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맥 (문서 편집) 李陌 [[1455년]]([[세조(조선)|세조]] 1) ~ [[1528년]]([[중종(조선)|중종]] 23) [목차] == 개요 == 조선 초기 [[연산군]] 때의 문신. 본관은 [[고성 이씨|고성]](固城)[* 사암공파.], 자는 정부(井夫),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아버지 사암공(思菴公) 이지(李墀)와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보(鄭保)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고조부가 바로 [[포은 정몽주]]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태백일사를 지었다고 주장되는 인물이나, 실상은 환단고기의 실제 저자인 [[이유립]]이 이맥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다. 이는 [[사이비역사학]] 서적을 출간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 태백일사의 저작배경? == 태백일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중에 '''1520년에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이 되자, 상고시절의 역사서를 접하여 지었다'''는 내용이 있으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맥이 찬수관이 되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그 해에 정작 이맥은 한창 헌부의 탄핵요청을 받고 있을 때였다.(...) 현대에 발간된 환단고기와 관련된 일부 서적에선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5대 서적 중 하나를 지은 사람이라 이 자에 대해 소개하고 있지만, 정작 그 내용조차 잘못된 부분이 보인다. 예로 사간원의 대사간이 되었다는 해를 1506년으로 소개하나, 정작 대사간이 된 해는 1507년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9019_003|중종 4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9월 19일(기미) 3번째기사]]] 환단고기에 관한 내용은 [[환단고기]] 문서를 참조. == [[조선왕조실록]]에서 == 자료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manInfo/popManDetail.do?manId=M_0000504|조선왕조실록 : 인물정보 상세보기 검색결과]] === [[연산군]] 시절 === ||<:>'''왕대'''||<:>'''왕력'''||<:>'''일자'''||<:>'''관력'''||<:>'''형태'''|| ||<:><|2>연산군||<:>09년||<:>1503.10.06||<:>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0006_001|성준이 김준손의 일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0.07||<:>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0007_005|이맥이 이점의 일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0.09||<:>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0009_005|간관들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2>연산군||<:>09년||<:>1503.10.17||<:>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0017_004|이맥이 사냥지를 옮긴 일 및 순창 군수 우경의 파직을 청하다]]|| ||<:><|2>연산군||<:>09년||<:>1503.10.25||<:>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0025_001|이맥이 물건을 훔치거나 기강을 해친 관리를 처벌하도록 청하다]]|| ||<:><|2>연산군||<:>09년||<:>1503.11.04||<:>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04_002|궁궐에 담 쌓는 일과 이현에 문 만드는 일을 의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1.06||<:>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06_005|이맥이 중 선발의 부당함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1.08||<:>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08_003|이맥이 중 선발과 집 허는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1.09||<:>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09_006|이맥이 집 허는 일이 합당하지 못함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1.13||<:>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13_005|이맥이 박원종의 일과 집 철거의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1.14||<:>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14_002|이맥이 집 허는 일과 박원종의 일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1.20||<:>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20_003|이맥이 집 철거하는 일과 박원종의 일을 아뢰다]]|| ||<:><|2>연산군||<:>09년||<:>1503.11.28||<:>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1028_002|간관이 박원종의 일과 옮긴 사찰의 물건 바치는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2.02||<:>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2002_006|간관들이 박원종 및 복세암과 연굴사의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2.02||<:>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2002_002|간관들이 박원종 및 복세암과 연굴사의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2.09.||<:>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2009_002|장령 이맥이 박원종 및 복세암과 연굴사의 일을 논하다]]|| ||<:><|2>연산군||<:>09년||<:>1503.12.18.||<:>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2018_002|간관이 유찬·장백손 등의 수령직을 갈도록 청하다]]|| ||<:><|2>연산군||<:>09년||<:>1503.12.25||<:>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0912025_001|이맥이 박원종의 일을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다]]|| ||<:><|2>연산군||<:>10년||<:>1504.01.16||<:>장령(掌令)||<:>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1016_001|이맥·김근사·김인령 등이 간원의 파직이 불가함을 아뢰다]]|| ||<:><|2>연산군||<:>10년||<:>1504.03.12||<:>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3012_004|사헌부의 관원을 의금부에 가두다]]|| ||<:><|2>연산군||<:>10년||<:>1504.08.08||<:>장령(將領)||<:>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8008_004|춘추관 당상 유순 등이 전일에 대에 부당하다고 논한 자들을 아뢰니, 심문하게 하다]]|| ||<:><|2>연산군||<:>10년||<:>1504.08.11||<:>정랑(正郞)||<:>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8011_005|유순 등이 변상을 심문하니, 죄가 정랑 이맥 등에게 미치므로 잡아다 심문하게 하다]]|| ||<:><|2>연산군||<:>11년||<:>1505.02.08||<:>장령(掌令)||<:>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2008_003|춘추관 유순 등에게 《시정기》를 상고하여 전 대간들이 논계한 일을 입계하게 하다]]|| === [[중종(조선)|중종]] 시절 === ||<:>'''왕대'''||<:>'''왕력'''||<:>'''일자'''||<:>'''관력'''||<:>'''형태'''|| ||<:><|2>중종||<:>02년||<:>1507.01.05||<:>어사(御使)||<:>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1005_001|경기·황해·충청도에 어사를 보내다]]|| ||<:><|2>중종||<:>02년||<:>1507.09.19||<:>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9019_003|유빈·홍경주·장순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02년||<:>1507.09.25||<:>대사간(大司諫)||<:>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9025_003|대사간 이맥이 직책을 바꾸어 주도록 청하다]]|| ||<:><|2>중종||<:>02년||<:>1507.11.23||<:>우부승지(友副承旨)||<:>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11023_008|안윤덕·강징·이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04년||<:>1509.08.07||<:>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408007_002|유인호·이맥·조방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05년||<:>1510.02.05||<:>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502005_002|이합이 자식에게 종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해 의논하다]]|| ||<:><|2>중종||<:>05년||<:>1510.02.06||<:>판결사(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502006_002|이위를 내수사 종을 염려한 말로서 체임시키다]]|| ||<:><|2>중종||<:>06년||<:>1511.05.24||<:>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605024_002|김세필·이맥·문계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06년||<:>1511.07.01||<:>판결사(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607001_001|간원 헌부가 전의 일을 아뢰니 불허하다]]|| ||<:><|2>중종||<:>06년||<:>1511.10.11||<:>판결사(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610011_006|양사가 조진한 다섯 조목을 빈청에 내리고 전교하다]]|| ||<:><|2>중종||<:>08년||<:>1513.03.13||<:>호조 참의(戶曹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3013_003|이사균·김극핍·김근사·조원기·이자화·이항·박소영·황성창·홍경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08년||<:>1513.06.06||<:>참의(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6006_003|전부 등을 불러 함경도 구황의 계책을 논의하다]]|| ||<:><|2>중종||<:>08년||<:>1513.10.27||<:>호조 참의(戶曹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10027_002|좌의정 송일·우의정 정광필 등이 영산군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2>중종||<:>10년||<:>1515.02.14||<:>호조 참의(戶曹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2014_003|호조 판서 고형산 등이 함경도의 군량 확보책을 아뢰다]]|| ||<:><|2>중종||<:>10년||<:>1515.05.08||<:>참의(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5008_002|유순 등이 매윤·연윤의 사형 여부를 논의하여 아뢰다]]|| ||<:><|2>중종||<:>10년||<:>1515.08.12||<:>호조 참의(戶曹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8012_003|교성군 노공필 등이 박상 등을 추문하도록 아뢰다]]|| ||<:><|2>중종||<:>11년||<:>1516.11.23||<:>호조 참의(戶曹參議)||<:>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11023_004|노산과 연산의 후손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다]]|| ||<:><|2>중종||<:>12년||<:>1517.11.04||<:>가승지(假承旨)||<:>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211004_002|폐조 때 귀양간 자들을 방면하는 일에 관해 논의하다]]|| ||<:><|2>중종||<:>15년||<:>1520.08.04||<:>판결사(判決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1508004_001|헌부에서 판결사 이맥을 갈기를 청하다]]|| ||<:><|2>중종||<:>20년||<:>1525.11.11||<:>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2011011_007|이맥·임권·이귀령·홍석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중종||<:>21년||<:>1526.01.08||<:>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현직|| ||<-4>[[http://sillok.history.go.kr/id/kka_12101008_001|동지돈령부사 이맥이 치사하기를 청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환단고기)] [[분류:조선의 문관]][[분류:고성 이씨 사암공파]][[분류:1455년 출생]][[분류:1528년 사망]][[분류:환단고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