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현식(독립운동가)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전라북도지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4A70B 0%, #64A70B 20%, #64A70B 80%, #64A70B)" '''[[전라북도지사|{{{#fff 제2대 전라북도지사}}}]][br]{{{#fff {{{+1 장현식}}}[br]張鉉植[* 본래는 張鉉'''{{{+1 軾}}}'''을 썼다. 1934년 11월 2일, 장현식의 소유였던 김제군 금구면 용복리 산39번지 임야 1정(町) 6700 (약 5,010평)을 삼림령 제1조 규정에 의거해 보안림에 편입한다는 [[http://db.history.go.kr/id/gb_1934_11_17_a23570_00030|1934년 11월 17일 조선총독부 관보 기사]]와 1937년 6월 7일, 1922년 9월 금구공립보통학교에 건축비 1000원을 기부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장을 수여받는다는 [[http://db.history.go.kr/id/gb_1937_06_21_a31290_00190|1937년 6월 21일 조선총독부 관보 기사]]에서 張鉉'''{{{+1 軾}}}'''으로 표기했다. 아마도 1937년 7월 이후에 '''{{{+1 軾}}}'''에서 '''植'''으로 개명한 듯하다.] | Chang Hyun-sik}}}'''}}}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현식2.jpg|width=100%]]}}} || ||<|2> '''출생''' ||[[1896년]] [[9월 17일]] || ||[[전라북도]] 금구군 서도면 상신리[br](現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50년]] [[10월 24일]] (향년 54세) || ||[[평양시]] || || '''묘소'''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렬사릉]] || ||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 금용(金用)계 금구(金溝)파 18세 현(鉉) 항렬. 인동 장씨 31세.] || || '''호''' ||일송(一松)·송제(松濟) || ||<|2> {{{#fff '''재임기간'''}}} ||제2대 전라북도지사 || ||[[1949년]] [[8월 17일]] ~ [[1949년]] [[12월 14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창씨명'''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50&evntdowngbn=Y&indpnId=00000261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45년 8월 13일 판결문]]을 보면 장현식(張鉉植)에서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로 [[창씨개명]]한 것이 확인된다.] || || '''학력''' ||[[와세다대학]] {{{-2 (중퇴)}}} || || '''경력''' ||대동신보 발간인[br]조선인산업대회 산업조사위원[br]조선어사전편찬회[br]한국민주당 발기인[br]제2대 전라북도지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관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84|장태수]](張泰秀, 1841. 12. 24 ~ 1910. 11. 27)는 장현식의 증조부 장관수(張觀秀, 1825. 12. 6 ~ 1877. 4. 17)의 사촌 동생인데, 장관수는 본래 장태수의 아버지 장한두(張漢斗, 1806. 3. 16 ~ 1883. 5. 23)[* 1858년(철종 9) 식년 [[생원|생원시]]에 2등 1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8_032979|입격했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가 출생 이후 큰아버지 장한방(張漢房, 1797. 12. 6 ~ 1858. 3. 8)에 입양된 것이므로, 장현식에게는 종증조부가 된다. == 생애 == 장현식은 1896년([[고종(대한제국)|고종]] 33) 9월 17일 전라북도 금구군 서도면 상신리(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에서 아버지 [[진사]] 장석규(張奭圭, 1874. 12. 1 ~ 1897. 12. 22)[*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75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380|입격했다]].]와 어머니 [[울산 김씨]](1874. 12. 7 ~ 1971. 12. 25)[* 김동수(金東洙)의 딸이다.] 사이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 [[호남]] 일대에서 만석꾼 집안으로 소문났던 행재공(杏齋公) 장석보(張錫輔, 1783. 1. 27 ~ 1844. 2. 11) 종가의 5대 종손으로, 증조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67_034441|장관수]](張觀秀, 1825. 12. 6 ~ 1877. 4. 17)와 조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0_034726|장영숙]](張榮肅, 1850. 12. 19 ~ 1882. 4. 6) 또한 각각 1867년(고종 4) 식년 진사시에 3등 33위, 1870년(고종 7) 식년 진사시에 2등 25위로 입격하는 등 유학자로서의 소양 및 학식을 갖췄다. 2살 되던 1897년 12월 22일,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읜 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주로 사숙을 다니며 한문 수학에만 열중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했고 그 해 11월 27일, 종증조부 장태수가 나라가 망한 울분에 24일간 단식하던 끝에 분사(憤死)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고 곧 상경하게 된다. 그는 상경한 후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거주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후 비밀결사인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48757&categoryId=46623|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단의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88&evntId=0034977244&evntdowngbn=Y&indpnId=000000927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30&evntId=0034970979&evntdowngbn=Y&indpnId=000000341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1년 3월 25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성수(1891)|김성수]](金性洙)가 경영하고 김성수의 생부 김경중(金暻中)과 백부이자 양부인 김기중(金祺中)이 경영하던 중앙학교가 [[조선총독부]]의 [[고등보통학교]] 인가로 [[중앙고등학교|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로 교명 개정이 이뤄지자, 4월 6일 박용희(朴容喜)와 함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설립자 겸 교주(校主)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21_04_06_v0003_0680|취임했다]]. 교주에 취임한 이후에는 학교 총 재정의 50%를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정읍군 [[태인면]](현 [[정읍시]] 신태인읍)에 있는 1000석의 규모의 농장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6/11/2002061170258.html|기증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3일에는 조선인산업대회(朝鮮人産業大會)에 참여하여 산업조사위원에 선출되어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7_03_0070|활동했다]]. 한편, 같은 해 김성수를 따라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종손으로서 집안을 지켜야한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1년이 채 되지 않아 중퇴하고 [[https://www.jeonbuk.go.kr/governor/index.jeonbuk?menuCd=DOM_000000705000000000|귀국했다]]. 1925년부터는 [[동아일보사]] 감사에 취임하여 [[http://db.history.go.kr/id/gb_1925_12_17_a39990_0350|활동했으며]], 1929년 10월 31일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자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참석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 창립에 [[http://db.history.go.kr/id/su_009_1929_10_31_1390|참여하기도 했다]]. 1935년 3월에는 [[보성전문학교]]가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겸하여 도서관·대강당·체육관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이때 이석구(李錫九)와 함께 5천원을 [[http://db.history.go.kr/id/npda_1935_03_02_x0002_1210|기부했다]]. 이때부터 그는 경기도 경성부 명륜정1정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6월 7일에는 특이하게 1922년 9월 금구공립보통학교에 건축비 1000원을 기부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장을 [[http://db.history.go.kr/id/gb_1937_06_21_a31290_00190|수여받기도 했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에는 한국어 보존을 위해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3천원을 제공했으며, 1940년 11월까지 지인 등에게 권유해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가 1943년 초 홍원경찰서에 [[http://db.history.go.kr/id/hdsr_008_0020_0060_0040|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뒤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판을 받고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13일에는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50&evntdowngbn=Y&indpnId=000002617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는 등]] 총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한편, 1941년 11월 1일 [[부민관]]에서 친일단체 임전대책협력회(臨戰對策協力會)에서 개최한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http://db.history.go.kr/id/ma_016_0870_0100|참석한 정황이 보이는데]], 이는 조선어학회에 가담하는 한편, 눈속임으로 참여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광복 후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에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8_0060|참여했으며]], 이튿날인 9일에는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고려청년당 창립준비회에 참석하여 고문에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9_0010|추대되었다]]. 1946년 8월 5일 한국민주당 서울시당부 임시집행위원회 부위원장에 [[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8_05_0140|선임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중앙집행위원에 [[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3_0040|보궐로 선임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한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뒤 1949년 8월 17일 제2대 [[전라북도지사]]에 [[https://www.jeonbuk.go.kr/index.jeonbuk?menuCd=DOM_000000106002007000|취임했으나]] 그해 12월 14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12180020920102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2-18&officeId=00020&pageNo=1&printNo=8120&publishType=00020|의원해임]](依願解任)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재차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송방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었고, 1950년 10월 24일 평양특별시(현 평양시)에서 사망했다. 최근 그의 묘소가 [[애국렬사릉]]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현식에게 1989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북 김제군 갑) || [include(틀:한국민주당)] || 8,380표 (20.06%) || 낙선 (3위) ||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김제군 갑) || [include(틀:무소속)] || 6,176표 (15.28%) || 낙선 (2위) || ||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납북자]][[분류:상장군계 인동 장씨]][[분류:김제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전라북도지사]][[분류:기자 출신 정치인]][[분류:이승만 정부/인사]][[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애국렬사릉 안장자]][[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