해도 종묘도 은근히 노숙자들이 많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어떤 풍수관련 서적에서는 종묘에서 은근슬쩍 거지들이 꼬이는 이유가 조선시대 때 종묘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거지들이 종묘를 찾아와서 동냥한 풍경에서 연원하고, 그 원인이 종묘의 풍수특성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로 난장판이었다. 종묘가 일종의 성역인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을 정도. 결국 서울시가 2007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836990|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악정 및 매점, 자판기 등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시설을 일부 철거하고 광장 내부의 버스 주차장과 무료급식소를 외부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등의 불법 상행위를 단속했다. 이어서 성역화 사업으로 어도, 홍살문, 하마비, 어정, 피맛길, 순라길 등의 문화재를 원형 복원 예정이며 발굴 조사 중이다. 원래 계획은 2010년경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종묘 앞 발굴 조사에서 예상 이상으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29886|유물]]이 쏟아져 나와 2010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397359|발굴 조사 지역]]을 한 차례 확대하면서 2014년까지도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발굴로 종묘광장 정비사업은 2016년 12월까지 [[http://opengov.seoul.go.kr/sanction/4026075|계획]] 된 상태다. 2016년 3월 말 종묘전교 복원 및 제세동천 복원 및 녹지 정비를 완료한 종묘 서측 광장을 [[http://blog.daum.net/mt0047/755|개방]]했다. 이후 2016년 말까지 종묘 동측 광장을 신성림 조성 및 정비를 [[http://opengov.seoul.go.kr/sanction/7923263|진행]] 했다. 2020년 5월부터 종묘 정전이 30년 만에 보수공사를 가지면서, 2022년에 재개방을 할 예정이다.[[https://www.yna.co.kr/view/AKR20200221124800005?input=1195m|#]] 이번 공사는 2015년 안전 점검 당시에 일부에서 물이 새거나 파손이 된 부분이 많아서 전면 보수를 할 예정이다.[* 이 때, 정전 지붕의 기와를 [[숭례문]] 복원 때처럼 [[https://www.yna.co.kr/view/AKR20200223048200005?input=1195m|수제 기와로 교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정전의 기와들은 1990년대 수리할 당시 사용했던 공장제 기와로서 이번 수리의 배경이 된 셈.] 이 때문에 정전에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2021년]] [[6월 5일]]에 [[창덕궁]] 내 [[창덕궁 선원전|구 선원전]]으로 이전하는 이안식을 거행했다.[* 이번 이안식은 [[1870년]]([[고종(조선)|고종]] 7)에 이안한 지 151년만에 치르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당시에도 종묘의 수리 때문에 진행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701012_001|관련 사료 1]][[http://sillok.history.go.kr/id/kza_10703029_002|관련 사료 2]]] [[https://www.yna.co.kr/view/AKR20210604038900005?section=search|관련 기사 1]][[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240098_34936.html|관련 기사 2]] 2022년 7월 20일,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이 시작(2011년 5월)된 지 11년, 율곡로가 개통된 지 90년 만에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로 8천㎡ 가량 수풀을 덮어 끊어졌던 녹지 축을 잇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2일에 개방되었다. 새로 조성한 녹지공간엔 참나무와 소나무, 국수나무 등, 우리 고유의 나무를 심었으며 왕이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위로 길이 나 있어서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 사이에는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으며, 북신문 앞에서는 철담장 너머로 작게 창경궁이 내다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를 오가듯 창경궁과 종묘 사이도 바로 오갈 수 있도록 할 듯. 참고로 창경궁에 일제가 설치한 위락 시설을 철거하 이름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공사 완료하여 재 개방 된 이후, 율곡로가 아래 있고 다리로 연결 되었던 시절에도 종묘와 창경궁이 모두 개방된 시간에 한해서 어느 쪽에서든 자유롭게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통로 개방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일몰 전이었으므로, 그 이후엔 종묘 또는 창경궁 안에 더 물러 있을 수는 있었다. 통로(=육교)그냥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한 쪽에 철문은 있었다. 당시엔 상시 입장이었고, 입장료도 무료였다. === 건축 === ==== 정문 주변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3.jpg|width=100%]]}}} ||'''외대문(外大門)'''[br]종묘의 정문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며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어 있고 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 외대문은 전면 중앙에 난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노면이 높아져 땅속에 묻히고 한동안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었다. [[2009년]] 매몰된 외대문의 계단이 발굴되었다.[[http://issue.media.daum.net/0804_culturenews/view.html?issueid=3101&newsid=20090323181518647&p=yonhap|#]]지금은 외대문 주변을 전체적으로 낮춤으로써 외대문의 계단을 노출시켰고, 따라서 외대문으로 입장할 때엔 돌계단을 이용한다.[[http://blog.daum.net/mt0047/694|#]]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unggu.com/jongmyo2.jpg|width=100%]]}}} ||'''망묘루(望廟樓)'''[br]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향대청 문화재청.jpg|width=100%]]}}} ||'''향대청(香大廳)'''[br][[종묘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공민왕_신당 문화재청.jpg|width=100%]]}}}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br][[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모신 신당. 망묘루 동쪽에 있다. 하나의 종이에 두 위의 초상화를 같이 그려 놓았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종묘를 세울 때 명령을 내려 같이 세웠다고 한다. 신당 내부 왼쪽에는 공민왕이 그린 준마도(駿馬圖) 세 점도 같이 있다. [[http://younghwan12.tistory.com/1109|사진 링크]] || ===== 종묘 어정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55호 ||<|2> ← || '''56호''' ||<|2> → || 57호 || || [[이명(1496)#s-3|정간공 이명 묘역]] || '''종묘 어정''' || [[우암 송시열 집터]] ||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 어정.jpg|width=100%]]}}} ||'''어정(御井)'''[br]종묘 앞에 보존되어 있는 우물로, 왕들이 종묘를 참배하러 올 때 마셨던 우물이라 해서 어정이라 불린다. || ==== 어숙실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재궁 문화재청.jpg|width=100%]]}}} ||'''어숙실(御肅室)'''[br]왕이 [[종묘제례|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왕세자 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 ==== 정전 주변 ==== [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정전_전경(여름) 문화재청.jpg|width=100%]]}}} || ||<-2>'''정전(正殿)'''[br]대한민국의 국보 제227호이다.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태조(조선)|태조]]를 비롯하여 임금의 신주 19위, 왕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의 남쪽 중앙에는 혼과 향로를 모시는 신문(神門)이, 동쪽에는 [[종묘제례|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이, 서쪽에는 악공, 일무원, 종사원 등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있다. [br][br]정전의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동서 109m, 남북 69m의 넓은 월대를 조성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정전의 신실로 통하는 신로(神路)가 남북으로 나 있어 사묘 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낸다.[br][br]정전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단청도 최소화해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길이가 101 m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축으로는 가장 길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긴 편이다. 가장 큰 목조건축물이라고 할 때 '가장 큰'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의 후보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 신주로 모시는 임금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방이 증축되어서[* 증축하는 것도 큰 일이다보니 한 번에 하나씩 늘리지 않고 네 개씩 증축했다. 만약 [[대한제국]] 황실이 현재까지 존속했다면 건물이 더 길게 늘어났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길어졌는데, 건축물의 조성 방법 중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전의 기둥을 잘 보면 미묘하게 오래된 정도가 다르다. 서쪽이 오래된 것. 신위는 가운데에 태조를 모시고 좌우에 후대 임금을 소(昭)와 목(穆)으로 삼아 배치하는 소목 제도가 아니라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서쪽부터 태조 이하 후대 임금을 모셨다. [br][br]'정전'이라는 이름은 여러 채로 구성된 건물군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지만, 종묘의 정전은 특정한 이름 없이 그냥 '''정전'''이다. 종묘의 정전에는 현판이 없다.[* 종묘 정전 및 영녕전 그리고 기타 모든 종묘 내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br][br]여담이지만 굉장히 큰 건물이라 어지간한 전문가용 렌즈로도 '''정전의 전체 모습 촬영이 불가능하다.''' 건물 크기도 크기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거리가 내삼문까지로 한정되어서 그렇다. 위의 사진처럼 건물 전체가 나온 사진들은 따로 찍어서 현상하며 이은 것들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12.jpg|width=100%]]}}} ||'''칠사당(七祀堂)'''[br]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서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국행지신(國行之神, 도로를 주관하는 신), 공려지신(公厲之神,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 국문지신(國門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중류지신(中霤之神, 당실과 거처를 주관하는 신), 사조지신(司竈之神, 음식의 일을 주관하는 신), 사호지신(司戶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신), 사명지신(司命之神,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하는 신)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계절에 따라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신다. 이들 중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13.jpg|width=100%]]}}} ||'''공신당(功臣堂)'''[br]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자리한 정면 1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시간이 흐르면서 정전이 증축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신당 또한 증축된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시에 공로가 큰 신하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에 배향했는데, 제1대 [[태조(조선)|태조]]의 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조선)|조준]](趙浚)을 시작으로 제27대 [[순종(대한제국)|순종]]의 공신 효문공(孝文公) 서정순(徐正淳)까지 모두 제왕 19위에 공신 83위의 위패가 모셔졌다. 종묘의 공신당에 모셔지는 공신은 '배향공신'이라 해서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28종류 공신과 성격이 다르다.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선정한 건데, [[이완용]]이 순종 묘정에 배향된 적도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배향공신]] 문서 참조. 정전과는 달리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다. 태조의 4대조인 [[목조(조선)|목조]], [[익조(조선)|익조]], [[도조(조선)|도조]], [[환조(조선)|환조]]는 추존 임금이기 때문에 배향공신이 없는데, 영녕전에 모셔지는 후대 임금들이 공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조상에게 올리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공신당이 없다고 해도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임금의 배향공신까지 포함하여 총 92명을 종묘 배향공신으로 간주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eritage.go.kr/t01h02a000_m012a.jpg|width=100%]]}}} ||'''수복방(守僕房)'''[br]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지어진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 수복(守僕)이란 조선시대 종묘서(宗廟署)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단(壇), 능(陵), 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수복방이란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 수복방의 앞에는 제사 때 음식 차림을 하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16820034.jpg|width=100%]]}}} ||'''전사청(典祀廳)'''[br]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 부엌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주(神廚)라고도 부른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ㅁ자형 건물을 배치했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정전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검사하던 찬막단이 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 행각에는 온돌과 마루방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9.jpg|width=100%]]}}} ||'''제정(祭井)'''[br][[종묘제례|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明水)와 전사청에서 제수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 전사청 동쪽에 자리하며, 네 면을 담장으로 두르고 남쪽에 팔작지붕으로 된 일각문이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갑다고 한다. || ==== 악공청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21.jpg|width=100%]]}}} ||'''악공청(樂工廳)'''[br][[종묘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준비, 연습하고 대기하는 곳. 정전과 영녕전 바깥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있다.[* 그래서 종묘대제 때에는 악공청 기둥 사이에 막을 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 하게 한다. ]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현재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보다 규모가 작은 편. || ==== 영녕전 주변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종묘_영녕전 문화재청.jpg|width=100%]]}}} || ||<-2>'''영녕전(永寧殿)'''[br]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정전에서 옮겨진 제왕과 왕후, 그리고 추존된 제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別廟)로 정면 16칸, 측면 4칸의 건물.[br][br]영녕전(永寧殿)이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國以'''永寧''' 爰及苗裔(나라가 길이 평안하게 후손에게 물려지리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세종 3년(1421년)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조금 덜 중요한 임금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재위 중인 임금을 기준으로 5대 이전의 임금들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고, 그 중 공적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인정된 임금들만 '''예외적으로''' 정전에 계속 모셔두는 것이다. 영녕전에는 제왕의 신주 16위, 왕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br][br]영녕전의 부재 처리나 건물 규모는 정전보다 약간 작지만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정전과 비슷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jongmyo20.jpg|width=100%]]}}} ||'''제기고(祭器庫)'''[br]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영녕전 동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 신주 배치도 === 부묘일은 양력으로 환산. [[http://cafe.naver.com/booheong/139182|참고]]. [[배향공신]] 문서 참조. ==== 정전 ==== || 묘실 ||<-3> 인물 || 출생 || 사망 || 부묘 || ||<|4> '''1실''' || 제왕 ||<-2>[[이성계|태조]](太祖)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1335.10.27. ||1408.06.18. ||1410.08.26. || ||<|2> 왕후 ||<-2>승인순성[[신의왕후|신의고황후]](承仁順聖神懿高皇后) ||1337.09. ||1391.10.21. ||1410.08.26. || ||<-2>순원현경[[신덕왕후|신덕고황후]](順元顯敬神德高皇后) ||1356.07.12. ||1396.09.15. ||1669.10.25. || || 배향공신 ||<-5> 태조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조선)|조준]](趙浚) ||1346 ||1405.07.23. ||1410.08.12. || ||경무공(景武公) ||[[의안대군(이화)|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1340. ||1408.10.24. ||1410.08.26. || ||충경공(忠景公) ||영의정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 ||1351. ||1419.12.30. ||1421.12.03. || ||경무공(景武公) ||흥안군(興安君) [[이제(조선)|이제]](李濟) ||? ||1398.10.06. ||1421.12.03. || ||양렬공(襄烈公)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1331. ||1402.05.10. ||1410.08.26. || ||강무공(剛武公) ||의령군(宜寧君) [[남은]](南誾) ||1354. ||1398.10.06. ||1421.12.03. || ||충정공(忠靖公)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1347. ||1396.10.16. ||1410.08.26. ||}}}}}}}}} || ||<|3> '''2실''' || 제왕 ||<-2>[[태종(조선)|태종]](太宗)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1367.06.13. ||1422.05.30. ||1424.08.06. || || 왕후 ||<-2>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1365.07.29. ||1420.08.18. ||1424.08.06. || || 배향공신 ||<-5> 태종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1347. ||1416. || || ||충무공(忠武公)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 ||? ||1414. || || ||익경공(翼景公) ||우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鄭擢) ||1363. ||1423. || || ||양도공(襄度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이성계|태조]]의 조카이자 [[태종(조선)|태종]]의 사촌.] ||? ||1417. || || ||경절공(景節公) ||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 ||1362. ||1416. || ||}}}}}}}}} || ||<|3> '''3실''' || 제왕 ||<-2>[[세종대왕|세종]](世宗)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 ||1452.04.29. || || 왕후 ||<-2>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 || ||1452.04.29. || || 배향공신 ||<-5> 세종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익성공(翼成公) ||영의정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희(조선)|황희]](黃喜) ||1363. ||1452. || || ||정렬공(貞烈公) ||영중추부사 [[최윤덕]](崔潤德) ||1376. ||1445. || || ||문경공(文敬公) ||좌의정 [[허조]](許稠) ||1369. ||1439. || || ||문희공(文僖公) ||좌의정 신개(申槩) ||1374. ||1446. || || ||문정공(文靖公) ||이조판서 이수(李隨) ||1374. ||1430. || || ||강정공(剛靖公)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1394. ||1462. || || ||정효공(靖孝公)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 ||1396. ||1486. || ||}}}}}}}}} || ||<|3> '''4실''' || 제왕 ||<-2>[[세조(조선)|세조]](世祖)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 ||1471.01.06 || || 왕후 ||<-2>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 || ||1485.06.23. || || 배향공신 ||<-5> 세조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익평공(翼平公) ||좌의정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람]](權擥) ||1416. ||1465. || || ||양절공(襄節公)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1403. ||1456. || || ||충성공(忠成公)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1415. ||1487. || ||}}}}}}}}} || ||<|4> '''5실''' || 제왕 ||<-2>[[성종(조선)|성종]](成宗)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 || ||1497.03.14. || ||<|2> 왕후 ||<-2>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 || ||1497.03.14. || ||<-2>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 || ||1532.11.07. || || 배향공신 ||<-5> 성종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1417. ||1475. || || ||충정공(忠貞公) ||영의정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1402. ||1487. || || ||충정공(忠貞公) ||좌의정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응(洪應) ||1428. ||1492. || ||}}}}}}}}} || ||<|5> '''6실''' || 제왕 ||<-2>[[중종(조선)|중종]](中宗)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 || ||1547.02.02. || ||<|3> 왕후 ||<-2>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 || ||1739.06.11. || ||<-2>선소의숙[[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 || ||1547.02.02. || ||<-2>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 || ||1567.07.17. || || 배향공신 ||<-5> 중종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무열공(武烈公) ||영의정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박원종]](朴元宗) ||1467. ||1510. || || ||충정공(忠定公) ||영의정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1461. ||1513. || || ||문정공(文定公) ||영의정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유순정]](柳順汀) ||1459. ||1512. || || ||문익공(文翼公)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 ||1538. || ||}}}}}}}}} || ||<|4> '''7실''' || 제왕 ||<-2>[[선조(조선)|선조]](宣祖)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 ||1610.06.02. || ||<|2> 왕후 ||<-2>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 || ||1610.06.02. || ||<-2>소성정의명렬정숙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正肅光淑莊定仁穆王后) || || ||1634.10.01. || || 배향공신 ||<-5> 선조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충정공(忠正公)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1499. ||1572. || || ||문순공(文純公) ||좌찬성 [[이황]](李滉) ||1501. ||1570. || || ||문성공(文成公) ||우찬성 [[이율곡|이이]](李珥) ||1536. ||1584. || ||}}}}}}}}} || ||<|4> '''8실''' || 제왕 ||<-2>[[인조]](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 || ||1651.08.21. || ||<|2> 왕후 ||<-2>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 || ||1651.08.21. || ||<-2>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貞肅溫惠莊烈王后) || || ||1690.11.10. || || 배향공신 ||<-5> 인조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1547. ||1634. || || ||문정공(文貞公) ||영의정 신흠(申欽) ||1566. ||1628. || || ||문충공(文忠公) ||영의정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 ||1571. ||1648. || || ||충정공(忠定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1557. ||1633. || || ||충익공(忠翼公) ||영의정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 ||1575. ||1643. || || ||충정공(忠正公)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1581)|이서]](李曙)[* [[효령대군]]의 7대손.] ||1580. ||1637. || || ||정효공(貞孝公)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 ||1592. ||1656. || ||}}}}}}}}} || ||<|3> '''9실''' || 제왕 ||<-2>[[효종(조선)|효종]](孝宗)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欽川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 || ||1661.08.02. || || 왕후 ||<-2>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貞範敬烈明獻仁宣王后) || || ||1676.05.21. || || 배향공신 ||<-5> 효종의 배향공신[br]{{{#!wiki style="margin: 0px -11px" {{{-2 {{{#!folding [ 보이기 / 숨기기 ] || 시호 || 인물 || 출생 || 사망 || 배향 || ||문정공(文正公) ||좌의정 [[김상헌(조선)|김상헌]](金尙憲) ||1570. ||1652. ||1661.08.02. || ||문경공(文敬公) ||예조판서 [[김집]](金集) ||1574. ||1656. ||1661.08.02. || ||문정공(文正公) ||좌의정 [[송시열]](宋時烈) ||1607. ||1689. || || ||충경공(忠敬公)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 ||165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