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향 (문서 편집) [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include(틀:고려의 문하시중)] ||<-2> '''{{{#white 한국 성리학의 시조[br]{{{+1 안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향 초상.jpg|width=100%]]}}}[br][[대한민국의 국보|{{{#fff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 || || '''이름''' ||향(珦) →유(裕)[* [[문종(조선)]]의 이름(珦)과 겹쳐서 조선 조정에서 논의 끝에 문종의 이름은 유지하고 안향의 이름을 초명인 유(裕)로 바꿔 사용. [[순흥 안씨]] 옛 족보에는 안유(安裕)라고만 나오는 경우도 있음.] || || '''시호''' ||'''[[문성공]](文成公)''' || || '''본관''' ||[[순흥 안씨]][* 순흥은 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을 가리킨다.] || || '''자''' ||사온(士蘊) || || '''호''' ||회헌(晦軒) || ||<|2> '''출생''' ||[[1243년]]([[고종(고려)|고종]] 30) || ||[[경상도]] [[순흥면|흥주]] 상평리[br](現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상평동) || || '''사망'''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 (향년 63세)|| ||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width=28]] [[고려]]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학자]] · [[정치가]].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자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로 [[본관]]은 흥녕(興寧)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아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안향의 본관인 흥녕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으로 흥녕 안씨는 바로 지금의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주자(철학자)|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함으로써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를 등장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안향 자신도 흥주(흥녕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대)의 중소 지주층 출신의 [[사대부]]였다. 안향을 시작으로 한 신진사대부의 정계 등장은 질서가 무너져가던 고려를 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동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을 중심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도학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문묘]]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도 흥성했으며 지금의 순흥 안씨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일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안향이 [[노비]]들을 [[성균관]]을 위해 일하라고 보내어 그 후손들이 대대로 반촌([[한성부]]에서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에 살았는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며 극진히 대했다. 결정적으로 [[안중근]], [[안철수]] 등이 안향의 먼 후손들이다.] == 생애 == 1243년(고종 30년) [[경상도]] 흥주(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흥주의 향족이었던 안부(安孚 / 1220 - ?)와 강주 우씨(剛州禹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유의 아버지 안부는 흥녕 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안자미(安子美)의 손자로 흥녕 안씨 일족은 흥주의 토착 향족 출신 [[가문]]이었다. 안부 또한 흥주의 [[향리]]로 있다가 [[개성시|개경]]으로 상경해 의업(醫業)으로 출세하여 이후 정3품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판도판서(判圖判書)에 이르러 치사([[관직]]에서 [[은퇴]]하는 것)하였으며 어머니 우씨는 예빈승(禮賓丞)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학문]]에 밝았던 안유는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18세의 나이에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이름을 향(珦)으로 고쳤다. 직후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겨 10년 가까이 재임했다.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의 난]] 때 강도(江都 : 지금의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원종 13년)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강도 탈출의 일로 [[원종(고려)|원종]]의 신임을 얻어 이름을 알리게 된다. 1275년(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는데 [[미신]]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며 재산을 축적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 등 [[상주시|상주]]에서는 [[무당]]들의 행패가 심했다. 이에 안향은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기 위해 무당들을 잡아다 엄히 다스렸으며 다시는 사특한 농간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상주의 [[풍속]]이 바로잡혔다. 이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左承旨)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2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고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11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하여 직접 [[원나라]]에 가서 주자의 저작들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1290년(충렬왕 16년) 고려로 돌아왔으며 1290년 3월 종2품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다. 문신이었지만 무재(武才)도 있었던 듯하다. 1294년(충렬왕 20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출진하기도 했으며 지공거(知貢擧)로 옮겼다가 12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使)로 보직되었다. 1295년(충렬왕 21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했으며 1296년(충렬왕 22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전직했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 원행을 다녀왔다. 1297년(충렬왕 23년)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으며 12월 집 뒤에 작은 서실을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충렬왕 24년/충선왕 원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장(璋)이 [[충선왕]]으로 즉위하면서 시행된 관제 [[개혁]]에 따라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 동경유수 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1298년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는데 그의 3번째 원나라 여정이었으며 생애 마지막 [[국외]] 활동이 된다. 1299년(충렬왕 복위 원년)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자 1300년(충렬왕 복위 1년)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이어서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최고 관위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충렬왕 복위 4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현재의 [[난징시|난징]](南京).)에 보내어 공자와 72현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의 저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충렬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 때 무신인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관]]인데 어찌하여 [[문관]]을 양성하는 양현고에 [[재산]]을 내야 하는가하며 거부하자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만세의 규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무인인 내가 무엇하러 돈을 내어 문인 생도들을 가르치는데 보태느냐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가당한 일인가?"라는 말로 힐책하여 고세도 양현고에 재산을 내게 하였다. 1303년 12월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 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충렬왕 복위 5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고 박사(博士) 관직을 설치하여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오늘날의 장학재단 같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1304년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는데 도첨의중찬은 [[재상]]의 관직에 해당한다. 관직에서 물러난지 2년이 지난 1306년(충렬왕 복위 7년) 9월 12일에 64세를 일기로 개경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향이 세상을 떠나자 국자감과 사학 [[12공도]]의 생도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안향의 가는 길을 마중했다고 한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 뒤 충렬왕은 직접 장단(長湍 : 경기도 장단군)의 대덕산(大德山)에 장지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의 [[장례]]가 끝나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향은 이후의 사대부들에게 도학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성인으로 떠받들어졌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제사]]를 모실 정도로 [[학자]]들에게 숭앙받았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지 12년이 지난 1318년(충숙왕 5년)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원나라 화공을 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초상은 이후 안향의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조선 [[명종(조선)|명종]] 때 다시 복제하였는데 복제본이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회헌영정(晦軒影幀)이다.] 초상화가 그려진 다음 해인 1319년(충숙왕 6년) 문묘에 안향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문묘가 다시 지어진 뒤에도 안향의 신위는 제향신위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안향은 조선 [[문종(조선)|문종]] 이후로는 안유(安裕)라는 초명이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불리게 되는데 문종의 [[이름]]이 안향과 같은 '옥이름 향(珦)'이었으므로 [[피휘]]를 위해 초명으로 부른 데에서 기인한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의 생가가 있던 내죽리(內竹里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의 학사를 안향의 사당으로 옮겼는데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1549년(명종 4년)에는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퇴계 [[이황]](李滉)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명종의 친필로 쓰여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는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시작으로 300년 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철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소수서원은 지금도 유적지로 남아있으며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도 이 곳에서 봉안하고 있다. 지금은 그 인근인 순흥면 청구리에 안향, 주세붕, 주자 등의 인물들의 [[유적]]을 소개하는 소수[[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1643년(인조 21년) 안향의 묘소 근처인 봉잠산(鳳岑山) 기슭에 장단군의 유생들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워 안향을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전라남도]] [[곡성군]]에도 안향의 영정을 모신 회헌영당(晦軒影堂)이 세워졌다. [[1931년]] 안향의 후손 안순환은 [[중원대전]] 중 공묘가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 유림계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공자의 77대 종손 [[쿵더청]]을 만나 위로하였다. == 사상 == 안향은 '''일상생활에서 유학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유학이야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사실상 유일하게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원나라에서 접하고, 직접 그것을 연구하며 고려로 가져와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여 사실상 한국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인물이 이진[* [[이제현]]의 아버지.], [[권부]][* [[이제현]]의 장인], 우탁, 백이정[* [[이제현]]의 스승], [[이조년]][*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조부], 신천. 또한 성리학의 개조인 [[주자(철학자)|주자]]를 존경하고, 그의 호인 회암(晦菴)에서 회(晦)를 따와서 스스로의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할 정도로 주자성리학을 깊이 따랐다. 그러나 태극이나 기를 논하는 차원이 아닌, 배움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배우기 위해 성리학을 권장했고, 성리학이 뿌리를 내린 조선시대로 가면서 안향의 원론적인 성리학 이념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조선)|이이]], 남명 [[조식(조선)|조식]], 화담 [[서경덕]]등에 의해 태극과 기, 우주를 논하는 심오한 체계를 굳혔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조선의 골자로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불교 국가였던 고려의 유학자인 안향이 생각했던 올바른 유학의 모습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성리학을 교조화마며 틀어지게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고려사)] [각주] [[분류:고려의 인물]][[분류:고려의 성리학자]][[분류:1243년 출생]][[분류:1306년 사망]][[분류:영주시 출신 인물]][[분류:순흥 안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