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치제 (문서 편집) [[분류:청나라의 황제]][[분류:1638년 출생]][[분류:1661년 사망]][[분류:선양시 출신 인물]][[분류:천연두로 죽은 인물]][[분류:중국의 티베트 불교 신자]] [include(틀:역대 청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545, #00386a 20%, #00386a 80%, #002545)" {{{#FFD700 '''순치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명말청초 주요 세력)] ---- [include(틀:청의 황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545, #00386a 20%, #00386a 80%, #002545); color: #FFD700" '''청 제3대 황제[br]{{{+1 세조 장황제 | 世祖 章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清_佚名_《清世祖顺治皇帝朝服像》.jpg|width=100%]]}}} || ||<|2> '''출생''' ||[[1638년]] [[3월 15일]] || ||[[청나라|청]] [[선양시|성경]] [[선양고궁]][br](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홍구) || ||<|2> '''사망''' ||[[1661년]] [[2월 5일]] (향년 22세) || ||[[청나라|청]] [[베이징|북경]] [[자금성]] || || '''능묘''' ||[[청동릉#s-3.1|효릉]](孝陵) || ||<|2> '''재위기간''' ||'''{{{#FFD700 제3대 황제}}}''' || ||[[1643년]] [[10월 8일]] ~ [[1661년]] [[2월 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2 '''중국식 :'''}}} 애신각라(愛新覺羅)[br]{{{-2 '''만주어 :'''}}} [[아이신 기오로 가문|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 || '''휘''' ||{{{-2 '''중국식 :'''}}} 푸린(福臨)[br]{{{-2 '''만주어 :'''}}} 풀린(ᡶᡠᠯᡳᠨ)[br]{{{-2 '''한국식 독음 :'''}}} 복림 || || '''부모''' ||부황 [[숭덕제|태종 문황제]][br]모후 [[효장문황후]] || || '''형제자매''' ||11남 14녀 중 9남 || || '''배우자''' ||정후 - [[폐후 보르지기트씨|폐후 박이제길특씨]] 계후 - [[효혜장황후|효혜장황후 박이제길특씨]] || || '''후궁''' ||{{{#!folding 35명 [ 펼치기 · 접기 ] [[효강장황후|효강장황후 동가씨]], [[효헌장황후|효헌장황후 동악씨]], [[정비 동악씨]][br][[숙혜비 보르지기트씨|숙혜비 박이제길특씨]], [[공정비 보르지기트씨|공정비 박이제길특씨]][br][[단순비 보르지기트씨(순치제)|단순비 박이제길특씨]], [[영각비 동악씨]], 각비 석씨[br][[도비 보르지기트씨|도비 박이제길특씨]], 서비 진씨, 서비 왕씨, 서비 양씨[br]서비 오소씨, 서비 납라씨, 서복진 파씨, 서복진 당씨[br]서복진 뉴씨, 서복진 목극도씨, 경급격격, 날급니격격[br]색옥격격, 매급니격격, 액음주격격, 액륜주격격[br]매격격, 난격격, 명주격격, 호야격격, 포삼주격격[br]아모파편오격격, 아기편오격격, 단저격격, 추격격[br]서격격, 주내격격 }}} || || '''자녀''' ||8남 6녀 || || '''신장''' ||[[https://m.blog.naver.com/cytchoi/221858852874|170cm]][*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 || '''한호''' ||{{{-2 '''만주어 :'''}}} 이지스훤 다산 한[br](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ᡥᠠᠨ) || || '''칸호''' ||{{{-2 '''몽골어 :'''}}} Эеэр засагч хаан[br](ᠡᠶᠡᠷᠡᠷᠢ ᠵᠠᠰᠠᠭᠴᠢ ᠬᠠᠭᠠᠨ) || || '''묘호''' ||'''[[세조]](世祖)''' || || '''시호''' ||{{{-2 '''중국식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br](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br]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br](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 {{{-2 '''만주어 :'''}}} 얼덤부허 황디(ᡝᠯᡩᡝᠮᠪᡠᡥᡝ ᡥᡡᠸᠠᠩᡩᡳ) || || '''연호''' ||[[1644년]] ~ [[1661년]][br]{{{-2 '''중국식 :'''}}} [[순치]](順治)[br]{{{-2 '''만주어 :'''}}} 이지스훤 다산(ᡳᠵᡳᠰᡥᡡᠨ ᡩᠠᠰᠠᠨ) || || '''섭정''' ||섭정왕 [[도르곤]] (성종) (1643년 ~ 1650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청나라]]의 제3대 황제. [[청태종]]의 9번째 아들. [[강희제]]의 아버지. 5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치세 초기 7년 동안은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多爾袞)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다. 즉, 이시기 순치제의 치적 대부분은 사실상 황부섭정왕 도르곤에 의해 이루어졌고, 오늘날 교과서에 쓰여진 순치제의 업적도 모두 도르곤의 업적이었다. 이때 이룬 청의 대표적인 업적이 [[순나라(명말청초)|순나라]] 멸망과 베이징 정복. 즉, 도르곤은 순치제가 후세에 존재감을 남길 수 있게 해준 존재였으나, 어린 순치제는 황권을 위협하는 도르곤을 매우 증오하여 1650년 도르곤이 사망한 이후 그를 [[부관참시]]했다.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순치제 입장에서 도르곤은 황제를 깔고 뭉갠 권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실 도르곤 항목에도 있지만 도르곤은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와 [[형사취수|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순치제가 도르곤을 증오할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다만 반대로 도르곤 입장에서 순치제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같이 순장(...)시켰다) [[숭덕제|원수]]의 아들이었다. 누르하치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누르하치가 가장 아꼈던 아들인 도르곤에게 제위가 돌아갔을 가능성도 높았다. 참고로 유목민족인 만주족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말자 혹은 말자에 가까운 아들에게 상속하는 관습이 있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적자도 아니었기에 적자인 도르곤 형제에 비해 정통성도 부족했다. 하지만 도르곤이 장성하기 전에 누르하치가 갑작스레 사망했고, 이미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재빠르게 움직여 도르곤의 친모를 자살시키고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죽은 후 도르곤은 역사에서 종종 보이듯 직접 순치제를 죽이고 황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원수의 아들인 순치제를 보필했다. 도르곤이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청사 최대의 미스테리 중 하나다. 사실 따져보면 홍타이지 역시 원래라면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도르곤과 도도 형제를 살려줬다. 또 당시 상황은 도르곤이 순치제를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 쉽지도 않았다. 사실상 순치제는 도르곤과 경쟁해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누르하치파와 홍타이지파의 타협의 산물로 즉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르하치파는 누르하치의 적자인 도르곤을 밀어줬고 홍타이지파는 홍타이지의 서장자이자 순치제의 이복형인 [[아이신기오로 호오거|호오거]]를 밀었는데 둘 다 안되자 타협점으로 순치제를 세운 것이기 때문. 이후 호오거는 도르곤에게 목숨을 잃는다.] == 생애 == 1638년, 청나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효장문황후]]. 푸린(복림)이라는 이름은 모친인 효장문황후가 당시 거주하던 ‘영복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황인 홍타이지는 당시 총애하던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씨|신비 해란주]](효장문황후의 언니이자 푸린의 이모이기도 하다) 소생의 [[8황자(숭덕제)|아들]]이 요절해서 상심한 나머지 푸린의 이름을 대충 지었다. 1643년 부황인 [[숭덕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팔기 회의에서 어부지리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홍타이지 사망 당시 청 황실 최고의 실세는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유력했던 이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였다.[* 이로부터 7년 전인 [[병자호란]] 때 홍타이지가 이끌며 압록강을 건너온 우익군과 별개로 좌익군을 이끌며 함경도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두 지휘관이기도 하다. 각종 스캔들로 계급 강등과 감봉을 거듭하던 사고뭉치 형제와 조카들은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했지만 이 둘은 홍타이지가 가장 신임하는 팔기군의 에이스들이었다.] 세력은 동생 도도와 함께 거느린 양백기, 정백기에다 [[아이신기오로 요토|요토]]가 생전 거느렸던 양홍기까지 아우를 수 있는 도르곤의 세력이 더 강했지만, 호오거와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지르가랑]]의 정람기와 양람기, 그리고 당장 발언권은 없지만 호오거에게 협조적이었던 황기들까지 완전히 제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적자라 왕위 계승권만 따지면 형 홍타이지보다도 위였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사망 시점에 홍타이지는 이미 성인으로 형제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도르곤은 적자였고 누르하치의 가장 총애를 받았기에 차후에 제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졌었지만, 누르하치의 갑작스런 사망시점에 도르곤은 아직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장성한 홍타이지의 세력에 비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후계를 홍타이지에게 내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홍타이지 사망 시점에 자기보다 십수년 연상인 큰형과 삼촌뻘 조카들보다도 압도적인 실적과 세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당연히 황제 홍타이지가 키워놓은 파벌도 만만치 않았고 그로 인해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장남인 호오거 세력을 전적으로 압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오거 본인의 성품 또한 난폭했기 때문에 호오거 측도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교착 구도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어린 푸린을 황제에 앉히고 도르곤이 섭정왕에 올라 푸린이 성년이 될 때까지 실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이 때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도르곤이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홍타이지의 직속인 정황기와 양황기 출신들의 반발로(팔기 회의는 기주들이 대표권을 가지고 참가하는데, 두 황기의 기주는 홍타이지였으나 사망하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이 없었다) 인해 내전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실제로 넓게 보면 도르곤의 세력에 포괄할 수 있는 다이샨의 아들인 쇼토와 손자인 아다리가 선을 넘어서 반역죄로 목이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사태가 더 길어지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다이샨이 두 황기의 의견을 받아서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고, 동생인 도르곤과 친모의 가문이 한미한 호오거는 모두 배제하니, 정식으로 인정받은 5비빈의 소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인 푸린이 황제로 결정되었다. 여섯 살의 푸린이 황제에 오르고,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愛新覺羅 舒爾哈齊)의 6남인 정친왕 지르가랑(濟爾哈郞)이 좌우 섭정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르가랑은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에 오른 도르곤이 거의 혼자서 다 행사했다. 순치제가 황제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농민 반군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귀순해오자 도르곤은 누르하치 이래 [[존버]]를 거듭한 팔기군의 원기옥(!!!)을 터뜨려 산해관을 돌파하고 명나라를 총공격하여 이자성군을 내쫓고 북경을 접수한다. 이어 도르곤은 청나라가 천명을 상실한 주씨의 명나라를 계승하는 황제국임을 천하에 선포하고 전란으로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며 자금성으로 순치제를 모셔 새로이 즉위식을 열었다. 다음해 이자성은 쫓기던 중 살해당한다. 이로서 도르곤은 아버지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한 최대 숙원 사업인 중원 통일을 완수하였다.[* 다만 이것은 중원에 입성([[입관]])했다는 정도이지 여전히 남쪽에는 [[남명]]세력이 잔존했으며 [[대만]]을 차지한 [[정성공]]의 [[동녕 왕국]]과 추후 [[삼번의 난]]을 일으키는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왕들이 존재했기에 완전한 통일은 [[강희제]]때이다.] 도르곤은 [[1650년]]에 죽기 전까지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을 통치했다. [[옥새]]도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사망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12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다. 관습에 따라 청나라 황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를 맞았는데[* 청나라 초반 때 몽골칸위+동맹으로 후방 위험제거를 위해서였으며 아버지인 홍타이지도 적모이자 고모할머니인 저르저르, 생모인 붐부타이, 이모 하르졸과 정략결혼했다. 보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누르하치는 처음 자신의 주변 부족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비교적 가까운 위치의 [[차하르]]부 몽골족과 동맹관계를 구성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서 홍타이지의 정실 저르저르가 시집을 왔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자기 부족의 이익을 위하여 조카 붐부타이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붐부타이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이후 순치제를 낳긴 했지만), 홍타이지의 의지에 따라서 붐부타이의 이복언니이자 기혼녀였던 하르졸도 후궁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푸진(부인)으로 인정받은 5비들은 모두 몽골 출신인데, 저르저르과 하르졸, 붐부타이, 이외에 나므정과 바트맛주는 차하르부 링단 칸의 푸진(부인)들로 몽골 여성들이였다.]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황후들은 모두 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첫번째 황후)와 조카손녀(두번째 황후)였다.] 심지어 첫 황후는 질투가 심한 걸 트집을 잡아 폐출시키기까지 하였다. 대신 후궁들을 좋아했다. 황태자가 된 3황자 [[강희제|히오완예이]](훗날의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도 순치제의 후궁이었고, 그중에서도 순치제가 가장 총애한 후궁은 [[효헌단경황후 동고씨|현비 동오씨]]다.[* 아래에 서술된 순치제가 총애한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현비 동오씨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현비 동오씨를 얼마나 총애했으면 아직 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황후 바로 밑의 지위이자 후궁 중에선 가장 존귀한 자리인 황귀비의 자리에 올릴 정도였다.] 현비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이런 타입의 군주들이 종종 그렇듯 '''정치에 뜻을 잃었다.''' 이듬해인 1661년, [[천연두]]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제위를 황태자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붕어하였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청나라판 [[햄릿]](?)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머니인 [[효장문황후]]는 당시 청나라에서 종종 이루어지던 제도인 [[형사취수]]를 했다는 큰 떡밥이 있다.[* 효장문황후는 강희 연간에 죽었는데, 스스로 태종과 묻히길 원치 않았다. 다음 대인 옹정제까지 결론이 나지 않다가 결국 베이링 묘역 밖에 묻힌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형사 취수설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비 우씨와도 비슷하다.][* 다만 비슷할 뿐 실제로는 다른 점이 많다. 우씨의 경우 고국천왕이 죽은 시점에서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시동생 [[산상왕}연우]]을 택해서 그를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여전히 왕비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효장문황후는 도르곤과 결혼했는지 확실하지 않고 또, 도르곤 역시 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실 산상왕은 우씨와 결혼함으로써 차기 왕위라는 이득을 챙겼으나 도르곤은 설령 정말로 효장문황후와 결혼했다고 쳐도 그가 받은 이득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혼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참조. 순치제는 마음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삼촌이 죽자 존호를 추탈해버리고(실제로 도르곤이 기주로 있던 정백기 장수, 측근들이 친형인 아지거를 섭정왕으로 만들려 했다가 순치제와 섭정왕 자리를 잃은 지르가랑에게 걸려서 아지거는 자결했고 장수들은 숙청당했다.) 유골까지 훼손해버렸다. 덤으로 도르곤이 억지로 황후로 추존한 도르곤의 친모 아바하이를 도로 후궁으로 만들었다. 몽골 출신 황후를 싫어한 이유도 이런 어머니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국정은 선정이었다. 친정 직후 황족 출신 왕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으로 황권을 강화하였다.[* 황권을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제2의 도르곤을 막기 위해서였을지도.] [[1659년]] 남명을 [[윈난성]]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변발]]과 만주 복식을 강요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대학살을 일으켜 많은 한족들을 죽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Iw4CXPefKnk|영상]] 단, 난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한족에 대한 융화 정책도 병용해서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다만 한족 출신 공신인 오삼계 등의 3번 세력들의 세력은 무척 커져 강희제 때 [[삼번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순치제는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매우 총애했다. 아담 샬은 명나라 때부터 베이징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로,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 역법에 능해[* 역법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화약 기술은 강희제가 삼번의 난에서 많이 써먹었다.] 도르곤 때부터 인정받았지만 순치제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더욱 대박을 치게 된다. 입관 직후 통의대부, 태복시경, 태상시경에 임명되고 정 3품이 된다. 순치제는 심지어 삼궤구고의 예마저 종교를 감안하여 면제해준다. 몇 년 후에는 광록대부의 봉호를 받고, 조상 3대가 은전을 받는다. 1656~1657년까지는 순치제가 두 해 동안 24번이나 집에 직접 왕림하였다. 샬은 순치제에게 충고도 여러 가지 하였는데, 궁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황제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고 회개하라고 충고하여 아담샬이 '섭정왕'이란 조롱투의 기록까지 있다. 덕분에 예수회가 청나라를 조종하였다는 음모론이 나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야사(역사)|야사]]에서는 현비가 죽었을때 신하들이 황후 추서에 반대하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를 물린 후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한다. 이는 [[김용(1924)|김용]]의 [[무협소설]] [[녹정기]]라거나 얼웨허의 역사 소설 제왕삼부곡 등에도 차용된 이야기인데, 물론 야사는 야사일 뿐, 믿지는 말자. 순치 18년(1661년)에 제위를 황태자인 3황자 [[강희제|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23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사후 청나라 황실의 능구 두 곳 중 하나인 청동릉의 효릉(孝陵)에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효릉 안에 순치제가 생전에 신던 신발 한 켤레와 부채 한 자루만 부장품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인지 [[1928년]] [[쑨뎬잉]]이 청동릉에 난입해 [[강희제]]의 경릉(景陵), [[건륭제]]의 유릉(裕陵), [[함풍제]]의 정릉(定陵), [[동치제]]의 혜릉(惠陵) 등 [[동릉 도굴 사건|네 황제의 능을 도굴]]해 보물이 약탈당하고 유해가 훼손될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순치제의 치세 기간(1643년~1661년) 조선의 왕은 [[인조]](仁祖, 1623년~1649년), [[효종(조선)|효종]](孝宗, 1649년~1659년), [[현종(조선)|현종]](顯宗, 1659년~1674년)이 재위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절이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徳川家光 1623년~1651년),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徳川家綱 1651년~1680년) 재위기랑 일치하다. == 가족 == === 조상 === *고조부 - 시호: 경조 익황제(景祖 翼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애신각라 각창안, 愛新覺羅 覺昌安) *증조부 - 시호: 현조 선황제(顯祖 宣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탁시]](애신각라 탑극세, 愛新覺羅 塔克世) *조부 - 시호: '''태조 천명제(太祖 天命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애신각라 노이합적, 愛新覺羅 努爾哈赤) *부황 - 시호: '''태종 숭덕제(太宗 崇德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 皇太極) === 비 및 후궁, 자녀 === 순치제는 정말 많은 부인을 두었다. 역사에 기록된 수만 37명이다. 4명의 황후, 7명의 측비, 5명의 서비, 4명의 서복진, 17명의 격격을 두었다. 격격이란 황족이나 귀족의 첩실의 존칭이다. 순치제의 부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정실 *황후(皇后) *봉호: [[폐후 보르지기트씨|폐황후(廢皇后)]], 이름: 보르지기트 에르데니붐바(박이제길특 액이덕니포목파, 博爾濟吉特 額爾德尼布木巴) *시호: [[효혜장황후|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 봉호: 황후(皇后), 이름: 보르지기트 알탄세세그(박이제길특 아랍탄기기격, 博爾濟吉特 阿拉坦琪琪格) *시호: [[효강장황후|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 봉호: 강비(康妃), 성씨: 퉁기야 씨(동가 씨, 佟佳氏) - 사후 [[강희제]]에 의해 황후로 추존되었다. 슬하 자녀: [[강희제|3황자]] *시호: [[효헌장황후|효헌황후(孝獻皇后)]], 봉호: 황귀비(皇貴妃), 성씨: 동고 씨(동악 씨, 董鄂氏) - 강희제 때 황후로 추존되었다. 슬하 자녀: [[화석영친왕(순치제)|4황자]] *후궁 *측비(側妃) *시호: [[정비 동악씨|황고정비(皇考貞妃)]], 봉호: 정비(貞妃), 성씨: 동고 씨(동악 씨, 董鄂氏) - [[효헌장황후]]의 사촌동생이며, 순치제 사후 순장되었다. *시호: [[숙혜비 보르지기트씨|황고숙혜비(皇考淑惠妃)]], 봉호: 숙혜비(淑惠妃), 성씨: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씨(박이제길특 씨, 博爾濟吉特氏) - [[효혜장황후]]의 동생이다. *시호: [[공정비 보르지기트씨|황고공정비(皇考恭靖妃)]], 봉호: 공정비(恭靖妃), 성씨: 보르지기트 씨(박이제길특 씨, 博爾濟吉特氏) *시호: [[단순비 보르지기트씨(순치제)|황고단순비(皇考端順妃)]], 봉호: 단순비(端順妃), 성씨: 보르지기트 씨(박이제길특 씨, 博爾濟吉特氏) *시호: [[영각비 동악씨|황고영각비(皇考寧慤妃)]], 봉호: 영각비(寧慤妃), 성씨: 동고 씨(동악 씨, 董鄂氏). 슬하 자녀:[[아이신기오로 푸치오완|2황자]] *시호: 황고각비(皇考恪妃), 봉호: 각비(恪妃), 성씨: 석 씨(石氏) - [[한족]] 출신이다. *시호: [[도비 보르지기트씨|도비(悼妃)]], 성씨: 보르지기트 씨(박이제길특 씨, 博爾濟吉特氏) - 순치제의 사촌 여동생이다. *서비(庶妃) *시호: 서비 진씨(庶妃 陳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진 씨(陳氏). 슬하 자녀: 장황녀, [[아이신기오로 창닝|5황자]] *시호: 서비 왕씨(庶妃 王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왕 씨(王氏). 슬하 자녀: 5황녀 *시호: 서비 양씨(庶妃 楊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양 씨(楊氏). 슬하 자녀: 2황녀 *시호: 서비 오소씨(庶妃 烏蘇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오소 씨(烏蘇氏). 슬하 자녀: 4황녀 *시호: 서비 나라씨(서비 납라씨, 庶妃 拉喇氏), 봉호: 서비(庶妃), 성씨: 나라 씨(납라 씨, 拉喇氏). 슬하 자녀: 6황녀 *서복진(庶福晉) *시호: 서복진 바씨(서복진 파씨, 庶福晉 巴氏), 봉호: 서복진(庶福晉), 성씨: 바 씨(파 씨, 巴氏). 슬하 자녀: [[아이신기오로 뉴뉴|장황자]], 3황녀 *시호: 서복진 당씨(唐氏), 봉호: 서복진(庶福晉), 성씨: 당 씨(唐氏). 슬하 자녀: 6황자 *시호: 서복진 니우씨(서복진 뉴씨, 庶福晉 鈕氏), 봉호: 서복진(庶福晉), 성씨: 니우 씨(뉴 씨, 鈕氏). 슬하 자녀: [[순친왕 #s-3|7황자]] *시호: 서복진 묵투씨(서복진 목극도씨, 庶福晉 穆克圖氏), 봉호: 서복진(庶福晉), 성씨: 묵투 씨(목극도 씨, 穆克圖氏). 슬하 자녀: 8황자 *격격(格格) - 사람이 많고, 정보가 거의 없어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나열하였다. 경급(京及), 날급니(捏及呢), 색옥(塞玉), 매급니(邁及呢), 액음주(厄音珠), 액륜주(額倫珠), 매(梅), 난(蘭), 명주(明珠), 호야(芦耶), 포삼주(布三朱), 아모파편오(阿母巴編五), 아기편오(阿畿編五), 단저(丹姐), 추(秋), 서(瑞), 주내(朱乃) 순치제는 부인들 사이에서 8남 6녀의 친자녀를 낳았고, 양녀 3명을 들였다. 순치제의 친딸들 중에 황2녀인 화석공각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10살이 채 되지 않아 요절하였다. 순치제의 자녀 목록은 다음과 같다. *황자 *장황자 - 시호: 우뉴공(牛鈕公), 이름: [[아이신기오로 뉴뉴]](애신각라 우뉴, 愛新覺羅 牛鈕) - 요절하였다. *2황자 - 시호: 화석유헌친왕(和碩裕憲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푸치오완]](애신각라 복전, 愛新覺羅 福全) *3황자 - 시호: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 이름: '''[[강희제|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애신각라 현엽, 愛新覺羅 玄燁) *4황자 - 시호: [[화석영친왕(순치제)|화석영친왕(和碩榮親王)]],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5황자 - 시호: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창닝]](애신각라 상녕, 愛新覺羅 常寧) *6황자 - 시호 미상, 이름: 아이신기오로 키서오(애신각라 기수, 愛新覺羅 奇授) - 요절하였다. *7황자 - 시호: 화석순정친왕(和碩純親靖王), 이름: [[순친왕 #s-3|아이신기오로 룽히]](애신각라 융희, 愛新覺羅 隆禧) *8황자 - 시호 미상, 이름: 아이신기오로 융간(애신각라 영간, 愛新覺羅 永幹) - 요절하였다. *황녀 *장황녀 - 시호,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2황녀 - 시호: 화석공각공주(和碩恭慤公主), 이름 미상 *3황녀 - 시호,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4황녀 - 시호,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5황녀 - 시호,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6황녀 - 시호, 이름 미상 - 요절하였다. *양녀 *1녀 - 시호: 화석화순공주(和碩和順公主) *부친 - 시호: [[숭덕제 #s-6.3|화석승택유친왕(和碩承澤裕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슈사이(애신각라 석새, 愛新覺羅 碩塞) (부의 5남) * 조부 - 시호: '''태종 숭덕제(太宗 崇德帝)''', 이름: '''[[숭덕제|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 皇太極) *모친: 적복진 울라나라씨(적복진 납씨, 嫡福晉 納喇氏) *2녀 - 시호: 화석유가공주(和硕柔嘉公主) (부의 5녀) *부친 - 시호: 추탈안화친왕(追奪安和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욜로(애신각라 악락, 愛新覺羅 岳樂) (부의 4남) * 조부 - 시호: 화석요여민친왕(和碩饒餘敏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아바타이(애신각라 아파태, 愛新覺羅 阿巴泰) (부의 7남) * 증조부 - 시호: '''태조 천명제(太祖 天命帝)''', 이름: '''[[천명제|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애신각라 노이합적, 愛新覺羅 努爾哈赤) *모친: 계복진 나라씨(계복진 납라씨, 繼福晉 納喇氏) *3녀 - 시호: 고륜단민공주(固倫端敏公主), 이름: 아이신기오로 단민(애신각라 단민, 愛新覺羅 端敏) *부친 - 시호: 간순친왕(簡純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지두(애신각라 제도, 愛新覺羅 濟度) (부의 차남) *조부 - 시호: 정헌친왕(鄭獻親王), 이름: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애신각라 제이합랑, 愛新覺羅 濟爾哈朗) (누르하치의 조카, 슈르하치의 6남) *모친: 적복진 보르지기트씨(적복진 박이제길특씨, 嫡福晉 博爾濟吉特氏) == 창작물에서 == 대체로 창작물이 묘사하는 시기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청의 입관 이전과 직후를 주로 다루는 '대청풍운' 등의 여러 작품에서는 보통 처음에는 아역으로 시작하며 존재감이 없다가 성장할수록 어머니를 좋아하는 삼촌을 질색하는 사춘기 아이로 그려지고, 청년 시기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동고비와의 로맨스와 사별 후의 슬픔과 상실감, 동고비에 정신 팔린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로 묘사된다. 말하자면 공부(집안일과 나랏일)는 뒷전이고 첫사랑에 환장한 고딩[* 시청자들의 흥미를 위해 첫사랑만 강조되는거지만 사실 순치제는 세조라는 격조 높은 묘호가 도르곤 덕분이라며 저평가받는다고는 해도 명청교체기 황제로서 어지간한 명나라 명군들 앞에 명함을 내밀어볼 정도로 평타 이상의 수완을 내는 황제였다. 그것도 10대의 나이에 친정을 하며 한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팔기제를 정비하며 남명의 [[영력제]]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급이었는데, 강희제조차도 그 나이에는 삼번의 난 앞에 멘붕하여 갈팡질팡하던걸 감안하면 더욱 높이 평가할만 하다. 단지 첫사랑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서 명민한 황제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이 유달리 강렬하게 기억될 뿐이다.]과 그런 아들한테 잔소리하는 엄마랄까. 정사와 별개로 야사를 따라 죽음을 가장하고 출가한 모습으로 나오기도 하나, 어찌되었든 제위에 있는 동안엔 명청교체기의 다른 주요 인물들과 달리 수염을 풍성하게 기를 정도의 성숙한 어른으로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 어진에 제법 멋들어지게 그려진 콧수염은 과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소년 황제였던 동치제, 광서제의 어진에는 수염이 거의 묘사되지 않았고, 광서제 역시 꼭두각시로나마 30대까지 살긴 했지만 수염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순치제의 어진은 콧수염을 진하게 강조하느라 소년 황제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노안으로까지 보이는데(사실 순치제 정도는 적당하다 싶을만큼 청나라 초창기의 황족들 초상화가 심하게 노안으로 그려진 예가 좀 있다. 도르곤처럼 30대 후반에 죽은 호오거는 무슨 일흔 넘게 장수한 [[강희제]]급의 노인으로 그려졌을 정도.), 실제로 콧수염을 길게 길렀대도 갓난아기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신하들에게 위엄을 보이고자 신경 쓰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동고비한테 멋있어보이려고 열심히 관리했나보다.~~] * [[녹정기]] - 동비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죽음을 가장하고 실제로는 출가한 상태였는데 강희제의 정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 순치제를 잡아 인질로 쓰려고 했고 이로 인해 순치제는 쫒기는 몸이 되나 위소보의 재치로 간신히 살아난다. 이후 사실을 안 강희제가 순치제를 찾아 오지만 자신은 죽은 몸이라며 만나주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위소보가 대성통곡을 하며 분위기를 잡고 결국은 마음이 약해진 순치제가 강희제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순치제는 강희제의 정치를 칭찬하고 더이상 찾아오지 말 것과 함부로 세금을 올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 강희왕조(2001) - 1화부터 등장한다. 중병에 걸린 동 귀비를 매우 총애하여 그와 함께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도 않고, 동 귀비가 황손을 낳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자 악 귀비의 아들인 [[강희제|현엽]]을 악 귀비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동 귀비의 양자로 만들려고 하며, 결국 동 귀비가 죽자 크게 상심하고는 측근인 행삼이라는 승려의 조언에 따라 옥좌를 버리고 승려가 되려고 한다. 이에 경악을 한 신하들과 어머니 황태후 보르지기트씨가 찾아와서 황제를 말리며 설득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후가 질책하자, 순치제는 황제가 될 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로부터 떨어져 그 젖을 먹지도 못하고 관리와 외척, 황손들의 권력 다툼에 이용되었으며, 친부의 원수인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을 아버지로 모셔야 했다면서 더는 황위에 있고 싶지 않다며 인생과 옥좌에 대한 환멸을 토로한다. 그리고 오직 동 귀비만이 자신을 혈육으로 대하여 그와 함께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도 말한다. 황태후는 모든게 행삼때문이라며 행삼의 스승을 시켜 그를 화형에 처하여 황제의 출가를 막으려 했지만, 끝내 순치제는 머리를 깎고 옥좌를 현엽에게 물려주며, 죽기 직전의 행삼으로부터 행치라는 법호를 받고 승려가 된다. 황태후는 속이 상했지만 자식의 뜻을 어찌못했고 결국 승낙하고 만다. 대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황실이 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순치제가 죽었다고 알도록 한다. * [[신쥬신 건국사]] - 여기서도 실권없는 소년군주로, 어머니 뿐만 아니라 서로 연모하던 궁녀까지 도르곤에게 [[네토라레]] 당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청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