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풍 (문서 편집)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李淳風 (602 ~ 670) [[당나라]]의 인물. 기주 옹 사람으로 젊어서 학문으로 명성이 있었고 보천역산학에 정통했으며, 627년에 장사랑직태사를 지내면서 혼천황도의를 만들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 633년 4월 16일에 완성했다. 창락현남에 봉해졌고 640년에 선의랑을 지내면서 무인력의 오류에 대해 표문을 올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논의해 정밀하게 교정했다. 665년에 비각랑중으로 있으면서 법상지 7권을 저술했고 부인균의 무인력에 조금씩 해석을 붙이면서 유작의 황극력을 늘리거나 줄여서 다시 인덕력을 편찬했으며, 5월 20일에 인덕력이 시행되었다. 당나라 3대 이후에 여주무왕이 천하를 통치하리라는 참언이 돌자 [[당태종]]이 길흉에 대해 묻자 이순풍은 그 징조는 이미 궁중에 있고 40년 동안에 왕의 자손들이 대부분 멸하게 될 것이라 했으며, 당태종이 그런 사람들을 색출해 죽이면 어떻겠냐고 묻자 이순풍은 하늘이 하는 일은 사람이 막지 못하고 오히려 냅둘 경우 그도 늙어서 인자해져 이씨의 멸문만은 피할 것이라고 하며 오히려 죽여버릴 경우 죽은 여주무왕이 다시 태어나 젊어져 그때는 아예 폐하의 자손들의 씨를 말릴 것이라 했다. 당태종은 이순풍의 말을 듣고 따랐으며[* 다만 본보기로 현무문을 수호하던 좌무위장군 이군선을 여주무왕이라 누명 씌워 죽여버렸다. 그리고 훗날 그의 가족들의 탄원으로 그의 누명을 벗겨준 인물이 있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사람이 바로 여주무왕의 당사자였던 무측천이었다.], 결국 훗날 [[측천무후|그의 예언대로 진행되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02년 출생]][[분류:670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