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부(후한)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삼국시대(중국)와 서진의 인물, rd1=왕부, other2=촉한의 인물, rd2=왕부(촉한))] [include(틀:후한서)] 王符 (83 ~ 170)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절신(節信)으로 양주 안정군 임경현 사람. == 생애 ==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마융]], 두장, 장형 등과 친했다. 당시 안정의 풍속에는 서얼을 하찮게 여겼으며, 왕부는 외가도 없었고 지방 사람들의 천대를 받았다. 당시 왕부는 천거되었지만 왕부는 은거해 당시의 정치, 도덕의 장단점을 지적하는 30여 편의 책을 지었고 이름을 밝히기 싫어서 이를 잠부론이라 했다. 후에 [[황보규]]가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자가 명함을 내밀고 찾아오자 누운 채로 제 때에 일어나지 않고 군에서 기러기를 먹었는데 맛있냐고 물어 뇌물로 안문태수를 얻은 것을 비꼬았다. 잠시 후 왕부가 문에 있다고 하자 황급히 일어나 허리띠도 두르지 못하고 신발을 끌고 나와서 손을 잡아 끌고 들어와 앉았는데, 극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봉천 2천 석의 벼슬 아치를 만나는 것이 일개 유생을 만나는 것만 못하다고 했으며, 왕부는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죽었다. 후한서는 왕부와 [[왕충(후한)|왕충]], 그리고 [[중장통]]을 한 열전으로 묶었는데, 세 사람 모두 기존의 유학을 비판적으로 해석한[* 특히 전한 이후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사상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에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충과 중장통의 주장은 동중서와 커다란 차이점이 있으며, 왕부는 이들에 비해 덜하지만 동중서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욱 중시하였다.] 체제비판적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왕부, version=27, paragraph=1)] [[분류:후한의 인물]][[분류:83년 출생]][[분류:170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