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르바노 2세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59_b_urbano_II.png|height=125]] || || 제158대 [[빅토르 3세|복자 빅토르 3세]] || → ||<#806600> '''{{{#FFF 제159대 복자 우르바노 2세}}}''' || → || 제160대 [[파스칼 2세]]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59대 교황[br]{{{+1 우르바노 2세}}}[br]Urbanus I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0479041abc49bb8e5bc8927062261bb13c0f6ca13896f53f7c9dce4566fe169c.jpg|width=100%]]}}}|| || '''교황명''' || 우르바노 2세 (Urbanus II) || || '''본명''' || 오도 드라주리(Odo de Lagery) [br]혹은 외드 드샤티용(Eudes de Châtillon)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샹파뉴]] 라주리 ||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 '''생몰년도''' || 1035년 ~ 1099년 [[7월 29일]] || || '''재위기간''' || 1088년 [[3월 12일]] ~ 1099년 [[7월 29일]] || || '''시복''' || 1881년 [[7월 14일]], [[레오 13세]] || || '''축일''' || [[7월 29일]] || || '''언어별[br]명칭''' || [[라틴어]]: Beatus Urbanus II[br][[이탈리아어]]: Beato Papa Urbano II[br][[영어]]: Blessed Pope Urban II[br][[프랑스어]]: Pape Urbain II || [목차] [clearfix] == 개요 == >'''[[데우스 불트|Deus Vult]]!''' >'''하느님께서 (성전을) 원하신다!''' [[가톨릭]]의 제159대 [[교황]]. [[중세]]사에 큰 획을 그은 교황이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프랑스인]]으로는 2번째 교황이다. 국내 [[세계사]] 교육 과정에는 [[라틴어]] 발음대로 '''우르바누스 2세'''로 표기된다. == 교황이 되기까지 == 라주리의 오도[* [[교황]]이 되기 이전의 세속명.]는 1035년 [[프랑스]] 상파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랭스]]에서 성 브루노의 제자로서 1064년 [[수도자]]가 되어 [[클뤼니 대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을 도왔고, 1078년에는 [[오스티아]]의 [[주교]]가 되었다. 1084년 [[신성 로마 제국]]에 [[교황청]] 사절로 파견되어 [[퀘들린부르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립교황]]과 추종자들을 단죄하였고, 1088년 3월 12일 교황 [[빅토르 3세]]를 계승하였다. == 개혁을 지속하다 == [[교황]]의 자리에 오른 후, 우르바노 2세는 [[그레고리오 7세]]와 [[빅토르 3세]] 시대를 거치는 동안 쌓인 문제들을 떠안아야 했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가 밀어붙인 [[개혁]]의 원칙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전임 교황들의 문제 때문에 일단은 신중한 타협책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교황권이 확고해지자 그는 강경책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영토를 [[레콩키스타|재정복]]하여 [[아라곤]]과 [[카탈루냐]] 등을 교황령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또한 [[교황령]]이 [[신성 로마 제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시칠리아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1098년 7월 5일에는 시칠리아 영토를 교황에게 헌납한 [[대공(작위)|대공]] 로제리오 1세에게 준교황 사절의 권한을 부여하고 칙서로써 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서로 동맹을 맺어 교황을 압박하는 것을 염려하여, 동로마 제국과도 협상을 시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 클레르몽 [[공의회]]와 그 이후 == 교황은 1089년 멜피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는 평신도에 대한 성직 수여,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혼인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또한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이전의 칙서를 더 강화하는 한편, 기존 교황청의 입장을 지속하여 앞으로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싸우지 않을 것[* Pax Dei, 즉 [[야훼|하느님]]의 평화라고 부른다. 13세기까지 지속된 [[기독교]] 교계의 이념이었다.]을 교회법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본처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를 크게 꾸짖었다. 무엇보다도 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예루살렘|성지]] 탈환과 분열된 [[동방정교회]]와의 재일치를 주장하여, '''[[데우스 불트|"하느님께서 원하신다!"]]'''다는 말과 함께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 우르바노 2세는 자신의 대리자로서 [[아데마르]] [[주교]]를 [[십자군]]의 [[정치장교|총사령관]][* 사실 1차 십자군의 총사령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제후들이 단합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도 총사령관이 없어 지휘계통의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데마르]] 주교가 1차 십자군의 구심점이 된 것은 맞다. 그는 전투적인 능력도 출중했고, 고드프루아와 보에몽, 레몽 사이의 다툼을 잘 중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공방전 때 역병으로 사망한 후 제후들 사이는 벌어진다.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이에 대한 의지가 없었으면 1차 십자군은 실패했을 것이다.]으로 임명하였으나,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2주일 전에 선종하였고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그의 [[시복식]]은 사후 800년이 지난 1881년 7월 1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거행되었다. [각주] [[분류:시복된 교황]][[분류:십자군 전쟁/관련인물]][[분류:1035년 출생]][[분류:1099년 사망]][[분류:프랑스인 교황]][[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분류:마른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