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신군 (문서 편집) [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ffd400 '''은신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한제국의 황자/태조 ~ 고종)] ---- [include(틀:역대 계동궁 주인)]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F7C22, #6B8E23 20%, #6B8E23 80%, #5F7C22); color: #FFD400" '''계동궁 추존 궁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장조의 왕자[br]{{{+1 은신군 | 恩信君}}}'''}}}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황자[br]{{{+1 은신군 | 恩信君}}}'''}}} || ||<|2> '''출생''' ||[[1755년]] [[2월 21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771년]] [[5월 13일]] (향년 16세) || ||[[조선]] [[제주도]] 유배지[br](現 [[제주특별자치도]]) || ||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진(禛) || || '''부모''' ||부황 [[사도세자|장조 의황제]][br]모친 [[숙빈 임씨]] || || '''형제자매''' ||5남 3녀 중 4남 || || '''배우자'''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 (南陽郡夫人 南陽 洪氏, {{{-3 1755 ~ 1829}}}) || || '''자녀''' ||양자 [[남연군|1남]] || || '''작호''' ||'''은신군(恩信君)'''[* 봉호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인 은진(恩津)에서 유래했다.] || || '''시호''' ||소민공(昭愍公)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진(李禛). [[장조(조선)|장조]]의 4남으로, [[후궁]] [[숙빈 임씨]]의 차남. [[정조(조선)|정조]]의 두 번째 이복 동생이다. == 생애 == 12세가 되는 1767년에 홍대현[*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의 사촌]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4세 때 김구주 일당이 사치를 부린다고 모함해 친형인 [[은언군]]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고 [[제주특별자치도|제주]]로 귀양을 간다. 그 후 풍토병에 걸려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에 영조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아! 이번의 처분이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에는 지금까지 차마 못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본주(本州)의 계본(啓本)이 어제 도착하였는데, 중관(中官)이 혹시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머물러 두게 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알렸으니, 슬픈 마음을 어디다 비유하겠는가? 관재(棺材)는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가려서 지급하게 하고, 의금(衣衾)은 본현감(本縣監)으로 하여금 종신(宗臣)의 예(例)에 따라 살피고 단속하여 마음을 써서 거행하도록 하되, 우선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마음을 써서 운구(運柩)하도록 하라.〈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이 만약 함께 물고(物故)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특별히 석방하는 일을 당일 안에 배도(倍道)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의 처(妻)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하라.”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는 성(城)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왕실(王室)의 울타리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진은 지금 임금의 손자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의 죄가 아닌데 죽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례를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미칠 수가 없었다. == 사후와 후손 == 이복 형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한 뒤 복권받았고, '소민공(昭愍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는 은신군을 [[숙종(조선)|숙종]]의 6남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4010_001|#]] 그런데 이게 은신군이 죽은 후에 정한데다가, 연령군의 [[양자(가족)|양자]]인 [[낙천군]]의 양자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할아버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정조(조선)|정조]]가 밝히길 "은신군이 낙천군의 제사를 받들기 주저해서 곧장 연령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하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5011_001|#]] 생전에 입적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은신군도 자식이 없어서 한동안은 예관들이 대신 제사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년)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wa_11512015_002|#]],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 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고 인식했다. 1792년(정조 16년)에 편찬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적혀있었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고종 29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그의 후손들을 [[황족]] 자격으로 봉군할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시켰다. [[https://ko.wikipedia.org/wiki/은신군|#]] 그러나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97%B0%EB%A0%B9%EA%B5%B0%ED%8C%8C%5E%EC%97%B0%EB%A0%B9%EA%B5%B0%ED%8C%8C|《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 연령군파》]]에는 은신군이 [[연령군]]의 후계로 나와있다.[* 1면.] 그런데 낙천군을 건너 뛴 채 바로 은신군이 연령군의 대를 잇는 것으로 나왔다. 낙천군은 본가인 [[https://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3%5E%EA%B2%BD%EC%B0%BD%EA%B5%B0%ED%8C%8C%5E%EA%B2%BD%EC%B0%BD%EA%B5%B0%ED%8C%8C|《선원속보 - 선조대왕 자손록 권3 : 경창군파, 경평군파보》]]에 이름이 올라와있으며[* 25면.] '정조 때 특명으로 파양당한 뒤 본가로 돌아왔다(正廟朝特命罷歸本宗)'라고 쓰여있다. 그러니 남연군의 자손들은 항렬을 건너 뛴 채 연령군의 후손도 되고 사도세자의 후손도 되는, 족보 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놓였다. 이렇게 복잡한 연령군가의 계보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남연군의 후손들이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고,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남연군]]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다. 그 중 넷째가 바로 '''[[흥선대원군]]''', 그 차남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이다. 그래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부계 증조부 중 한 명이다.[* 고종에겐 '''부계 증조부가 3명(...)'''이었다. 실제 핏줄 상 생 증조부는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이고, 즉위 전 족보 상 증조부는 친할아버지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었다. 그리고 즉위할 때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 증조부는 [[정조(조선)|정조]]이다.] [[무덤|묘소]]는 처음에 [[제주도]]에 있었다가 [[한성부]] 근처로 옮겨왔다. 그러다 1779년([[정조(조선)|정조]] 3년) 11월에 경기도 양주군 금촌 이패리[*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에 있는 어머니 [[숙빈 임씨]] 묘소 옆으로 다시 옮겼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이장했다가 2000년대에 [[운현궁]] 4대 사손 [[이청]]이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들 [[의친왕|의친왕 이강]]의 2남이자 [[영선군|영선군 이준용]]의 [[양자(가족)|양자]].]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은신군 뿐 아니라 [[낙천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1882)|이문용]], 이우, [[이종#s-5|이종]][* [[이우]]의 아들이자 [[이청]]의 동생. 1966년 12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했다.]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 매체에서의 등장 == * [[이태리(배우)|이태리]][* 본명 이민호. 1993년 생으로 《[[순풍산부인과]]》의 정배, 《[[화정]]》에서 [[효종(조선)|효종]]을, 《[[뷰티인사이드(드라마)|뷰티인사이드]]》에서 정주환 역을 맡았다.] - 1998년 [[MBC]] 《[[대왕의 길]]》 == 둘러보기 ==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낙천군, version=60)]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서출]][[분류:1755년 출생]][[분류:1771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