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정왕후 조씨 (문서 편집)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신정익황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추존 왕비)]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include(틀:역대 조선 대왕대비)] ---- [include(틀:역대 조선 수렴청정)] ---- [include(틀:대한제국 추존 황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조선 효명세자의 세자빈[br]{{{+1 왕세자빈 조씨 | 王世子嬪 趙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 시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문조의 왕비[br]{{{+1 신정왕후 | 神貞王后}}}'''}}}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대한제국 문조의 황후[br]{{{+1 신정익황후 | 神貞翼皇后}}}'''}}}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헌종 · 철종조 왕대비[br]{{{+1 효유왕대비 | 孝裕王大妃}}}'''}}}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철종 · 고종조 대왕대비[br]{{{+1 효유대왕대비 | 孝裕大王大妃}}}'''}}}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nWz5dwE.png|width=100%]]}}} || ||<-2> {{{#ffd400 {{{-2 신정왕후 추정 초상화[* 추정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6/2009020601138.html|참조]]]}}} }}} || ||<|2> '''출생''' ||[[1809년]] [[1월 9일]][br]{{{-2 ([[음력]] [[1808년]] [[12월 6일]])}}} || ||[[조선]] [[한성부|한성부 남부]] 두모방 두모포계 쌍호정 사저[br](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독서당로]]40길 25 일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04507&cid=49352&categoryId=49352|#]]] || ||<|2> '''사망''' ||[[1890년]] [[5월 23일]]^^([[음력]] [[4월 17일]])^^[br]{{{-1 (향년 81세)}}} || ||[[조선]] [[한성부]] [[경복궁 흥복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 || '''능묘''' ||[[수릉]](綏陵) || ||<|8>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819년]] [[11월 16일]] ~ [[1830년]] [[6월 13일]] || ||'''{{{#ffd400 조선 왕대비}}}''' || ||[[1834년]] [[12월 7일]] ~ [[1857년]] [[9월 15일]] || ||'''{{{#ffd400 조선 대왕대비}}}''' || ||[[1857년]] [[9월 15일]] ~ [[1890년]] [[5월 23일]] || ||'''{{{#ffd400 조선 대왕대비 | 조선 국왕 수렴청정}}}''' || ||[[1864년]] [[1월 4일]] ~ [[1866년]] [[3월 1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풍양 조씨]] || || '''부모''' ||부친 풍은부원군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3 1776 ~ 1846}}}) 모친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德安府夫人 恩津 宋氏, {{{-3 1776 ~ 1834}}}) || || '''형제자매''' ||2남 4녀 중 장녀 || || '''배우자''' ||[[효명세자|문조 익황제]] || || '''자녀''' ||슬하 [[헌종(조선)|1남]] (+양자 [[고종(대한제국)|1남]]) || || '''전호''' ||효모전(孝慕殿) || || '''존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br]('''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br]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br](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br]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br](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 || || '''휘호''' ||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br](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 || || '''시호''' ||'''[[조선]]''': '''신정왕후(神貞王后)''' ---- '''[[대한제국]]''':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추존]][[조선/왕사|왕]] '''문조([[효명세자]])의 [[왕비|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 대비인 [[철인왕후]]가 1878년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1890년에 사망한 뒤에도 [[효정왕후]] 홍씨는 대왕대비로 승봉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남았으며 대한제국 이후에도 태황태후가 아닌 태후가 되었다.] [[헌종(조선)|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양어머니이며, [[순조]]와 [[순원왕후]]의 며느리이다. [[조선]] 말 '다섯 전하' 중에 가장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인물이기도 하며,[* 대왕대비 익종비(효명세자빈) 신정왕후 - 왕대비 헌종비 [[효정왕후]] - 대비 철종비 [[철인왕후]]- [[고종(대한제국)|고종]] - 중전 고종비 [[명성황후]] 순.]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4개월 11일)하였으며, 가장 오랜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 [[한국근현대사]]에서 흔히 말하는 ''''조 대비''''가 이 사람이다. [[대비]]로서의 공식 명칭은 [[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지만, 후대에는 '조 대비'가 통칭으로 굳어졌다.[* '조 대비'라 불린 다른 인물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장렬왕후 조씨]]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선 [[장렬왕후]]보다 신정왕후가 조 대비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세도정치]] 시기,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들여온 [[조엄(조선)|조엄]]이 그녀의 증조부다. 또한 증조모인 홍씨부인은 홍현보의 딸이자 [[홍봉한]], [[홍인한]]의 여동생으로 [[혜경궁 홍씨]]의 [[고모]]이기도 하다. 부계로는 [[선조(조선)|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송준길]]의 7대손이다.] == 생애 == === 왕세자빈 ===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송씨]][* [[송준길]]의 6대손이다. [[송준길]]의 외손녀가 그 유명한 '''[[인현왕후]]'''며, 증손녀사위 김제겸의 후손들이 그 유명한 '''[[순원왕후]]''', '''[[효현왕후]]''', '''[[철인왕후]]'''다.]의 장녀로 태어나서 [[1819년]](순조 19년) 10월 11일에 [[세자빈|왕세자빈]]이 되었다.[* 이때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무단 반출되었다.] >'''숭정전에서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행하다''' >----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왕세자빈의 책빈례(冊嬪禮)를 행하였다. >교명문(敎命文)[* 왕비(王妃)·빈(嬪) 또는 세자(世子)를 책봉할 때 훈유(訓諭)하는 글. 즉 [[세자빈]]을 책봉할 때 [[순조]]의 하교를 말함.]에 이르기를, >>"[[순조|임금]]은 말한다. [[조선/왕사|정체]](正體)를 계승하여 [[왕세자|대본]](大本)으로 삼았으니 나라에서 세자보다 높은 경우가 없고, >>세자를 짝지을 적엔 반드시 나라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기다리니 예(禮)는 육빙(六聘, 육례를 갖춘 빙례)보다 도타운 것이 없다. >>하늘이 지은 배필이요, 땅의 도리는 끝맺음이 있다. 생각건대, 세자의 현명함은 온 백성의 소망이 매여 있다. >>나이를 따져 차례로 삼는 것을 배워 삼가례(三加禮)를 다하니 만방의 정숙(貞淑)으로 밝게 들리고, 세자를 가군(家君)으로 하여 >>그 법을 살피니 좋은 배필로 1백 채의 수레로 맞이함이 마땅하다. 곤위(坤位)로서의 상(象)이 없었으면, 어찌 세자의 짝이 되겠는가? >>아! '''[[풍양 조씨|조씨]](趙氏)'''는 대대로 벼슬한 집안이요, 해맑은 좋은 자질이다. 길한 경사와 상선(祥善)이 선대에 쌓여 그 몸에 모였으며, >>정정(貞靜)과 화유(和柔)는 천성으로 타고나서 얼굴에 드러났다. 얌전하고 아름다움을 점쳐 협화(協和)하였으니, >>경사(卿士)들에게 상의하여 어김이 없었노라. 백복(百福)의 근원을 열었고, 이성(二姓)이 화호(和好)를 돈독히 하였다. >>(중략) >>여염 백성들의 은미함을 살펴서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 더구나 [[종묘]]의 신령을 이음에 감히 공승(共承)을 소홀히 하겠는가? >>아! [[효명세자|남편]]에 대한 공경은 효경(孝敬)에 근본하여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과 복록을 얻어 창성하기에 한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상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순조]]의 유일한 손자인 원손([[헌종(조선)|헌종]])을 낳았다.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다 대신들이 하례 하다''' >---- >세자빈이 '''[[헌종(조선)|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조선/왕사|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묘]]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臣)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 하지만 [[1830년]](순조 30년)에 남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22살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같은해 9월, 아들 [[헌종(조선)|헌종]]이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시아버지 [[순조]]도 [[죽음|승하]]함에 따라, 고작 8세 밖에 안 된 어린 아들 [[헌종(조선)|헌종]]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른다. === 왕대비 === [[효명세자|남편]]이 [[조선/왕사|왕]]이 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왕비|중전]]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들 [[헌종(조선)|헌종]]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추숭]]함에 따라 어머니인 그녀도 [[왕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대비]]가 되었다. [[1836년]](헌종 2년),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다''' >---- >대왕 대비전에 '''문인(文仁)'''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전에 '''효유(孝裕)'''의 존호를 올렸는데, 존숭(尊崇)하는 것이었다. >----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0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문인명경대왕대비)만큼은 아니지만, [[대비]]이자 [[헌종(조선)|왕]]의 [[어머니|생모]]로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겼기에, 그녀의 친정 가문인 [[풍양 조씨]]는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만큼은 아니지만 [[세도정치]] 기간 동안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헌종(조선)|헌종]] 시기, '''결국 시가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친정인 [[풍양 조씨]]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행되었다.''' 어떤 면에선 [[소혜왕후]]([[인수대비]])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를 적대하거나 압도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천하가 된 [[철종(조선)|철종]] 연간에도 [[헌종(조선)|헌종]]이 총애한 조병헌을 제외한 [[풍양 조씨]]들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해코지 당한 적이 없으며,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가 사실상 만든 《[[헌종실록]]》이나 《[[철종실록]]》에도 [[조인영]], [[조만영]] 등 [[풍양 조씨]] 유력 인물들이 우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가문이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었다.[* 단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두 가문에서 [[조선/왕사|왕위]] 관련, 혹은 [[왕비|중전]]의 자리를 누구의 가문에서 낼 것인가, 또는 주요 관직에 누구 가문 쪽 사람을 많이 앉힐까에 정치적으로 경쟁, 견제하는 스타일이지, 사극 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자기 가문을 앉히기 위해 상대 가문을 죽이거나 유배보내는' 그런 행위는 각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또 보이지 않는다.] 한편 [[1847년]](헌종 13년), 40세를 맞이하여 [[창덕궁 인정전]]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조선)|헌종]]이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그러다가 [[1849년]](헌종 15년)에 [[헌종(조선)|헌종]]이 후사없이 갑작스럽게 이른 나이에 [[죽음|승하]]하면서 [[정조(조선)|정조]]계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는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캐던 강화도령 [[철종(조선)|철종]], 즉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전계대원군|전계군]]의 서자(3남) 이원범을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 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군하고 [[조선/왕사|왕위]]에 옹립하였다. [[헌종(조선)|헌종]] [[죽음|승하]]시 [[영조]]의 후손은 [[전계군|전계군 이광]]의 아들인 [[철종(조선)|철종]]밖에 남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헌종실록]]》 16권, 헌종 15년([[1849년]],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 (임신) 14번째 기사'''에 따르면, “[[종묘|종]][[사직|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조|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헌종(조선)|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철종(조선)|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묘|종]][[사직|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전계대원군|광]](㼅)의 셋째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철종(조선)|철종]]의 이복형 [[영평군(1828)|영평군]]과 [[은언군|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이 있긴 했는데 어차피 이 둘도 처지는 [[철종(조선)|철종]]하고 똑같았던지라 별 의미가 없었다.] === 대왕대비 === [[1857년]](철종 8년)에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죽음|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최고 어른[* [[철종(조선)|철종]]이 [[순조]]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는 형식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철종(조선)|철종]]의 아내인 [[철인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랫동서가 되고 [[헌종(조선)|헌종]]의 아내인 [[효정왕후]]에겐 숙모가 된다.]이 된다.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에 [[철종(조선)|철종]]도 후사 없이 [[죽음|승하]]하자 신정왕후가 [[조선/왕사|차기 국왕]]을 선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이때 [[옥새]]를 확보한 [[안동 김씨]][* [[옥새]]와 내탕고의 열쇠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중전]]이 보관하는데 [[철인왕후]]의 친정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였다. 혹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의 충고대로 [[철종(조선)|철종]]이 죽자마자 신정왕후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이 [[옥새]]를 찾으려 들기 전 미리 [[옥새]]를 찾아 보관해 두었다는 말이 있다.]에 맞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교지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다만 그녀가 지명한 [[조선/왕사|차기 국왕]]이 하필이면 [[고종(대한제국)|흥선군의 차남 명복]]인 걸 보면 정황상 [[흥선대원군|흥선군]]과 그녀 사이에 [[조선/왕사|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비밀 커넥션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록에는 이들의 커넥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야사(역사)|야사]]도 그렇고 몇몇 정황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흥선대원군|흥선군]]은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효명세자|익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조선/왕사|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면서 결국 [[흥선대원군|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대한제국)|이명복]]을 [[효명세자|익종]]과 자신의 [[양자(가족)|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군하여 즉위시켰다. >'''대왕대비가 국상 중에 정사를 대리할 사람을 정하였고 철종의 뒤를 흥선군의 두 번째 아들로 정하다''' >----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창덕궁 중희당|중희당]](重熙堂)'''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신하와 백성들이 복이 없어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했으니 애통하고 원통하여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죽지 못해 사는 이 몸이 차마 망극하고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나니 그저 원통한 생각뿐이다. >>지금 나라의 형세의 안위가 시각을 다투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을 청해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큰 계책을 의논하여 정하려는 것이다." >(중략)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흥선대원군|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에서 둘째 아들 '''[[고종(대한제국)|이명복]](李命福)'''으로 >>'''[[효명세자|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조선/왕사|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기로 작정하였다."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2번째기사''' 고종이 당시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대왕대비]]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법적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부인 [[흥선군]]이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고종(대한제국)|국왕]]의 [[흥선대원군|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신정왕후는 중앙과 지방에 다음과 같이 유시하여 방계 혈통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조선/왕사|정통성]]을 천명하였다. >'''대왕대비가 정통을 이은 것에 대한 교서를 내리다''' >----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계책을 정하여 전교한 가운데 '''[[조선/왕사|대통]](大統)'''이라고 한 것은 큰 윤리를 말한 것이다. >>[[정조(조선)|정조]] · [[순조]] · [[효명세자|익종]] · [[헌종(조선)|헌종]]의 계통이 전해져 대행 대왕([[철종(조선)|철종]])에 이르고 [[고종(대한제국)|주상]]께서 이어받았으니, >>어찌 두 계통이라고 의심을 가지겠는가? >> >>그러므로 [[효명세자|익종]]은 '''황고(皇考)'''라 칭하고 [[헌종(조선)|헌종]]은 '''황형(皇兄)'''이라 칭하며, >>[[철종(조선)|대행 대왕]]은 '''황숙고(皇叔考)''', '''효종자(孝從子)'''라고 칭하라. >하였다. >---- >-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30일 (임인) 6번째기사''' 이후 3년이 지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15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는 말도 있는데,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가 [[흥선대원군|흥선군]]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명목상으로는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의 막후(섭정) 정치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그만두다''' >'''__수렴청정을 거두겠다는 대왕대비의 하교__''' >---- >>내가 미망인으로 지극히 중대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예로부터 [[왕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덕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옛날의 현명한 왕후들과 비슷이나 하겠는가? >> >>그런데 온 나라가 망극한 때를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역대 임금의 사적을 들어 눈물을 흘리며 요청했고, >>나도 '''[[종묘]] [[사직]]'''이 큰 근본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윤허하였다. >> >>그러나 지금은 [[고종(대한제국)|주상]]의 나이가 이미 장성했고, >>[[고종(대한제국)|성상]]의 성품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으로서 슬기로운 지혜가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중요한 공무를 밝게 익히고 학문이 독실하니, 모든 정사를 직접 맡아 처리할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體貌, 체면)'''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 >> >>오늘부터 크고 작은 공무를 일체 [[고종(대한제국)|주상]]이 총괄 처리하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며 >>대신을 예우하고 대대로 녹봉을 받는 신하를 보전하며 >>[[조선/왕사|우리 선대 임금]]의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고종(대한제국)|주상]]은 힘쓸 것이다. >> >>다 같이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인도하고 바로잡아 우리의 끝없는 국운을 >>견고하게 하도록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기대한다. >하였다. >---- >-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2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다만 아주 물러난 것은 아니고 여전히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와 의논하여 새 개혁 정책을 짜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입을 빌리거나 [[비망록|비망기]](備忘記)를 내리는 형식으로 여전히 조정의 권력의 한 축이었고, 어찌보면 [[흥선대원군|대원군]]의 개혁 파트너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개혁 파트너 설은 [[박시백]] 역시 주장하였지만,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주도적 위치에서는 완전히 빠진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풍양 조씨|친정]]에게 주려는 특혜에 반대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신정왕후가 자신 [[풍양 조씨|친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조건적으로 키우려고 한 게 아닐 가능성이 크고,[* 바로 얼마전까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전]][[삼정의 문란|횡]]이 있었는데 눈치 없이 나섰다가는 괜히 미운털 박힐 수 있다. [[흥선대원군|흥선군]]과 손잡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옹립할 정도인 그녀가 그 정도 머리도 돌아가지 않을 리 없다.] [[조선/왕실|왕실]]의 법도를 보면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인 그녀의 뜻을 거스르고 [[흥선대원군|대원군]]이 [[고종(대한제국)|왕]]의 [[아버지|생부]]란 이유로 [[며느리]]를 멋대로 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법적으로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익종(=[[효명세자]])의 아들이므로 법적으로는 신정왕후가 어머니로 더 가까웠다.] [[조선/왕사|왕]]의 [[결혼]]은 [[대비]]를 포함한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기 때문. 만약 진짜로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신정왕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여흥 민씨|외가]] 쪽 친척인 [[명성왕후|명성황후 민씨]]를 밀었다면 오히려 이게 기존의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아무래도 [[야사(역사)|야사]]인 듯. [[최익현]]의 세 차례 [[탄핵]] [[상소]]로 인한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가 아버지이자 시아버지를 내쳤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흥선대원군|대원군]]이 아닌 신정왕후의 아들 및 며느리라는 걸 궁궐 대, 내외에 보여서 자신들의 [[조선/왕사|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신정왕후를 매우 극진히 모셨다. [[갑신정변]]이 터졌을 때는 [[궁녀]]들에게 업혀다니면서 여기저기로 피해다니기도 했다.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나이인 81세를 일기로 [[1890년]](고종 27년)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죽음|승하]]하였다. >'''대왕대비전께서 승하하다''' >----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죽음|승하]]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5번째기사'''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다''' >---- >전교하기를, >>"효성이 부족하여 오늘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경복궁 흥복전|흥복전]](興福殿)'''에서 [[죽음|승하]](昇遐)하셨다. 망극한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 >하고, 이어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 >-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1890년]], 청 광서(光緒) 16년) 4월 17일 (병진) 6번째기사''' 생몰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1890년]](고종 27년)까지 살았기 때문에 개화([[강화도 조약]])가 진행되는 것도 지켜보았던 인물. 연도만 보면 잘 감이 안올 수 있는데, [[제중원]](1885년), [[이화학당]] 설립(1886년), [[영어]] 등 서양 외국어 교육 실시(육영공원 설입,1886년), [[경복궁]]에 [[전기]]가 들어올 때도(1887년) 생존해 있었다. 그래서 신정왕후의 3년상을 [[전화기]]를 써서 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장 그의 장례식 리허설에는 지구 반대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온 블라디미르 폰 키텔의 사절단도 참관했다. [[혜경궁 홍씨|혜경궁]]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 사람도 오래 산 만큼 많은 아픔을 겪었다. 남편 [[효명세자]]와 아들 [[헌종(조선)|헌종]]이 모두 20대 초반에 [[요절]]했던 만큼 외로움과 한이 컸을 것이다. === 사후 === [[시호]]는 '''신정(神貞)'''이며 백성들이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원대한 계책을 성취한 것을 '정(貞)'이라 한다. 능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경내에 남편 [[효명세자|문조]]와 합장릉의 형식으로 함께 합장되어 있는 '''수릉(綏陵)'''이다. == 가계 == === 친가([[풍양 조씨]]) === * '''고조부 : 조상경(趙尙絅)''' * '''고조모 : 증 정경부인 이씨(贈 貞敬夫人 李氏)''' * '''증조부 : 문익공(文益公) [[조엄(조선)|조엄]](趙曮)'''[*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를 보급한 인물이다.] * '''증조모 : 정경부인 [[풍산 홍씨|홍씨]](貞敬夫人 洪氏)'''[* 정경부인 홍씨가 바로 [[혜경궁 홍씨]]의 조부인 홍현보의 딸이자 [[홍봉한]]·[[홍인한]]의 여동생이므로 [[혜경궁 홍씨]]한테는 [[고모]]가 된다. 그래서 신정왕후에게 있어서 [[혜경궁 홍씨]]는 시가 항렬을 따지면 '''시증조모할머니와 증손자며느리 관계'''이지만, 친가로 따지면 '''7촌 당고모-조카 사이'''가 되는 것이다.] * '''조부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진관(趙鎭寬)''' * '''조모 : 부부인 [[남양 홍씨|홍씨]](府夫人 洪氏)''' * '''아버지 : 충경공 증 영의정 풍원부원군(忠敬公 贈 領議政 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 '''어머니 :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송씨]](德安府夫人 宋氏)''' * 오빠 : 조병구(趙秉龜) * 올케 : 부인 [[우봉 이씨|이씨]](夫人 李氏) * 양조카 : 문헌공 의정부 좌참찬(文獻公 議政府左參贊) 조성하(趙成夏) * 남동생 : 조병기(趙秉夔)[* 남동생 조병기는 작은아버지 [[조인영]]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되었다.] * 올케 : 부인 [[안동 김씨|김씨]](夫人 金氏) * 양조카 : 예조판서(禮曹判書) [[조영하]](趙寧夏) * 여동생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제부 : 이인설(李寅卨) * 둘째여동생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제부 : 유치선(兪致善) * 막내여동생 : 부인 [[풍양 조씨|조씨]](夫人 趙氏) * 제부 : 김석현(金奭鉉) === 외가([[은진 송씨]]) === * '''외조부 : 송시연(宋時淵)'''[* [[송준길]]의 직계 6대손이다.] * '''외조모 : 부인 [[안동 김씨|김씨]](夫人 金氏)'''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 '''시조부 : [[정조(조선)|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 '''시조모 : [[수빈 박씨|현목수비]] [[반남 박씨|박씨]](顯穆綏妃 朴氏)'''[* 혈연상 시조모는 [[수빈 박씨]]가 맞으나 법적인 시조모는 [[효의왕후|효의선황후]]가 맞다.] * '''시아버지 : [[순조|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 '''시어머니 : [[순원왕후|순원숙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純元肅皇后 金氏)''' * '''시누이 : [[명온공주]](明溫公主)''' * 시매부 :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 '''시누이 : [[복온공주]](福溫公主)''' * 시매부 :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 '''시누이 : [[덕온공주]](德溫公主)''' * 시매부 :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 '''양시숙 : [[철종(조선)|철종 장황제]](哲宗 章皇帝) 이원범/이변(李元範/李昪)''' * '''양동서 : [[철인왕후|철인장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哲仁章皇后 金氏)''' ==== 배우자 / 자녀 ==== * '''남편 : ^^([[추존]])^^[[효명세자|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 '''장남 : ^^([[추존]])^^[[헌종(조선)|헌종 성황제]](憲宗 成皇帝) 이환(李烉)''' * '''며느리 : ^^([[추존]])^^[[효현왕후|효현성황후]] [[신 안동 김씨|김씨]](孝顯成皇后 金氏)''' * '''며느리 : ^^([[추존]])^^[[효정왕후|효정성황후]] [[남양 홍씨|홍씨]](孝定成皇后 洪氏)''' * '''양차남 : [[고종(대한제국)|고종 광무 태황제]](高宗 光武 太皇帝) 이재황/이형/이희(李載晃/李㷗/李熙)''' * '''양며느리 : ^^([[추존]])^^[[명성황후|명성태황후]] [[여흥 민씨|민씨]](明成太皇后 閔氏)''' * '''양손자 : [[순종(대한제국)|순종 융희 효황제]](純宗 隆熙 孝皇帝) 이척(李坧)''' * '''양며느리 :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엄씨]](純獻皇貴妃 嚴氏)''' * '''양손자 : [[영친왕|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李垠)''' * 양서며느리 : [[귀인 이씨(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貴人 李氏) * '''양서손자 : [[완친왕|완효헌친왕]](完孝憲親王) 이선(李墡)''' * 양서며느리 :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씨]](貴人 張氏) * '''양서손자 : [[의친왕]](義親王) 이평길/이강(李平吉/李堈)''' * 양서며느리 : [[귀인 양씨|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 '''양서손녀 : [[덕혜옹주]](德惠翁主)''' == 기타 == * [[1899년]](광무 3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남편인 [[효명세자|익종]]이 '''문조익황제(文祖 翼皇帝)'''로 [[추존]]되자 함께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추증]]되었다. * 특이한 기록을 여럿 갖고 있는데, 그녀의 정식 시호는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로서 총 60자이며 [[세계]] [[왕비]]들을 통틀어 가장 [[시호]]가 긴 [[왕비]]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시호]]가 가장 긴 사람은 남편인 [[효명세자|문조]]. 또한 정식 [[왕비]]는 아니지만 '''[[조선]] 역대 왕후 중 가장 장수한 왕후'''[* 2번째가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인데 아시다시피 이 인물은 [[왕비]]로 지낸 시간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사망|승하]]당시는 [[왕비]]도 아니었다.]로, [[조선]]의 [[대비]]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대비]]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수렴청정]]을 한 [[대비]]들 중 유일하게 정식 [[왕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실로 격동의 [[조선]] 후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정말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만했던 인물. * 남편인 [[효명세자]]와는 은연 중에 연결되는데 신정왕후의 증조부가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엄(조선)|조엄]]이다. 조엄의 부인 즉 신정왕후의 증조모가 정경부인 [[풍산 홍씨]]이며 [[홍봉한]]·[[홍인한]]의 여동생이다. [[홍봉한]]의 딸이 다름아닌 [[혜경궁 홍씨]]이므로 신정왕후는 [[조엄(조선)|조엄]](풍산 홍씨)의 증손녀, 남편인 [[효명세자]]는 [[홍봉한]]의 외현손자이므로 촌수로 따지면 외7촌이다. 그러므로 남편 [[효명세자]]와는 홍현보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9촌 관계이다. * 남편 [[효명세자]]와 [[결혼|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을 당시에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프랑스]]로 무단 반출되었다. 일각에서는 병인양요로 인해 책봉 죽책이 전소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었으나 이후 15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이 [[2018년]] 공개되었다.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을 국외 소재 문화재재단에서 [[라이엇 게임즈]]의 기부금으로 구입하여 국내로 반환되어, 영구히 되돌아 왔다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80131052151005?input=1195m|#]] * [[1847년]](헌종 13년) 1월 1일, 신정왕후가 40세가 된 해를 맞이하여 [[창덕궁 인정전]]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조선)|헌종]]은 어머니 신정왕후에게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또한 신정왕후의 사순을 기념하여 [[헌종(조선)|헌종]]은 공인 3000석과 시민의 한 달 동안의 요역등을 특별히 탕감해 주었다. 신정왕후의 40세를 축하하는 진하연을 그린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은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7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대중매체에서 == [[효명세자|남편]]과 [[헌종(조선)|아들]]은 [[사극]] 출연이 전혀 없다가 남편은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드라마)|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구르미 그린 달빛)|남주인공]][* 실제 [[역사]]와 달리 조 대비와 혼인을 하지 않는다.], 아들은 영화 《[[흥부(영화)|흥부]]》와 영화 《[[명당(영화)|명당]]》에 간신히 첫 출연한데 비해 본인은 [[구한말]] 배경의 사극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덕분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조선시대]] 인물임에도 [[인지도]]는 [[효명세자|남편]]과 [[헌종(조선)|아들]]을 압도한다. * 작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한다. * 1965년 개봉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전옥]]이 연기했다. * 1968년 개봉한 영화 《[[대원군(영화)|대원군]]》에서는 배우 송미남이 연기했다. ||[[파일:풍운 조대비.png|width=100%]]||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반효정]]이 연기했다. ||[[파일:한미백년 조대비.png|width=100%]]|| * 1982년 [[MBC]] 드라마 《한미 백년》에서는 배우 [[나문희]]가 연기했다. ||[[파일:대원군 조대비.png|width=100%]]||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MBC)|대원군]]에서는 배우 [[고두심]]이 연기했다. ||[[파일:찬란한 여명 조대비.png|width=100%]]|| * 1995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김용림]]이 연기했다. ||[[파일:대왕대비신정왕후조씨김용림.jpg|width=100%]]|| *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김용림]]이 연기했다. 드라마의 시점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재위기이므로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등장한다. 드라마 3대 세력[* 나머지 두 세력은 각각 며느리인 [[명성황후|중전]]과 [[흥선대원군|대원군]].] 중 하나로 등장하며 [[풍양 조씨]] 일문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극딜로 인해 [[수렴청정]]과 중전 간택 권한[*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풍양 조씨]]인 조면호의 여식을 [[왕비|중전]]으로 택하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이를 가로막았다고 하는데 조면호는 [[임천 조씨]]로 핏줄만 따지면 신정왕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을 모두 잃고 [[창덕궁 낙선재]][* 신정왕후가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내쫓아버렸다.]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로 인해서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에게 깊은 원한을 가졌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하는 일마다 족족 트집을 잡으며 [[명성황후]]([[이미연(배우)|이미연]] 분)가 [[흥선대원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힘을 보탰다. 이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청나라]]에 연락을 넣어 청나라군이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가도록 한다. [[갑신정변]]이 끝난 직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이진우(배우)|이진우]] 분)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일삼는 [[위안스카이|원세개]]([[박진성(배우)|박진성]] 분)를 꾸짖다가 [[고혈압]]으로 [[죽음|승하]]한다.[*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신정왕후의 면전에서 "노마님께서 망령이 드셨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강제로 [[퇴위]]시켜버리겠다."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파일:닥터진 조대비.png|width=100%]]|| * 2012년 [[MBC]]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배우 [[정혜선(배우)|정혜선]]이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신정왕후(닥터 진)|항목]] 참조. ||[[파일:external/img.kbs.co.kr/cast_05_1.jpg|width=100%]]|| * 2016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드라마)|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배우 [[채수빈]]이 연기했다. 거의 유일하게 신정왕후의 젊은 시절이 나오는 작품으로 [[이름]]이 '조하연'으로 나온다. 단, [[역사]] 속 신정왕후가 아닌 [[모티브]]만 따와 창작한 [[캐릭터]]다. 자세한 것은 [[조하연|항목]] 참조. ||[[파일:바람과 구름과 비 조대비.png|width=100%]]|| * 2020년 [[TV CHOSUN|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TV조선)|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김보연]]이 연기했다. ||[[파일:철인왕후 조대비.png|width=100%]]|| *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드라마)|철인왕후]]》에서는 배우 [[조선주|조연희]][* 본명은 조선주로 [[2020년]]에 조연희로 활동명을 변경했다.]가 연기했다. [[미신]]에 집착하고 시어머니 [[순원왕후]] 못지않은 야욕을 부리는 등 실제 역사 기록과 다르게 바뀌었다. 자세한 것은 [[신정왕후(철인왕후)|해당 문서]] 참조. == 참고 문서 ==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경복궁]] * [[경복궁 흥복전]] * [[고종(대한제국)|고종]] * [[고종실록]] * [[김조순]] * [[김좌근]] * [[동구릉]] * [[명성황후]] * [[병인양요]] * [[서얼금고법]] * [[세도정치]] * [[수렴청정]] * [[순원왕후]] * [[순조]] * [[순조실록]] * [[승정원일기]] * [[외규장각]] * [[익평군]] * [[임오군란]] *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 [[조만영]]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조엄(조선)|조엄]] * [[조인영]] * [[창덕궁]] * [[창덕궁 인정전]] * [[창덕궁 희정당]] * [[철인왕후]] * [[철종(조선)|철종]] * [[철종실록]] * [[헌종(조선)|헌종]] * [[헌종실록]] * [[효명세자]] *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 [[흥선대원군]]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신정왕후, version=122)] [[분류:신정왕후 조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