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고(서량)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서량 군주)] ---- [include(틀:당 추존 및 비정통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추존 황제''' [br] {{{+1 '''흥성제 | 興聖帝'''}}}}}}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서량 초대 국왕[br]{{{+1 태조 무소왕 | 太祖 武昭王}}}'''}}} || ||<|2> '''출생''' ||[[351년]] ||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 [[간쑤성|농서군]] [[톈수이시|성기현]][br](現 [[간쑤성]] [[톈수이시]] 친안군) || ||<|2> '''사망''' ||[[417년]] [[2월]] (향년 67세) || ||[[서량]] [[주취안시|주천]][br](現 [[간쑤성]] [[주취안시]]) || || '''능묘''' ||건세릉(建世陵) || ||<|2> '''재위기간''' ||'''{{{#ece5b6 초대 국왕}}}''' || ||[[400년]] ~ [[417년]] [[2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고(暠) || || '''부왕''' ||간왕 [[이창(전량)|이창]] || || '''배우자''' ||신부인, 윤부인 || || '''자녀''' ||10남 2녀 || || '''아명''' ||장생(長生) || || '''자''' ||현성(玄盛) || || '''묘호''' ||[[태조]](太祖) || || '''시호''' ||무소왕(武昭王)[br]→ 흥성황제(興聖皇帝) || || '''연호''' ||경자(庚子, [[400년]] ~ [[404년]])[br]건초(建初, [[405년]] ~ [[417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량]](西凉)의 초대 국왕. 아명은 장생(長生)이었고,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소왕(武昭王) → '''흥성황제(興聖皇帝)'''[* [[당현종]] 추존.]였다. [[진(영성)|진나라]]의 명장 [[이신(전국시대)|이신]]과 [[전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칭했으며, 농서 [[이씨]](隴西李氏)의 중시조이기도 하다. 이고는 [[이엄(전량)|이엄]](李弇)[* 경왕(景王)으로 [[추존]]됨.]의 손자였으며 [[이창(전량)|이창]](李昶)[* 간왕(簡王)으로 추존됨.]의 아들이었다. == 생애 ==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매우 좋아해 여러 경서를 탐독했고, 성격은 차분하고 겸손하여 기품이 우아했다. 성년이 되었을 때 무예까지 정통했고, [[손무]]의 《[[손자병법]]》을 연구했다. 397년 [[후량(오호십육국시대)|후량]]의 건강태수 [[단업]](段業)이 [[북량]](北凉) 정권을 세우고 양주목을 자칭했을 때 하서(河西) 지역의 호족이었던 이고를 효곡현령(效穀縣令)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겸(郭謙)과 색선(索仙) 등의 추대로 이고는 돈황태수가 되었다. 이고는 이 사실을 단업에게 알렸고, 단업은 그에게 안서장군(安西將軍), 영호서호교위(領護西胡校尉)를 수여했다. 399년, 단업이 양왕을 자칭했을 때 우위장군 색사(索嗣)가 이고를 돈황에 오래 머물게 하면 안된다고 조언했다. 이를 타당하게 여긴 단업은 색사에게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이고 대신 돈황태수로 부임하도록 했다. 색사가 돈황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이르고나서 이고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영접하라고 통지했다. 이고가 그 말을 따르려 하자 이부동생이었던 송요(宋繇)와 효곡현령 장막(張邈)이 너무 위험하다며 그를 막고는, 국가를 세울 조건이 모두 갖춰졌으니 차라리 거병할 것을 건의했다. 이고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아들 [[이흠(서량)|이흠]]과 장막, 송요 등을 보내 색사를 습격하자, 색사는 대패하여 도망쳤다. 이고는 본래 색사와 사이가 좋았는데, 색사가 이 일의 원흉임을 안 뒤로 그를 매우 미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업에게 색사의 죄를 상소하여 그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고, 평소 색사를 싫어하던 보국장군 저거남성(沮渠男成)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단업은 이들의 말을 듣고 색사를 죽인 뒤 이고에게 사자를 보내 사과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단업은 이고를 견제하기 위해 돈황군(敦煌郡)을 나누어 양흥군(凉興郡)을 설치하고, 이고를 도독양흥이서제군사, 진서장군에 임명했다. 400년, 북량의 진창태수 당요(唐瑤)가 반란을 일으켜 둔황, 양흥, 주천(酒泉) 등 각지에 격문을 돌렸다. 둔황을 쪼갠 일로 자신이 견제받고 있음을 느낀 이고가 이에 응하자 당요가 그를 대장군, 사주자사, 양공으로 추대했다. 이고는 정권을 설립해 국명을 '''양'''이라 하고, 수도를 돈황(敦煌)으로 정했으며, 연호를 경자(庚子)로 개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이엄(전량)|이엄]]은 경공(景公), 아버지 이창은 간공(简公)으로 추증했다. 서량을 건국한 이고는 개국공신인 당요를 정동장군에 임명하고, 곽겸을 군사제주, 장막을 우장사, 이부동생 송요를 절충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송요를 보내 북량의 양흥군과 옥문관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둔전]]을 시행했다. 401년,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후진의 군주였던 고조 문환제 [[요흥]]은 이고를 안서장군에 임명하고 고창후(高昌候)에 봉했다. 404년, 이고의 장남인 태자 이담(李譚)이 사망해 차남 이흠을 태자로 삼았다. 405년, 대도독, 진양이주목(秦凉二州牧)을 자칭하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 칭신했다. 이고가 친히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국경을 순시하자, 선선(鄯善)의 국왕이 사자를 파견하여 특산품을 진상했다. 그러던 중 북량의 [[저거몽손]]이 건강(建康)까지 쳐들어와 3,000여 호를 약탈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고는 대노하여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안미(安彌)에서 저거몽손을 대파하고 빼앗긴 백성들을 모두 되찾았다. 멸망당한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난민 10,000여 호와 중원 지역 출신의 7,000여 호가 둔황으로 이주해왔고, 무위(武威)에서도 곽논(郭黁)의 횡포를 피해 수천여 호가 둔황과 진창으로 이주했다. 이고는 장사 장막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천으로 천도한 뒤, 둔황 남자정(南子亭)에 성을 쌓고 군현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북량의 위협으로부터 둔황을 지키기 위해 장체순(張体順)을 건강태수에 임명해 동관을 막게 하고, 송요를 둔황호군, 그 아들 송양(宋讓)을 둔황태수에 임명해 둔황을 진수하게 했다. 주천으로 도읍을 옮긴 이고는 농업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이니, 오곡은 해마다 풍성하여 서량의 백성들은 평안하고 군료들은 기쁘게 일했다. 군신들이 이를 기념하고자 주천에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자 이고가 승낙했다. 유림제주 유언명(劉彦明)이 대표로 그 공덕을 기리는 문장을 지어 비석에 세겼다. 이듬해, 북량의 저거몽손이 서량을 침공해왔지만 주천으로 가기 전에 미리 배치해둔 병력과 풍부한 군량 덕에 성공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저거몽손은 이고와 화친만 맺고 돌아갔다. 410년, 저거몽손이 화친을 깨고 선공해왔다. 이고는 태자 이흠을 보내 저거몽손의 군대를 무찌르고 북량의 장수 저거백년(沮渠百年)을 사로잡았다. 이후 이고는 둔황에 동, 서, 남쪽으로 요새를 설치하게 하여 앞으로 있을 침입에 더욱 철저히 대비했다. 417년 정월, 이고가 병에 걸려 쓰러졌다.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직감한 이고는 자신의 이부동생 송요를 불러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어려움을 헤쳐나갔으며, 각지에 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이 자리에 올랐지만 내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양주를 통일할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력이 쇠하여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 것 같구나. 죽음 자체는 자연의 섭리이기에 두렵진 않으나, 슬프게도 대의를 이룰 수 없어 안타깝도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항상 위험 징조를 잘 살펴야한다. 내 뒤를 이을 태자 이흠에게도 이 뜻을 전달하여 그가 제멋대로 굴지 않게 경(卿)이 잘 지도해주길 바란다. 군국의 대계(大計)를 경에게 맡기고 떠나니, 모략이 빗나가 성패가 엇나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이 말을 마치고 약 1개월 뒤, 이고는 67세로 승하했다. 왕위에 오른 차남 이흠(李歆)은 아버지의 시호를 무소왕(武昭王), 묘호를 태조라 하고 건세릉(建世陵)에 안장했다. 《[[구당서]]》에는 이고의 손자를 [[이희(북위)|헌조]][* [[고종(당)|당고종]]이 추존했으며, [[고조(당)|당고조]] 이연의 4대조였다.]로 기록하고 있으며,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은 이고의 7대손을 자처했고 [[당현종]] 이융기때 이고는 흥성황제(興聖皇帝)로 추존되었다. 당나라의 명시인 [[이백]]은 그의 9세손이라고 전해진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include(틀:위서(북조))]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황제]][[분류:당나라의 추존 황제]][[분류:351년 출생]][[분류:417년 사망]][[분류:톈수이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