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식(전량)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전량 군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557 0%, #317589 20%, #317589 80%, #004557); color: #ece5b6" '''전량 2대 국왕[br]{{{+1 고조 명왕 | 高祖 明王}}}'''}}} || ||<|2> '''출생''' ||[[271년]] ||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 양주 [[간쑤성|안정군]] [[핑량시|오씨현]][br](現 [[간쑤성]] [[핑량시]]) || ||<|2> '''사망''' ||[[320년]] [[7월 25일]] (향년 50세) || ||[[서진]] [[간쑤성|양주]] 추정 || || '''능묘''' ||영릉(宁陵) || ||<|2> '''재위기간''' ||'''{{{#ece5b6 2대 국왕}}}''' || ||[[314년]] ~ [[320년]] [[6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장(성씨)|장(張)]] || || '''휘''' ||식(寔)) || || '''부모''' ||부친 [[장궤]][br]모친 불명 || ||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남 || || '''자녀''' ||외아들 [[장준(전량)|장준]] || || '''자''' ||안손(安遜) || || '''작호''' ||서평공(西平公) || || '''묘호''' ||'''[[고조]](高祖)''' || ||<|2> '''시호'''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 명왕(明王)[* 위왕(威王) [[장조(전량)|장조]](張祚)가 추존했다.] || ||'''[[서진]]:''' 원공(元公)[* [[진원제|동진 중종 원황제]] 사마예가 추존했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진과 동진의 인물. 자는 안손(安遜)이었다. 아버지인 [[장궤]]의 직책과 영지를 그대로 물려받아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 독립의 기반을 다졌으며''' 서진, 서진 멸망 후엔 동진과 끝까지 원만한 군신 관계를 유지했다. 그도 아버지 장궤와 같이 생전에 왕을 칭하거나 사마씨의 진나라로부터 독립하진 않았다. == 생애 == 젊었을 때 학식이 높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수재로 추천받아 낭중에 임명되었다. 307년에는 효기장군직을 사양하고 아버지 장궤가 다스리고 있는 양주(涼州)로 돌아가길 청하자 서진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양주에는 서평태수 조거, 농서내사 장월, 장진 등이 장궤를 죽이고 양주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는 일이 터졌다. 장진은 겁을 먹고 자신의 부하인 노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모든 것을 일러바치고 항복했다. 이에 장궤가 아들 장식에게 전봉독호 송배, 장수 윤원과 보•기 30,000명을 주어 조거를 토벌하게 하니, 조거는 잡혀 죽고 장월은 하북으로 도망쳤다. 서진 조정에서는 장식의 활약을 전해받고 그를 건무정후에 봉했다가, 이후 서중랑장에 임명했고 복록현후(福祿縣侯)에 봉했다. 314년 6월 19일, 장궤가 사망하자 장사 장새(張璽) 등의 무리들이 장식을 양주자사 대행으로 옹립했고, 장식은 서진 조정에 사람을 보내 정식으로 아버지의 직위를 승계하길 청했다. 이에 [[진민제]] 사마업은 장식을 지절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 영호강교위직에 임명하면서 서평공(西平公)에 봉했다. 양주를 장악한 장식은 간언을 독려하고,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기 전엔 항상 신하들과 의논하여 의견을 받았으며, 이주민 정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16년, [[유요(전조)|유요]]가 빙익군과 상군을 함락시키고 장안 부근에 접근했다. 장식이 장수 왕해(王該)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서진 조정을 돕게 하자 진민제는 장식을 도독섬서제군사로 삼았다. 그해(316), 진민제는 조서를 보내 장식을 대도독, 시중, 사공에 임명한 뒤, 장안의 포위를 버티지 못하고 유요에게 투항했다. 조서를 받은 장식은 민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알고 직위를 극구 사양했다. 318년에 채충을 강동으로 보내 직접 사마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319년, 사마보가 멋대로 진왕(晉王)을 칭한 뒤, 장식을 정서대장군으로 삼고 식읍 3,000호를 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320), 사마보는 상성(桑城)에서 유요에게 격파당하고 장식이 있는 양주로 도망치려 했으나, 사마보의 존재가 거슬렸던 장식은 장수 음감(陰監)을 보내 사마보를 맞이하는 척하며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마보가 도망치다가 자신의 부하인 장춘(張春)에게 피살되는 바람에 음감은 공중분해 되어버린 사마보 세력의 난민들만 거두고 양주로 귀환했다. 양주 천제산(天梯山)에는 유홍이라는 도인이 살고 있었는데 신묘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 장식의 측근들 중에도 유홍에게 심취한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유홍과 동향 사람인 염섭은 하늘이 자신에게 양주를 넘겨주는 꿈을 꿨다며 유홍에게 말했다. 유홍은 그의 말을 믿고 자신을 따르는 아문 조앙 등 장식의 측근 10여 명과 결탁하여 장식 암살 계획을 꾸몄으나 실행 당일에 장식의 동생 [[장무(전량)|장무]]에게 발각당했다. 장무는 즉시 아문장 사초(史初)를 보내 유홍을 체포하게 했지만 이미 조앙 등의 암살자들은 계획을 실행하러 출발한 뒤였다. 체포당한 유홍은 >"지금쯤 네 주군은 이미 죽었을텐데 날 죽여서 어쩌려는 거냐" 며 소리치다가 그 자리에서 사초에게 혀가 베이고 감옥에 갇혔다. 장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형 장식은 숨이 끊긴 뒤였다. 장무는 먼저 유홍을 [[거열형]]에 처하고 나머지 암살자들과 유홍의 신도 수백 명을 추적하여 잡아 죽였다. 장식의 아들 [[장준(전량)|장준]]은 나이가 13살에 불과했으므로 동생 장무가 뒤를 이어 양주를 다스렸다. 장식의 암살 소식을 전해들은 동진의 중종 원황제 [[원제(동진)|사마예]]는 슬퍼하며 그를 원공(元公)에 봉했고, 훗날 칭제한 위왕 [[장조(전량)|장조]][* 황제를 칭했지만 나중에 즉위한 [[장천석]]이 스스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면서 그를 왕으로 내려버렸다.]가 장식을 명왕(明王)으로 추존했다. == 둘러보기 == ||<-5><:><#317589> '''[[전량(오호십육국시대)#s-3|{{{#ffffff 전량의 역대 국왕}}}]]''' || ||<:> 초대 태조 무왕 [[장궤]] ||<:> {{{+1 ←}}} ||<:> '''2대 고조 명왕 장식''' ||<:> {{{+1 →}}} ||<:> 3대 태종 성왕 [[장무(전량)|장무]] || [include(틀:진서)] [[분류:서진의 인물]][[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271년 출생]][[분류:320년 사망]][[분류:추존된 왕]][[분류:암살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