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웅(성한)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성한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14D00 0%, #CD7F32 20%, #CD7F32 80%, #914D00); color: #ece5b6" '''성한 초대 황제[br]{{{+1 태종 무황제 | 太宗 武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李雄.jpg|width=100%]]}}} || ||<|2> '''출생''' ||[[274년]] || ||[[서진]] [[톈수이시|약양]][br](現 [[간쑤성]] [[톈수이시]]) || ||<|2> '''사망''' ||[[334년]] [[8월 11일]] (향년 60세) || ||[[성한]] [[청두시|성도]][br](現 [[쓰촨성]] [[청두시]]) || || '''능묘''' ||안도릉(安都陵) || ||<|4> '''재위기간''' ||'''{{{#ece5b6 제3대 군주}}}''' || ||[[304년]] ~ [[306년]] || ||'''{{{#ece5b6 제3대 황제}}}''' || ||[[306년]] ~ [[334년]] [[8월 1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이(성씨)|이(李)]] || || '''휘''' ||웅(雄) || || '''부모''' ||부황 [[이특(성한)|시조]][br]모후 태황후(太皇后) 나씨(羅氏) || || '''형제자매''' ||3남 중 3남 || || '''배우자''' ||황후 임씨, 부인 염씨 || || '''자녀''' ||4남 || || '''신장''' ||197cm || || '''자''' ||중준(仲俊) || || '''작호''' ||성도왕(成都王) || || '''묘호''' ||'''[[태종]](太宗)''' || || '''시호''' ||무황제(武皇帝) || || '''연호''' ||[[건흥]](建興, [[304년]] ~ [[306년]])[br]안평(晏平, [[306년]] ~ [[310년]])[br]옥형(玉衡, [[311년]] ~ [[334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성한]]의 첫 번째 [[황제]]로 즉위한 3대 군주. 묘호는 태종이며 독자적인 세력 수준에서 성(成)[* 6대 군주인 소문제가 국호를 한(漢)으로 변경.]이란 국호를 선포하여 독립국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실질적으론 아버지 [[이특(성한)|이특]], 숙부 [[이류]]가 기반을 마련했기에 3대 군주로 나누어서 보기도 한다. 보통 [[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의 [[유연]]과 이웅의 활동시기를 오호십육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 생애 == === 계승 전 === 《진서》에서 이웅은 키가 [[http://61.157.227.58/Details/DZBWHDetail?dbCode=BWHYZYJ&&sysID=286|8척 3촌]][*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197cm가 나온다.]에 크고 용모가 준수했다고 전한다. 강렬한 인상으로 고향에서 이름을 떨쳤고 식견 있는 선비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유화(劉化)라는 도사가 어린 이웅의 모습을 보고 "훗날 관농의 선비들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게 될 진데, 이씨 집안의 아들 중 중준(仲俊)만이 풍채가 비범하여 그들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후 제만년의 난을 피해 촉 땅으로 이동한 이웅은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아버지 [[이특(성한)|이특]]과 숙부 [[이류]] 밑에서 전장군에 임명되어 그들을 보좌했다. 303년, 아버지 이특과 숙부 이보, 이원이 [[나상]]에게 죽었고, 사실상 큰형 노릇을 하던 이탕도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덧나 사망했다. 이특, 이탕 부자가 전사한 마당에 [[서진|서진(西晉)]]의 형주군이 덕양을 점령하니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이특의 뒤를 이은 숙부 이류는 진나라가 두려워 매제 이함의 투항 권유를 따르기로 하고, 5월에 인질들을 보내 투항하기로 했다. 이웅은 결연히 반대하며 재동태수 이리와 함께 형주군의 선봉인 손부를 패퇴시키는 공을 세웠다. 때마침 토벌군의 사령관인 종대마저 병사하여 형주군은 퇴각하였다. 이 전투 이후 이류는 이웅에게 병권을 주었고, 6월에 이웅은 성도 인근 비성을 점령하여 성도성을 압박했다. === 익주목 계승 === 동년 9월 숙부 이류가 병사하자 이류의 유언과 제장들의 막강한 지지를 받아 3대 익주목으로 즉위했다. 이웅은 성도에 틀어박힌 나상을 유인해 격파할 생각으로 박태(朴泰)를 거짓으로 항복시킨 뒤, 숙부 이양에게 군사를 주어 비성 밖에 매복시켰다. 박태는 서신으로 나상에게 항복하며 비성을 습격하면 자신이 횃불을 들어 내응하겠노라 청했다. 이에 나상이 외백을 보내니, 박태는 긴 사다리를 성벽에 드리우고 횃불을 들어 신호했다. 횃불을 본 외백군이 성벽에 접근해 사다리를 타기 시작할 때, 이양이 일제히 군을 일으켜 외백을 덮쳤다. 외백은 대패하여 성도로 도망쳤다. 이웅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추격하여 성도 소성(少城)까지 차지해버리자,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나상은 성도 태성(太城)으로 물러났다. 외백은 중상을 입은 채 이웅 앞에 끌려왔는데, 어머니의 한쪽 눈을 앗아가고 형 이탕 사망의 원흉임에도 이웅이 그를 용서하였다. 이양을 보내 건위(建爲)를 점령해 나상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건위태수 공회(龔恢)를 죽였다. 그 해 12월, 이웅이 직접 군을 이끌고 태성을 공격했다. 군량까지 바닥난 나상은 아문 장라(張羅)에게 태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우비수(牛鞞水)를 건너 동쪽 강양군(江陽郡)으로 달아나 서진 조정에 성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보고하였다. 나상이 도망간 직후 장라는 성문을 열어 이웅에게 항복하였다. 이웅이 성도에 입성할 때, 항복한 진나라 군사들이 심히 굶주려 있는 것을 보고 처현(郪縣)에서 토란을 찾아 그들을 배불리 먹였다. 반란군 토벌의 총책임자였던 양주자사 허웅은 조정으로 끌려가 토벌에 진전이 없었음을 문책받았다. 강양으로 도망친 나상은 형주에서 진남장군 유홍(劉弘)이 보낸 보급을 받아 군을 재정비했다. 한편, 이웅은 촉의 백성들이 서산에 은거 중인 범장생을 따른다는 사실을 눈치채, 그에게 임금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 신하가 되려 하였다. 범장생이 권유를 수 차례나 간곡히 거절했음에도 이웅은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고 정사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이리, 이국(李國) 등 여러 제장들과 항상 의논하니, 이리 형제와 제장들은 이웅을 더욱 공손히 받들었다. === 대성(大成) 건국 === 304년, 제장과 신하들이 이웅에게 즉위할 것을 청했다. 이에 이웅은 성도왕을 칭하여 경내 범죄자들을 사면한 뒤, 진나라 법을 전부 폐기하고 약법 7장을 발표하였다. 숙부 이양은 태부, 맏형 이시는 태보에 임명했으며, 절충장군 이리는 태위, 건위장군 이운(李雲)은 사도, 익군장군 이황(李璜)은 사공, 재관 이국은 태재로 삼았다. 그리고 [[이호(삼국지)|이호]]를 포함한 그의 조상들을 모두 공과 왕으로 추존했다. 성도왕에 오르고 나서도 이웅은 전과 같이 이리와 이국 등 신하들의 자문에 귀 기울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306년 3월, 범장생이 마침내 서산에서 성도로 와 이웅에게 귀부했다. 이웅은 범장생이 온다는 말을 듣고 친히 마중 나와 영접했으며, 그를 승상으로 모시고 범현(范賢)이라 칭하였다. 동년 6월, 범장생의 권유에 따라 이웅이 [[칭제]]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으로 정했으며 다시 안평으로 연호를 고쳤다. 아버지를 경황제, 묘호는 시조(始祖)로 추존하고 어머니 나씨를 태후로 모셨다. 범장생은 천지태사(天地太師), 서산후(西山侯)에 봉하고 그 부곡들의 군역을 전부 면제시켜 주었다. 당시 성나라는 건국 초라 법과 의례가 미비하여 제장들이 서로 자신의 공을 다투었다. 그러자 상서령 염식(閻式)이 상소하였다. > 무릇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법과 기율을 제정할 땐, 과거의 제도들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한나라]]와 [[진(영성)|진나라]] 의 경우, 태위와 대사마만이 병권을 다루고, 태부와 태보는 임금의 부형(父兄)과 같은 벼슬로 도의(道義)를 논하고, 사도와 사공은 전국에 오교[* 오교(五敎)란 [[유학(학문)|유학]]에서 말하는 오륜(五倫)을 뜻한다.]를 바로 세우는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진나라는 승상을 두어 각종 정무를 통괄하였고, [[한무제]] 말기에는 이례적으로 대장군이 정무를 통괄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나라가 막 세워지고 만사가 주도면밀하지 못하여 여러 공신들이 서로 다투어 관직 설치를 청하고 있는데,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과거의 전장(典章)과 부합하지 않으니, 마땅히 과거의 모범이 되는 법식(法式)을 세워 이들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이웅이 이를 듣고 [[한나라]], [[진(영성)|진나라]]의 선례에 따른 백관제도를 설치하였다. === 진나라와의 전투 === 307년 5월, 진주(秦州) 유민 무리의 우두머리 등정(鄧定)이 [[한중]]으로 들어가 성고(成固)를 거점으로 노략질을 자행했다. 양주자사 장은(張殷)이 파서태수 장연(蔣延)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게 하자 등정이 거짓항복하고 그동안 노략질로 얻은 것들을 뇌물로 토해냈다. 장연이 방심하여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등정은 굉저(訇氐)를 촉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웅이 태위 이리, 사도 이운, 사공 이황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장연을 공격하니, 장연은 대패하여 도주하고 장은과 한중태수 두맹치(杜孟治)도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갔다. 한중을 점령한 이리는 10여일 간 머물다 한중의 백성들을 데리고 다시 촉으로 들어갔다. 309년 10월, 재동을 지키던 이리와 염식이 부장 굉기(訇琦)에게 죽임을 당하고, 굉기는 재동을 들어 나상에게 투항했다.[* 이는 자치통감의 기록만을 따른 것으로, 《진서》의 경우 굉기라는 인물은 나오지 않으며 310년에 이리의 부장 나양(羅羕), 장금구(張金苟)가 이리와 염식을 죽이고 나상에게 투항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태부 이양이 이운, 이황과 함께 재동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운과 이황이 전사하였다. 이웅도 친정하여 부성(涪城)을 쳤지만 진나라의 재동내사 초등(譙登)에게 패했다. 310년 2월, 장하 문석(文碩)이 태위 이국을 죽이고 파서군을 들어 나상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이웅이 보낸 장보(張寶)가 재동을 탈환했고, 파군에 주둔해있던 나상도 7월에 사망하여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다. 장사태수 피소(皮素)가 나상의 후임으로 익주자사에 임명되었는데, 지휘관의 교체로 불안정할 것이라 생각한 이양이 부성을 쳤다. 초등은 후방에 보급을 요청했지만 파군에서 군량을 관리하던 나상의 아들 나우(羅宇)는 평소 초등을 미워했으므로 그 요청을 묵살해버렸다. 익주자사 피소가 이 사실에 분노하여 나우를 처벌하기 위해 파군으로 향하던 중 나우가 보낸 건평도위 폭중(暴重)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우의 이런 행동에 진나라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양은 이를 알아채 부성을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부성의 식량은 금세 바닥이 나 병사들은 쥐를 잡아먹었고 굶어죽는 이들이 많았으나 배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등이 과거 나상에게 붙잡혀 부성에 감금됐던 이양의 처자식을 돌려보냈지만 이양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311년 정월, 이양이 마침내 부성을 함락하고 초등을 사로잡아 성도로 보냈다. 이웅은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부성을 방어했던 초등의 재능을 아껴 회유를 시도하나, 초등이 끝까지 거절하여 하는 수 없이 처형했다. 한편, 이양은 진나라에 넘어간 파서군도 모두 평정하고 배신자 문석도 잡아죽였다. 이웅은 이를 기뻐하며 경내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연호를 옥형(玉衡)으로 고쳤다. === 치세와 사망 === 314년 정월, 성나라는 잇달은 정복 전쟁으로 진나라로부터 한가군, 부릉군까지 빼앗아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일전에 점령했던 한중을 포함해 익양주(梁州)를 전부 손에 넣은 셈. 이웅은 현명한 자들을 등용하여 재능에 부합한 임무를 맡겼으며 형벌과 정치도 너그러웠다. 백성들이 부담하는 부세와 부역은 매우 적었고, 심지어 투항해오는 외지인의 경우 그마저도 모두 면제시켜주어 먼 곳의 사람들도 성나라에 귀순하길 희망했다. 나라 안으로는 태부 이양이 백성들을 보살피고 밖으로는 양주자사 이봉(李鳳)이 백성들을 지키니, 이웅의 치세 아래 촉 땅은 매우 안정되었다. 성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유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을 정도였다. 315년, 이웅은 자신의 처 임씨(任氏)를 황후로 삼았다. 양난적이 [[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에게 패해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바치며 서신으로 항복해왔다. 농서의 도적 진안(陳安)도 성한에 귀순하였다. 318년, 양주자사 이봉이 파서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양을 보내 토벌했다. 이봉은 패배해 처형되고 이양의 아들 이수(李壽)가 양주자사에 임명되었다. 323년 4월, 이양이 서진의 영주(寧州)를 공격하자, 영주자사 [[왕손(동진)|왕손]]이 장군 요악(姚嶽)을 보내 막게 했다. 요악은 당랑(螗蜋)에서 이양을 격파하고 노수(瀘水)까지 추격했다가 성나라군이 강을 건너 도망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왕손은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채찍으로 요악을 마구 때려, 결국 심하게 맞은 요악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왕손도 결국 분통 속에 밤에 사망하였다. 같은 해 10월, 항복했던 양난적은 줄곧 자신의 본거지 무도(武都)에만 머무르며 험난한 지형을 믿고 이웅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웅은 양난적 토벌을 위해 중령군 이함(李琀)[* 위에 나온 이특의 매제 이함(李含)과는 다른 인물.], 안북장군 이치(李稚), 장수 악차(樂次), 비타(費他), 이건(李乾) 등은 하변(下辨)으로 보내고, 정동장군 이수, 이함의 동생 이오(李玝)는 음평(陰平)으로 진격하게 했다. 양난적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아 이수와 이오는 진군을 멈췄으나, 이함의 군대는 양난적의 군대를 뚫고 무도군 하변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양난적이 다시 군대를 보내 이함의 뒤를 끊고 사방에서 이들을 공격하니, 성군(成軍)은 하변에서 패배해 수천이 죽고 이함, 이치 형제는 전사했다. 이함과 이치는 죽은 형 이탕의 아들들로, 이웅은 조카들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입만 열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나무라니, 이양과 신하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324년, 이웅은 대신들을 모아 이탕의 아들 [[이반(성한)|이반]]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황후 임씨가 불임이라 이웅에게는 서자만 10여명이 있었는데, 군신들은 모두 이웅의 친생자를 태자로 세워달라 간언하였다. 그러자 이웅이 말했다. > 당초 거병했을 때 나는 일반인이 손을 든 것에 불과하여 제왕의 업을 이룰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천하가 재앙에 휩싸여 진(晉) 황실이 유랑하고 민중들이 봉기하니, 도탄에 빠진 생령(生靈)들을 구하는 데에 뜻을 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공의 자리에 올랐다. 이 업은 본래 [[이특(성한)|선제]]의 것이다. 내 형님은 적장자로, 대조(大祚)는 마땅히 형님이 계승해야 하나, 지혜롭고도 총명했던 형님은 결국 하늘의 사명을 받아 대사(大事)를 치르시고 전쟁터에서 돌아가셨다. 형님의 아들인 이반은 성품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한데다 학문도 뛰어나니 장차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에 이양과 사도 왕달(王達)이 다시 간언했다. > 왕이 사망하기 전에 태자를 세우는 이유는 왕위쟁탈의 싹을 자르기 위함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번|오자(吳子)]]이 [[합려|그의 아들]]을 버리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바람에 오나라엔 칼부림이 벌어졌으며, [[송선공]]이 태자 여이(與夷)를 버리고 [[송목공]]을 세우는 바람에 화독의 변이 일어났습니다. 아들 같은 자가 어찌 친아들보다 더 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이를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러나 이웅은 듣지 않고 이반을 태자로 세웠다. 이양은 물러나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 화란(禍亂)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326년,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의 [[장준(전량)|장준]]이 먼저 성나라와 우호를 맺기 위해 서신을 보내 우호를 맺었고, 두 나라는 서로 끊임없이 사자를 보내며 왕래하기 시작했다. 328년, 숙부 이양이 세상을 떠났다. 이웅은 그의 아들 이수를 대장군, 서이교위로 삼았다. 대장군이 된 이수는 정남장군 비흑(費黑)과 함께 파동군, 건평군을 점령하여 [[동진]]의 파동감군 관구오(毌丘澳)를 의도(宜都)로 쫓아냈고, 음평과 무도를 쳐 구지왕 양난적이 항복을 받아내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리고 333년 3월에는 이웅의 명에 따라 녕주를 공격한 이수가 동진의 영주자사 윤봉(尹奉)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중 전체를 얻어냄으로써 성한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334년, 이웅은 전쟁터에서 창칼에 긁혀 생긴 상처들이 많았는데 그 위에 종기가 자주 일어나 매번 고통받았다. 그런데 61세인 이웅의 머리에 독창이 생겨 병으로 드러누워버리니, 온몸에 종기들이 더 심해져 전부 곪아 터졌다. 그 모습이 너무도 흉측하여 친자식들도 이웅을 피했지만 오직 조카인 태자 이반만이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고 친히 고름을 빨아냈다. 동년 6월 25일, 이웅은 대장군 이수를 불러 유언으로 이반을 보정해달라 명하고 사망했다. == 기타 == 이웅의 어머니 나씨는 이웅을 낳기 전 물을 긷다가 갑자기 잠이 들었는데, 큰 뱀이 나씨의 몸을 휘감는 꿈을 꾼 뒤 깨어났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웅을 임신했고, 무려 14개월이 지난 후에 이웅을 출산했다고 한다. 이웅은 분명 뛰어난 명군이 맞지만 의외로 감정적인 면에서는 고집이 센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일례로 성한 건국 초 어머니 나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웅은 무당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으려 했는데, 사공 조숙(趙肅)이 겨우 뜯어말려 마침내 시신을 매장하고 상을 치를 수 있었다. 이때 이웅이 어머니의 [[삼년상]]을 몸소 시행하겠다 선언하니, 군신들은 모두 경악했다. 사방에 온갖 세력들이 위협해오는 난세에 그것도 한 세력을 이끄는 군주가 3년의 공백 기간을 가진다는 것은 세력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기에 숙부 이양은 관을 벗고 울면서 이웅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러자 보다못한 장수 임회가 [[주무왕]]이 흰 갑옷을 입고 [[상나라]]를 정벌한 일과 [[진양공]]이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지 못한 채 진(秦)과 전투를 벌인 일을 언급하며, 이들이 불효자라 상을 생략한 것이 아니고 천하를 위해 친인척의 정을 희생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이웅에게 다가가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국가 정사를 처리하게 하자, 이웅 또한 깨달은 바가 있어 상복을 벗고 이후로 3년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고집은 나이 먹을수록 더 강해져 훗날 친생자를 내버려둔 채 이반을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분란의 씨앗을 만들고 말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 [[분류:274년 출생]] [[분류:33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