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동준 (문서 편집) [include(틀:전라남도교육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성동준}}}'''[br]'''成東準'''}}}}}}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성동준.jpg|width=100%]]}}} || || '''본관''' ||[[창녕 성씨]] || ||<|2> '''출생''' ||[[1912년]] [[8월 9일]] || ||[[전라남도]] [[순천시|순천군]] 소안면 서내리[br](現 [[전라남도]] [[순천시]] 행동 98번지) || ||<|2> '''사망''' ||[[1980년]] [[10월 30일]] (향년 68세) ||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순천)|매곡동]] 98번지 자택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94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관료]]. [[전라남도교육청|제3대 전라남도교육감]]을 역임했고,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912년 8월 9일 [[전라남도]] [[순천시|순천군]] 소안면 서내리(現 [[순천시]] 행동 98번지)에서 태어났다. 1944년 [[규슈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학병]]에 징집되어 [[중화민국]] [[쑤저우시|소주시]](蘇州市)에 주둔한 [[일본 제국 육군]] 60사단에 배속되었다. 그곳에서 을종 간부 훈련을 받던 중 [[김영남(독립운동가)|김영남]], [[류재영]], [[박영]]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적진을 정찰한다는 명목으로 [[기관총]] 1정, 소총 7정, 실탄 300발 등 무기를 휴대하고 탈출하였다. 그 후 [[국민혁명군]] 제3전구 충의구국군 사령부에 도착해 [[미군]] 고문관에게 일본군 문서 및 일본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들의 탈출 소식은 전선일보 등 중화민국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 후 박영과 함께 충의구국군 정치부 대일선전과에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장흥(독립운동가)|장흥]]의 도움으로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안창호의 비서로 있던 구익균과 상해에서 동포들의 귀국을 도왔고 광복군 항저우 잠편지대에서 참모로 활약하였고, 1946년 귀국 후 미군정 하에서 영암군수를 시작으로 나주군수, 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952년 전라남도 문교사회국 문정과장, 1954년 전라남도 산업국 지정과장, 1955년 강원도 문교사회국장, 1957년 전라북도 문교사회국장, 1959년 전라남도 산업국장, 1960년 5월 전라남도 내무국장 등 지방관직을 역임하였고, 1960년 10월 [[내무부]] 통계국 제표과장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다. 1961년 7월 공무원을 퇴직하였고,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민주공화당 전남도당 사무국장이 되었다. 1965년 10월 [[박정희]]대통령과 공화당의 추천을 받아 제19대 문교부차관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8월 사임한 후 동년 10월 공화당 훈련부장에 임명되었다. 1968년 5월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고, 동년 8월에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멕시코시티 올림픽]] 선수단장에 내정되었으나 다음 달에 전라남도 교육감에 임명됨에 따라 취소되었다. 1968년 9월 제3대 전라남도 교육감이 되었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으나 낙천되었다. 그 후 고향 순천에서 지내다가 1980년 10월 30일 오후 3시에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순천)|매곡동]] 98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0103100209207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10-31&officeId=00020&pageNo=7&printNo=18177&publishType=00020|별세했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순천시 [[상사면]] 흘산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10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2020년 8월 14일 [[전라남도교육청]]에서 광복 75주년을 맞아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https://www.yna.co.kr/view/AKR20200814110000054|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 여담 == 2020년 흉상 제막식 당시 아들인 성낙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66년 KBS 신춘문예에 일본군 탈출 당시를 담은 수기 "하늘 끝 바다 끝"이 당선되었다. 해당 수기는 라디오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였고, 영화화를 하려고 했으나 제작비 문제로 무산되었다 한다. 대신 1988년 책으로 출간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순천군수]] [[분류:영암군수]] [[분류:순천시 출신 인물]][[분류:창녕 성씨]][[분류:1912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규슈대학 출신]] [[분류:문교부 차관]] [[분류:전라남도교육청 교육감]] [[분류:박정희 정부/인사]] [[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