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화 (문서 편집) [include(틀:국민훈장 무궁화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이화.jpg|width=100%]]}}} || || '''이름''' ||이이화(李離和) || || '''본관''' ||[[연안 이씨]][* 통례문부사공파 23세 화(和) 항렬.] || ||<|2> '''출생''' ||[[1937년]] [[8월 27일]] ||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구|달서면]] [[비산동(대구)|비산동]][br](現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비산동(대구)|비산동]]) || || '''사망''' ||[[2020년]] [[3월 18일]] (향년 82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 {{{-2 ([[졸업]])}}}[br][[서라벌예술대학]] {{{-2 ([[문예창작과]] / [[중퇴]])}}} || || '''경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br][[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br]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br] 고구려역사문화재단 상임공동대표[br]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br][[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목차] [clearfix] == 개요 ==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 > 2015년 4월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中 > 질문 :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뿐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습니까? > 대답 : "내가 <한국사 이야기>를 쓰면서 표방한 것이 세가지예요. '''[[민족주의|민족사]]''', '''[[민중사관|민중사]]''', '''[[생활|생활사]]'''를 쓰겠다고요. 침략적 우월적 민족주의 말고 '''외세 침탈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생존적 민족주의, 대다수 '''평범한 상놈과 종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민중사, 그리고 '''뭘 먹고 뭘 입고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놀이를 했는지''' 그 생활을 조명하는 생활사. 역사라는 게 [[조선/왕조|태정태세문단세]]… 그딴 거나 외우고 연도나 외우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왕들 이름 다 외워서 뭐할 거야? >---- >2015년 11월 , [[한겨레]]와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8436.html|인터뷰]] 中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은 헛소리예요.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6.25 동란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탄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하는 거예요.”''' >---- > 2017년 7월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中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 재야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며 100여 권의 대중 서적을 출판했다. 한국사를 대중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생전에 역사학계의 원로 대우를 받았다. 작품으로 22권의 분량을 자랑하는 <한국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본관은 [[연안 이씨|연안]](延安). == 일생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420&cid=59013&categoryId=59013|네이버캐스트에 인터뷰로 소개된 그의 일생]] 1937년 8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구|달서면]] [[비산동(대구)|비산동]](現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비산동(대구)|비산동]])[* [[달성공원]] 근처였다고 한다.]의 빈민촌에서 한학자였던 아버지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 ~ 1958)[* 본명은 이순영(李侚永). 한학자였으며 [[주역]] 연구로 유명하다.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의 [[연안 이씨]] 집성촌에서 출생.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ngyeok&logNo=14011261296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과 어머니 박순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7살 되던 1943년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으로 이주했으며,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대둔산]] 자락의 [[충청남도]] [[논산군]](現 [[논산시]])으로 이주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충청남도 [[서산군]] [[안면읍|안면면]](現 [[태안군]] [[안면읍]]) [[안면도]]로 피난했고, 이후 [[부여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이달은 이곳 부여군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한학자였기에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지 않고 [[한문]] 교육을 받고 자라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16살의 나이에 [[가출]]한다. 가출한 그는 고향인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와 [[부산시]](現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여수시]]의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시]](現 [[광주광역시]])로 올라와 입시 공부를 했고, 1955년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며 고학하던 끝에 광주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1년 만에 중퇴하고 만다. 대학을 중퇴한 이후 이이화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 떠돌아다녔다.[* 이 당시 그는 본적이 경상북도 [[김천군]]으로 되어 있었지만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은 터라 본의 아니게 [[병역기피]]자가 되어 버렸다. 또 당시에는 [[5.16 군사정변]]이 터지던 때라서 검문도 피해 다녀야 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본인에 따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기피자 신분이 풀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독서]]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비정규직|임시직]]으로 들어가게 되어서야 그는 옛날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천관우]]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본인 말로는 '''[[학사|학사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73년 동아일보를 나온 이이화는 「[[신동아]]」로 빠져나가 독립운동가 [[신규식]]의 [[평전]]을 썼고, 「[[창작과 비평]]」에서는 [[허균]]에 대한 글을,[* 이이화와 「창작과 비평」 간의 선은 시인 [[신경림]]이 놓아주었다고 한다.] 「[[뿌리깊은 나무(잡지)|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국사]] 내의 [[파벌]]에 대한 글을 각각 연재하였다. 1980년 뿌리깊은 나무에서 <허균의 생각> 초판을 연재하다가 [[신군부]]가 <허균의 생각>을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이이화의 말에 의하면 허균의 호민론이 신군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다. [[http://ch.yes24.com/Article/View/26598|#]] 이 외에도 한국사에 대한 여러 글을 잡지에 연재하였고,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現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설립한 [[고전번역교육원|국역연수원]](現 [[고전번역교육원]]) 연수부 1기에 입학해 수료한 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고전 번역을 담당했으며[*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있던 박병호(朴秉濠, 1931 ~ )가 고전 해제집을 내고자 이이화에게 직접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이화는 "출퇴근 시간을 따지지 말 것"과 "자기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박병호가 이를 수락하면서 규장각에 취직한다. 여기서 그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에게는 일종의 '''박사 과정'''이었다고 한다.][* 한편 여담으로 이 당시가 [[전두환 정권]]인지라 일 끝나면 동료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s-3|데모]]를 나가기도 했다고...]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이화 본인의 말에 따르면 별로 내켜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름도 이름인지라 직장 이름을 들으면 '정신병원(...)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단다.] 이런 그의 활동으로 몇몇 저작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상당한 양의 원고 청탁이 들어오며 이이화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집필 및 연구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1986년 임헌영, [[서중석]], [[박원순]] 등과 함께 역사 대중화를 지향하며 역사문제연구소를 조직했다. 거기서 그는 [[민중]]사와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으며,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조명과 기념/추모 사업을 벌였다. 1994년부터는 [[한국사]]를 '통사'로 엮겠다는 다짐으로 [[은둔]] 생활로 들어가 2004년까지 '''10년 동안 22권의 <한국사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이이화는 명실상부한 [[역사학자]]로 거듭났고, 많은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친일인명사전]] 집필, [[동학농민운동]] 명예회복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왕성히 활동했다. [[2020년]] [[3월 18일]] 향년 84세, 만 82세로 사망하였다. 이튿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저서 == 공저와 만화, 어린이 도서는 제외한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우리 겨레의 전통생활> (1991) * '''<허균의 생각>''' (1980, 1991, 2014)[* 초판이 1980년 출판되었으며 신군부가 금서로 지정한 이후 개정판이 여러번 출판되었다.] * <이야기 인물한국사(전 5권)> (1993) *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1993) *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1994) *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1994~2004) - '''이이화의 대표작'''으로서 2015년 표지가 바뀌어 다시 출판되었다. *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9권)> (1999) *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 (2000) * <역사 속의 한국불교> (2002) *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 (2004) * <한국의 파벌> (2004) * <한국사 나는 이렇게 본다> (2005) * <녹두장군 전봉준> (2006) * '''<역사>''' (2007) *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2008) * <이이화의 한문 공부> (2009) * '''<역사를 쓰다>''' (2009) - '''이이화의 [[자서전]]''' * <한국사 주요 사건으로 풀어낸 고사성어> (2013) * <전봉준, 혁명의 기록> (2014) * '''<이이화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2016) * <민란의 시대> (2017) *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전 3권)> (2020) == 기타 == * [[박근혜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당시 다른 역사학자들과 함께 '''"국정화는 절차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국정교과서]]를 크게 비판하였다. 또한 [[박근혜]]를 향해서도 '''역사에 대해 무식한 사람'''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 정치적 성향은 [[강만길]] 교수나 [[서중석]] 교수와 마찬가지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지지하며, [[극좌]] [[공산주의]]나 [[극우]] [[반공주의]]의 [[독재]]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는 [[동학농민운동]]같은 [[사회 운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깊은 학문적 관심, 연구 성과, 높은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편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있어 [[박근혜 퇴진 운동]]을 두고 크게 칭찬하기도 했다. *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위구르]], [[티베트]] 인권 탄압을 패권주의라고 지적하는 등 [[http://m.hani.co.kr/arti/society/schooling/465727.html#cb|#]] 균형잡힌 소신있는 발언으로 진보, 보수 학계 내외에서 모두 존경을 받는 학자이기도 했다. *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도 참여한만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굉장히 싫어한다. 2017년에는 대구 지역의 강연에서 [[박중양]], [[문명기]], [[장직상]] 등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저격하며 '''"자발적이든, 생계형이든 당시 반민특위법에 따르면 범죄행위였다. 시시비비를 가려 올바른 선례를 남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친일파를 활개 치게 했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미군정]]에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게다가 "친일 청산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역자가 다신 나와서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기" 위함인데 "'''친일을 이야기하면 [[종북몰이|빨갱이, 종북, 좌파라는 소리]]를 듣는다. 기가 찰 일'''"이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 [[환단고기]]와 [[환빠]]도 아주 싫어한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환단고기 이야기가 나오자 '''"[[불쏘시개|사서 읽지 마세요. 책값도 아까워!]]"'''라고 외치며 그 안에 얼마나 [[유사역사학|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있는지 아느냐고 말했다. * [[대구광역시]] 출신이기에 [[대경권|대구경북]] 지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 [[인민혁명당 사건]]과 [[대구 10.1 사건]]도 잘 아는 듯. * [[후백제]]왕 [[견훤]]의 이름에 대해 '진훤'이 맞다고 주장하며 그의 저서에서도 일관적으로 통설과 다른 진훤 표기를 고수한다. 이에 대해서는 [[견훤#s-14]] 문서 해당 단락 참조. 또한 [[강감찬]]에 대해서도 '강한찬'이 맞다고 주장하며 한국사 이야기 등 저작에서 강한찬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척준경]] 역시 탁준경으로 표기하는 편이다. 이외에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슬기 슬기 사람"으로 번역하는 등 일련의 학술적 고집(?)이 엿보이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 그가 역사만화인 고려편을 감수했을 때 고려말 왜구가 초기에는 살육에 관심 없었고 재물이나 식량을 강탈하는데 관심있다고 서술했는데 이 부분은 틀렸다, 초창기의 왜구도 야만적이고 무식하고 우악스러운 게 몽골군이나 홍건적 이상으로 잔혹했다. 재물약탈은 물론 살육과 강간은 여느 [[오랑캐]]나 다름 없었다.[* 원래 이 만화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 * 야사를 접목시켜 정사로 받아드리는 것이라서 그 시대의 한계이다. * 아들은 [[불청객(영화)]] 감독인 이응일이다. * 조선시대와 임금들을 혹평하는데 문제는 야사를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만한 사정이나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보지 않고 현대의 시각으로 본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이성계]]를 요동 정벌 시도조차 안해보고 [[위화도 회군]]했다고 비난한다던지... 사실 이외에도 재야사학자의 한계인지 [[나무위키]]의 [[조선]] 문서에서도 지적된 잘못된 정보들을 사실마냥 서술한 엉성한 실수들이 꽤 보이는데 가령 명나라에게 형식상 화령과 조선 중 국호를 정해달라한걸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던것이 그 예시이다.]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도 있는편이다.[* [[https://m.blog.naver.com/humans13/222108060837]]] [[분류:한국의 역사학자]][[분류:인문과학 교수]][[분류:1937년 출생]][[분류:2020년 사망]][[분류:서구(대구) 출신 인물]][[분류:연안 이씨]][[분류:광주고등학교(광주) 출신]][[분류:서원대학교 재직]][[분류:국민훈장 무궁화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