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호지 (문서 편집)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익양장후(益陽壯侯)[br]{{{+1 垣護之 | 원호지}}}''' || || '''시호''' ||장(壯) || || '''작호''' ||익양현후(益陽縣侯) || || '''성''' ||원(垣) || || '''이름''' ||호지(護之) || || '''자''' ||언종(彦宗) || || '''생몰''' ||395년 ~ 464년 || || '''출신''' ||약양군(略陽郡) 환도현(桓道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의 장수로 자는 언종(彦宗). == 생애 == 약양군(略陽郡) 환도현(桓道縣) 출신으로 원호지의 조부 원창(垣敞)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서 장락국(長樂國) 낭중령(郞中令)을 지냈다. [[남연]]의 [[모용덕]]이 청주(靑州)에 입성할 때 원호지를 장사로 삼았다. 원호지의 백부인 원준(垣遵)과 부친인 원묘(垣苗)는 [[모용초]]로부터 신임을 받았다가 410년,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귀순하여 참군이 되었으며, 원가(元嘉) 연간에 원준은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를 지냈고 원묘는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지냈다. 원호지는 젊은 시절에 성품이 호방했고 사소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원호지는 비록 체격이 왜소하고 용모가 추했으나 기백과 재간은 굳세고 과감했다. 415년,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종군했으며, 유의부의 장사가 되고 참군을 겸임하였다. 420년, 유유가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유송을 건국한 뒤 원호지는 봉조청(奉朝請)으로 보임되었다. 원가 연간에 전중장군(殿中將軍)이 되었다. 430년, [[도언지]]의 북벌에 종군하였다. 도언지가 회군하려고 하자 원호지는 다음의 서신을 도언지에게 보냈다. >바깥에서는 절하께서 회군하려고 하신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오랑캐들은 우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동정을 살피다가 도망쳤으며, 8년 동안 점령되었던 땅은 싸우지 않고도 수복했습니다. 우리의 군대는 마땅히 삭막(朔漠)으로 진군하여 남아있는 추악한 무리를 소탕해야 하며, 하물며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우리는 원정의 노고를 달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축령수(竺靈秀)에게 활대(滑臺)로 재빨리 진군하여 주수지의 수비를 돕게 하고 절하의 대군이 하북으로 진군할 준비를 마쳤다면 호락(牢洛)의 잔재들이 자연스레 물러날 것입니다. 또한 옛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군대를 잃고 군량도 부족했는데, 오히려 용기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고 쉽게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청주는 식량이 풍족하고 제수(濟水)의 조운이 원활하며, 병사들은 배불리 먹고 편안하여 위엄과 병력은 잃지 않았습니다. 만약 활대를 포기한다면 앉아서 공업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장군에게 명을 내린 이유겠습니까? 그러나 도언지는 원호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은 원호지를 칭찬하여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의 참군, 북고평태수로 삼았다. 원호지는 금지된 물품을 사적으로 반입해서 상방(尙方)에 구금되었다가 오래 뒤에 사면을 받아 정북장군 형양왕(衡陽王) 유의계(劉義季)의 장류참군(長流參軍)으로 보임되었고 선위장군(宣威將軍), 종리군태수(鍾離郡太守)로 옮겼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395년 출생]][[분류:464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