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축년 대홍수 (문서 편집)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한반도의 폭우)] |[[파일:을축년대홍수기념비.jpg|width=100%]]|<#fff,#1f2023>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 입구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 [목차][clearfix] == 개요 == 을축년 대홍수(乙丑年 大洪水)는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60갑자]]로 을축년이었다.] 여름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홍수]]다. [[한반도]] 전역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강]]과 [[낙동강]] 일대가 특히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을축년 장마' 또는 '을축년 홍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래 2개의 자료는 기상청 태풍백서에 있는 1925년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의 이동 경로다. [[파일:을축년대홍수1.jpg]] [[파일:을축년대홍수2.jpg]] == 진행 == === 1차 홍수 === [[대만]] 부근에서 생성된 [[태풍]](2559호 태풍)이 [[7월 11일]]부터 12일에 걸쳐 [[한반도]] 중부지방을 관통했는데 이 때문에 [[황해도]] 이남 지역에 '''시간당 최고 300mm'''[* 누적 강수량이 아니라 시간당 강수량이다. 누적 강수량으로 하면 관측상 500 mm가 넘게 온 지역도 있었다.][* 시간당 10mm만 되어도 비가 많이 온 것이며 30mm면 집중호우 급으로 온 건데 10mm의 '''30배''', 30mm의 '''10배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것이냐면 수년 후 [[2022년 중부권 폭우 사태/수도권|2022년 8·8 폭우]] 당시 [[서울특별시]]([[동작구]] 신대방동 일대)의 시간당 최고 강수량은 141.5 mm에 불과(?)했다.]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한강]], [[금강]] 및 [[낙동강]]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주요 강들이 대부분 범람했다. === 2차 홍수 === 7월 16일, 1차 홍수로 생긴 피해를 채 수습하기도 전에 타이완에서 생성된 또다른 태풍(2560호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특히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피해가 막심하여 [[http://nimr.go.kr/_part/downloadFile.jsp?cate=file&org=KOR_OP_GA_MV_2&idx=114&seq=3&FileName=004.pdf|누적 강수량 65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한강 수위가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 [[뚝섬]] 13.59m, 한강대교 11.66m, 용산구 12.74m.]를 경신해 한강에 쌓았던 제방이 무너지면서 서울 전역이 물바다가 되었는데 [[숭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서울의 교통과 통신도 마비되었다. 당시 서울 전역에서 익사자만 400여 명에 가옥 12,000여 호가 유실되었다. 특히 [[고양군]] 한지면 이촌리[* 현재의 [[용산구]] [[동부이촌동]]]·[[뚝섬|둑도면]][* 현 [[성동구]] 및 [[광진구]]] 일원과 [[잠실동|잠실리]][* 현 [[송파구]] [[잠실동]] 및 [[신천동(서울)|신천동]] 일대] 일대·[[광주시/역사|광주군]] 구천면 [[풍납동|풍납리]][* 현 [[송파구]] [[풍납동]]] 일대의 피해가 막심했다. 심지어 송파구에는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자 이듬해인 1926년에 이재민들이 세운 비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정도.[* 현재 있는 비석은 [[6.25 전쟁]] 등으로 훼손된 것을 2012년에 복원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위치도 당시 중대면사무소가 있었던 송파구 송파동 95번지에서 서초구 반포동 한강홍수통제소로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2차 홍수가 뜻밖에 가져온 이점도 있었다. 지층이 쓸려가는 바람에 땅에 파묻혀 있었던 [[서울 암사동 유적|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발견되었고 [[풍납토성]] 서벽이 유실되면서 각종 유물이 확인되어 주목받았던 것. 그러나 이때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은 완전히 쓸려나가 복원되지 않았으나 2017년 조사에서 서벽과 성문 흔적이 확인되었다. === 3차 홍수 === 이렇게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는데 [[장강|양쯔강]] 일대의 저기압의 영향으로 8월 초 [[평안도|관서]] 일대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이번에는 북부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했다. === 4차 홍수 === 8월 말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생한 2563호 태풍이 북상하여 9월 초에 한반도 남부를 관통[* 제주도와 목포·대구를 거쳐서 동해에서 소멸.]했고 이로 인해 남부 지방에 들이닥친 호우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이 범람했다. == 피해 및 영향 == 홍수가 한 해에 모두 4차례나 닥쳐 논 3만 2천여 단보, 밭 6만 7천여 단보,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었다. 그 외에 붕괴된 가옥은 1만 7천여 호, 침수된 가옥은 4만 6천여 호에 사망자가 647명이나 발생하여 피해액만 1억 300만 원에 이르렀다. 이 액수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60%에 맞먹었으니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총독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본류는 물론 [[안양천]]과 같은 한강 지류에까지도 제방을 엄청나게 건설하여 복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골재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선유봉(오늘날의 [[선유도]])을 폭파했다.[* 물론 이 때 건설된 제방으로 혜택을 입은 조선인들도 많았지만 일본이 제방을 만든 가장 큰 목적은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서 였다.] [[파일:external/www.segye.com/20141118003907_0.jpg]] 또 이 홍수의 영향으로 잠실섬 주변의 '''한강 본류가 바뀌었다.'''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석촌호수]])에서 북쪽의 신천강([[잠실새내역]] 이북)으로 바뀐 것이다. 20세기 초반 이래 이 지역에서 한강의 직류화 경향이 자연적으로 진행되던 상황이었다. 즉, 기존의 송파강이 아니라 새로 생긴(新) 하천(川)인 신천으로 유량 유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 대홍수를 계기로 아예 신천이 본류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로 인해 송파강으로 먹고 살았던 송파나루는 급격히 쇠퇴했다. 송파나루는 유량이 풍부해서 배가 정박하기 좋았기 때문에 [[원주시|원주]], [[춘천시|춘천]], [[단양군|단양]], [[영월군|영월]] 등 한강 상류의 물자가 이곳으로 집결했고 이곳을 통해 영남, 강릉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조선시대 전국 15대 상설장터였던 송파시장이 있었을 정도. 그리고 이곳에 송파진이라는 군영이 설치되어 강 건너 뚝섬, 동잠실, 삼전도, 광나루까지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번화한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더니 을축년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아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에 자리잡던 주민들도 인근 석촌, 가락 등지로 이주하여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18년 [[송파나루역]]이 개통하여 이름'''만''' 남았을 따름이다. 이후 중대면 일대의 주거지가 현재의 [[백제고분로]] 뒤쪽으로 크게 후퇴했다. 그리고 잠실 일대의 양잠도 홍수로 뽕밭이 다 쓸려나가고 토양이 척박해짐으로써 쇠퇴해 버렸다. 양잠으로 번성하였던 잠실, 신천 일대와 송파나루로 번성하였던 광주군 중대면 일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는 1971년 한강공유수면사업으로 인한 잠실택지지구 개발, 1985년 [[가락시장]] 개장,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9년 [[롯데월드]] 개장까지 약 50년 동안 잊힌 땅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안양천]]의 물길도 바뀌어 지금의 [[영등포구]] 양화동 지역이 영등포 생활권에 편입되어 버렸다. 또 이 홍수 때문에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 논의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1936년에야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그 외에 성수동 [[뚝섬]]의 유래가 된 사당 둑신사(纛神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서울경동초등학교|뚝도공립보통학교]](현 서울경동초등학교)의 교사가 유실되었으며 [[서울 암사동 유적|암사동 선사유적지]]가 이때 발견되었다. [[남한산성]] 행궁과 [[북한산성]] 행궁, 그리고 성벽 일부가 당시 홍수로 인해 발생한 산사태에 매몰되었다. 산성은 1975년부터, [[남한산성 행궁]]은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2014년에 마무리되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정비, 복원 중이다.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 스님은 절의 재산을 털어서 배를 구입해 고립된 이재민들을 구조하였는데 그 수가 700여 명에 달했다.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이후 청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는데 봉은사에 남아 있다. 또 당시 지식인들이 청호를 기리는 글과 그림 등을 모은 불괴비첩(不壞碑帖)도 남아 있다. 여담으로 [[2020년]]과 음력 3~7월이 완전히 달력과 일치하고 윤 4월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2020년에 [[2020년 중국 폭우 사태|옆나라]][[2020년 일본 서남부 폭우 사태|들은]] 폭우가 일어났지만 한국에서는 장마전선이 북상하지 않았다 보니 [[부울경]] 등을 제외하고는 비가 적었으나 곧 [[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가 일어나고 [[2020년 7월 한반도 이상 저온|이상 저온]]까지 발생하서 2020년 역시 비가 많이 왔다.[* 다만 앞에서 설명했던 을축년 대홍수와 [[2020년 한반도 폭우 사태]]는 그 양상이 다르다.] 2022년에도 [[2022년 8월 수도권 홍수|서울에서 짧지만 강력한 폭우]]가 나타났다. 그리고 [[2023년 여름 한반도 폭우 사태|2023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분류:문화 통치기/사건사고]][[분류:한반도의 폭우]][[분류:1925년 재난]][[분류:홍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