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덕왕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신라의 추존 왕 성덕왕(成德王) 김균정, rd1=김균정)] [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성덕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신라의 왕자/태종 무열왕 ~ 경순왕)] ---- [include(틀:역대 낙랑군공/낙랑군왕)]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33대 국왕[br]{{{+1 성덕왕 | 聖德王}}}'''}}}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성덕왕릉.jpg|width=100%]]}}} || ||<-2> {{{-2 {{{#fbe673 성덕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691년]] 추정[* 《[[삼국유사]]》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조-에는 효소왕이 26세에 승하했다고 적혀 있으며, 효소왕의 동생인 성덕왕이 22세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효소왕이 실제로는 16세에 승하했던 것으로 여겨지니, 성덕왕 역시 실제로는 12세로 즉위한 걸로 추정하여 생년을 역산한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22세에 즉위한 것이 사실이면 681년에 출생한 것이 된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45249|#]]] || ||[[통일신라|신라]] [[서라벌|금성]] || ||<|2> '''사망[br]{{{-3 (음력)}}}''' ||[[737년]] [[2월]] (향년 46세 추정) || ||[[통일신라|신라]] [[서라벌|금성]] || || '''능묘''' ||[[성덕왕릉]](聖德王陵)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33대 국왕}}}''' || ||[[702년]] [[7월]] ~ [[737년]] [[2월]] {{{-2 (34년 7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 || || '''휘''' ||융기(隆基) / 흥광(興光)[* 《구당서》에서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덕왕의 신하인 [[중아찬]] 김지성의 이름이다. 《책부원귀》에 나오는 新羅王金志誠 遣使朝貢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金志誠과 遣의 위치가 바뀐 것으로 본다.] || || '''부모''' ||부왕 [[신문왕]][br]모후 [[신목왕후]] || || '''형제자매''' ||형 [[효소왕|김이홍]][br]동생 김근질, 김사종[* 이 둘은 모두 [[성덕왕]]의 동생으로 서술되어 있기는 한데, 둘 모두 하정사로 갈 때만 등장해서 왕제라는 표현이 정말 친동생인지 단순히 왕족을 이르는 수사인지는 다소 불명확하지만, 일단은 성덕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다.] || || '''왕후''' ||[[성정왕후]] 김씨, [[소덕왕후]] 김씨 || || '''자녀''' ||태자 [[김중경]], [[효성왕|김승경]][br]왕자 [[경덕왕|김헌영]][br]왕녀 [[김사소]] || || '''종교''' ||[[불교]] || || '''시호''' ||'''성덕대왕(聖德大王)'''[*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2&totalCount=2&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5_0070_0030_0030&position=-1|성덕대왕신종]]』 기록.] || || '''존호''' ||융기대왕(隆基大王) / 흥광대왕(興光大王)[*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 || || '''골품''' ||[[진골]](真骨) ||}}}}}}}}} || >'''융기대왕께서''' >'''수(壽)가 산하(山河)와 같이 길고,''' >'''위(位)가 [[알천]]과 같이 크길 바랍니다.''' >'''천명의 자손(千子)들은 구족(具足)하며,''' >'''칠보의 상서로움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隆基大王''' >'''壽共山河同久,''' >'''位與軋川等大.''' >'''千子具足,''' >'''七寶呈祥.''' >---- >성덕왕 재위 5년에 바치는 기도문. 황복사석탑금동사리함기에서 발췌.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33대 군주. 조부 [[문무왕]]이 [[삼국시대]]의 난세를 끝냄으로써 [[평화]]의 시대를 열고, 부왕인 [[신문왕]]이 내부를 다져 판을 깔아놓은 8세기 초반에 등극하였다. 재위 기간은 35년. 통일 이후의 신라 왕들 중에는 유일하게 재위기간 30년을 넘긴 왕으로, [[한국사]] 전체에서 찾아봐도 오래 재위한 편이다. 이렇게 오랜 재위기간 동안 '''남북국시대의 신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다. 제31대 신문왕의 둘째아들이자 제32대 [[효소왕]]의 동복아우로 친형 효소왕이 1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국인(國人, 나라 사람들)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태어난 해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효소왕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한 것, 어머니 [[신목왕후]]의 사망년도를 감안하면 성덕왕 역시 10대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들|소년기에 즉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성덕왕이 22세에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논란이 있다. 이에 따라 효소왕이 사실은 26세에 죽었고 성덕왕 역시 《삼국유사》 기록대로 22세에 즉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재위 기간은 길었지만 [[수명]]은 길지 않아서 대략 46세에 [[사망]]했다. 신라 상대의 [[전성기]]를 열었던 [[진흥왕]]과 비슷한 부분이다.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현종(당)|동시대 중국 황제]]의 이름도 융기였기 때문에 '흥광'으로 [[피휘|고쳤다]]. 첫 [[왕비]]는 김원태의 딸 [[성정왕후]]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716년 [[궁]]에서 쫓겨난다. 이후 성덕왕은 김순원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 점물왕후(占勿王后)라고도 불린다.]를 새 왕비로 맞이했다. 장남 [[김중경]]은 성정왕후 소생이고, 차남 효성왕과 삼남 [[경덕왕]]은 소덕왕후 소생이다. [[선덕왕]]의 어머니 [[사소부인]](四炤夫人)은 성덕왕의 딸인데 누구 소생인지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시기상 성정왕후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는 [[왕권]]이 강화되어 [[집사부]]의 [[중시]](훗날 [[시중]])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화백회의]] [[의장]]이었던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 생애 == 《[[삼국유사]]》에 의하면 즉위하기 전 어린 시절에 [[오대산]]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은 저자 [[일연]]도 일단 싣긴 했지만 각주에서 오류를 지적할 정도로 부정확하고 설화적 각색이 많이 된 일화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섭정할 모후가 없었다. 그래서 즉위에 기여한 국인 무리인 [[공신]] 세력에 벼슬을 내리고 척신 김원태의 딸과 혼인한다. 그러다 705년 자신이 어릴 적 수도했던 [[오대산]]에 [[상원사|진여원]] 개창, 706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황복사 금동사리함]] 조성 등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711년에는 백관들에게 [[권력]] 남용을 경계하는 글인 <백관잠>을 내리기도 하는 등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정왕후를 쫓아내면서 김원태 세력을 축출하고,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세력을 우대하는 한편 효소왕 시대에 파면당했던 [[김순원]]을 복권시키는 등 대신들 간에 견제가 이뤄지도록 했다. 성덕왕의 행적을 보면 증조부인 [[태종 무열왕]]을 [[롤모델]]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본인은 장남도 아니고 국인들에게 추대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태종 무열왕처럼 [[서라벌]] 토착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신 김씨([[김해 김씨]]) 출신인 김윤중을 중용했으며 태종 무열왕을 위한 사찰 [[봉덕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에서 성덕왕이 김윤중 세력에게 [[절영도]] [[명마]]를 하사하는 등 우대하자 친족들이 그를 시기하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단교]]에 가까울 정도로 교류가 줄어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다가 성덕왕 시기에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문무왕 14회로 많았는데 문무왕 대의 사신 파견은 일반적인 사절이 아니라 나당전쟁 동안 물밑으로 시도되는 [[교섭]]의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신문왕 1회, 효소왕 1회로 극히 드물게 오가다가 성덕왕대에 46회나 파견된다. [[나당전쟁]]으로 거의 끊겼던 대당 관계를 성덕왕 때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714년에는 통문박사라는 대당 [[외교]] 문서를 담당할 기관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신문왕 때 설립한 [[국학]]의 내실을 보강하기 위해 [[공자]]의 화상을 안치하는 등 [[유교]] 문화를 수용했다. 717년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算博士)를 창설해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였으며, 718년 한국사 최초로 [[물시계]](漏刻)를 설치하고 관련 부서를 설치하는 등 실용적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상(畵像)을 들여와서 국학에 안치시켰다. 722년 [[정전(통일신라)|정전]]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성덕왕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이 정전제는 원칙 그대로 [[국가]]가 [[토지]]를 수여한 것이 아니라 '''자영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했다는 정도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어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왔다. [[율령]]제와 조용조 [[조세]] 방식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이다. === [[일본]]과의 공방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삼국사기]]》와 《[[해동제국기]]》에는 당시 [[일본]] 군주인 [[겐쇼 덴노]]와 서로 공수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각각의 입장에서 실려있다. >[[겐쇼 덴노|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 >- 《[[해동제국기]]》 720년에는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관련 내용이 안 나온다. >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 《[[삼국사기]]》 731년 일본에서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격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인 이 때 벌어진다.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왕성국의 의미는 《[[상서|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서는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 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는데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서 전해 내려오는 《능백묵서》(綾布墨書)에 따르면 백제 [[부여풍]](扶餘豊)([[의자왕]]의 아들로 [[백제부흥운동]] 주도자 중 한 사람)의 아들 [[부여사]](扶餘絲)를 비롯한 일가의 얘기가 나온다. 이들이 일본 [[나라 현]]에 정착했으나 일본 내 정쟁에 휘말려 부여사의 손자인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한 뒤 [[남부여]]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거'(定居)라 하였다고 한다. 정가왕은 미야자키 현에 정착한 뒤에 지역민들에게 [[불교]] 신앙, [[건축]]술, [[농업]] 등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718년경에 [[나당연합군]] 또는 신라군이 미야자키 현을 침공한다. 이에 정가왕과 둘째 아들 화지왕은 백제 유민들 및 토착 지역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만약 718년과 720년 신라의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일본 군함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 [[발해]]에 대한 공격 === 733년 당나라의 요청을 받아 [[발해]] 제2대 [[무왕(발해)|무왕]] 시기 발해의 남쪽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대장으로 참전한 사람이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신라에 [[파병]]을 요구할 때 >'듣건대 신라에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을 보내시오' 라고 김윤중을 콕 찍어서 언급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김유신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본기> 기사에는 태복원외경 [[김사란]]이 갔다고 한다. 신라군은 발해군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은 아니고 북진하다가 눈이 많이 내려 귀환했다고 한다. 이 결과로 나당전쟁 후 50여 년만인 735년 당나라로부터 패강([[대동강]]) 이남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이 무렵부터 9세기 전반기까지 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역화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 [[성덕왕릉]]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성덕왕릉)] == 평가 == 성덕왕의 치세는 태종 [[무열왕]] 때부터 상승하던 [[신라]]의 [[국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였다고 평가받는다. 비교적 짧게 간 아버지 [[신문왕]]이나 형 [[효소왕]]에 비해서 35년이나 재위했고 그 덕에 《[[삼국사기]]》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다른 삼국시대 왕들에 비해 상당히 많으며 전체적으로 [[의학]]과 [[수학]]을 장려하였고, [[정전]]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의 [[태평성대]]를 완성시킨 [[명군]]으로서 평가받는다. == 기타 == * [[광산 김씨]]의 시조인 김흥광과는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광산 김씨의 시조인 김흥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훨씬 선대의 사람이다. * 신라의 [[태평성대]]를 완성시킨 왕이었으나 현대에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꽤 낮은 편이다. 한국사 [[수험생]]들이나 [[정전(통일신라)|정전]]으로 1번쯤 들어보지, 일상 생활 속에서 거의 들어보기 힘든 왕이다. [[고려]] 제11대 [[문종(고려)|문종]]이 그렇듯 큰 정치적 격변없이 [[나라]]의 내실을 다지고 태평한 나라를 [[통치]]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다만 재위 기간이 긴 탓도 있겠지만 성덕왕 조를 보면 [[가뭄]], [[지진]], [[벼락]] 등의 [[자연재해]] 기록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영보는 《[[죽석관유집]]》에서 성덕왕이 [[백성]]을 위한답시고 사면을 자주 했지만 이런 식으로 자주 사면하면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고 상습범이나 중죄인([[역적]] 제외)까지 덕을 베푼다고 사면하다가는 사람들이 [[범법]] 행위를 우습게 알게 된다고 비판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0588A_0040_010_0190|#]] * 당대에도 성덕왕은 전제 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명군으로 평가받아 성덕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걸려 있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0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성덕왕 본기> ]]''' 一年秋七月 성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사면하다 一年秋九月 관작을 한 급씩 올려주다 一年秋九月 일년간 조세를 면제해주다 一年秋九月 원훈[* 선덕왕 양상의 祖父이다.]을 중시로 삼다 一年冬十月 상수리나무 열매가 밤으로 변하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방물을 바치다 二年秋七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 도읍에 홍수가 일어나다 二年 원훈이 물러나자 원문을 중시로 삼다 二年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二年 김사양을 당에 보내다 三年春一月 웅천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三年春三月 김사양이 돌아와 《금광명최승왕경》을 바치다 四年夏五月 김원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다 四年春一月 원문이 죽자 신정을 중시로 삼다 四年春三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四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四年秋八月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다 四年秋九月 살생을 금지하다 四年秋九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동쪽 주군에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五年春一月 인품을 상대승으로 삼다 五年春一月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五年春三月 뭇별이 떨어지다 五年夏四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秋八月 신정이 물러나자 문량을 중시로 삼다 五年秋八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秋八月 곡식이 익지 않다 五年冬十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五年冬十二月 사면하다 六年春一月 백성들이 굶어 죽어 곡식을 나눠주다 六年春二月 사면하다 六年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하사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에 공물을 바치다 七年春一月 사벌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七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夏四月 토성이 달을 범하다 八年春三月 청주에서 흰 매를 바치다 八年夏五月 가뭄이 들다 八年夏六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夏六月 죄수를 사면하다 八年春一月 천구 별이 떨어지다 八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봄에 눈이 내리다 十年夏五月 도살을 금지하다 十年冬十月 왕이 남쪽을 순수하다 十年冬十月 중시 문량이 죽다 十年冬十一月 왕이 백관의 잠계을 짓다 十年冬十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一年春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一年春三月 위문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三月 당에서 노원민을 사신으로 보내다 十一年夏四月 온수에 행차하다 十一年秋八月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으로 봉하다 十二年春二月 전사서를 설치하다 十二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二年冬十月 당에서 김헌종이 돌아오다 十二年冬十月 당 현종이 성덕왕을 책봉하다 十二年冬十月 위문이 물러나다 十二年冬十二月 사면하다 十二年冬十二月 개성을 쌓다 十三年春一月 효정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고치다 十三年春二月 김수충이 당에서 숙위하다 十三年春閏二月 박유가 당에 가서 정월을 축하하다 十三年 가뭄이 들어 전염병이 돌다 十三年 상수리나무 열매가 밤으로 변하다 十三年冬十月 당 현종이 신라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다 十四年春三月 김풍후가 당에 가서 공물을 바치다 十四年夏四月 [[진주시|청주]]에서 흰 참새를 바치다 十四年夏五月 사면하다 十四年夏六月 가뭄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를 빌다 十四年秋九月 [[금성]]이 서자성을 가리다 十四年冬十月 유성이 자미원을 침범하다 十四年冬十二月 유성이 태미원에 들어가서 죄인을 풀어주다 十四年冬十二月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하다 十五年春一月 유성이 달을 침범하다 十五年春三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十五年 성정 왕후를 궁에서 내쫓다 十五年 [[태풍]]이 불어 숭례전이 무너지다 十五年 김풍후가 신라로 돌아오다 十五年夏六月 가뭄이 들어 거사 이효가 비를 빌다 十六年春二月 의박사·산박사를 두다 十六年春三月 새 궁을 세우다 十六年夏四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七年夏六月 [[황룡사]]탑에 벼락이 치다 十七年 물시계를 만들다 十七年 당에 공물을 바치다 十七年冬十月 유성이 묘성에서 규성으로 들어가다 十七年 천구가 간방에 떨어지다 十七年 [[하남시|한산주]]에 여러 성을 쌓다 十八年春一月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十八年秋九月 [[미륵사]]에 벼락이 치다 十九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배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春三月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다 十九年夏四月 큰 비가 내리다 十九年夏五月 해골을 묻다 十九年夏五月 [[전주시|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十九年夏六月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다 十九年秋七月 [[공주시|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十九年 누리 떼가 곡식을 해치다 十九年 사공이 물러나자 문림을 중시로 삼다 二十年秋七月 정인을 시켜 북쪽 경계에 성을 쌓다 二十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다 二十一年春一月 선종을 중시로 삼다 二十一年春二月 도읍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백성들에게 정전을 나누어주다 二十一年冬十月 김인일을 당에 보내다 二十一年 모벌군에 성을 쌓다 二十二年春三月 당에 [[미녀]]를 바치다 二十二年夏四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二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一月 왕자 승경을 [[태자]]로 세우다 二十三年春一月 사면하다 二十三年春一月 웅천주에서 영지를 바치다 二十三年春二月 김무훈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소덕왕비가 사망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나타나다 二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二十四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 선종이 물러나자 윤충을 중시로 삼다 二十四年冬十月 땅이 움직이다 二十五年夏四月 김충신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二十五年夏五月 김근질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春一月 죄수를 사면하다 二十六年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二十六年夏四月 위원을 대아찬으로 삼다 二十六年夏四月 대양을 사찬으로 삼다 二十六年冬十二月 수창궁을 수리하다 二十六年冬十二月 배부에게 궤장을 하사하다 二十七年秋七月 김사종을 당에 보내 방물을 바치다 二十七年秋七月 당에 자제들의 국학 입학을 청하다 二十七年 김사종이 숙위하다 二十七年 배부가 물러남을 수락하다 二十七年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八年春一月 당에 하정사를 보내다 二十八年秋九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二十九年春二月 김지만을 당에 보내 조회하게 하다 二十九年冬十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三十年春二月 당 현종이 김지량을 태복소경원외치에 제수하다 三十年夏四月 사면하다 三十年 늙은이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다 三十年 일본군이 습격하다 三十年 백관이 거노를 쏘는 것을 보다 三十一年冬十二月 사공 등을 장군으로 삼다 三十二年秋七月 당 현종이 군대를 요청하다 三十二年冬十二月 김지렴을 당에 보내 사례하다 三十三年春一月 김충신이 당 황제에게 부사로 삼아줄 것을 요구하다 三十三年夏四月 김단갈단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三年 당 황제가 김지렴에게 홍려소경원외치의 관작을 주다 三十四年春一月 형혹이 달을 범하다 三十四年春一月 김의충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다 三十四年春二月 김영이 당에서 죽다 三十四年 '''당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주다'''[* 패강에 수자리를 설치. [[패강진]] 참고.] 三十五年夏六月 패강 이남의 땅을 준 것을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다 三十五年冬十一月 김상을 당에 보냈는데 도중에 죽다 三十五年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살펴보다 三十五年 개가 사흘 동안 짖다 三十六年春二月 김포질을 당에 보내 정월을 축하하고, 방물을 바치다 三十六年 성덕왕이 죽다 [[문무왕]] 급으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 8권은 [[신문왕]]부터 시작하여 성덕왕에서 끝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신라 왕실)] [[분류:691년 출생]][[분류:737년 사망]][[분류:신라 국왕]][[분류:경주 김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