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새뮤얼 J. 틸던 (문서 편집) [[분류:뉴욕 주지사]] [[분류:1814년 출생]] [[분류:1886년 사망]] [[분류:컬럼비아 군(뉴욕) 출신 인물]] [[분류:예일 대학교 출신]][[분류:미국 민주당 소속]] [include(틀:역대 뉴욕 주지사)] ---- ||<-2>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ffc224 '''1876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7F7F7 0%, #FFFFFF 20%, #FFFFFF 80%, #F7F7F7)" '''{{{#1a2d99 제25대 뉴욕주지사}}}[br]{{{#1a2d99 {{{+1 새뮤얼 존스 틸던}}}[br]Samuel Jones Tilde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muelJonesTilden.jpg|width=100%]]}}} || ||<|2> '''{{{#1a2d99 출생}}}''' ||[[1814년]] [[2월 9일]] || ||[[미국]] [[뉴욕 주]] 뉴레바논 || ||<|2> '''{{{#1a2d99 사망}}}''' ||[[1886년]] [[8월 4일]] (향년 72세) || ||[[미국]] [[뉴욕 주]] 용커스 || || '''{{{#1a2d99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 '''{{{#1a2d99 학력}}}''' ||[[예일 대학교]] || ||<|2> {{{#1a2d99 '''재임기간'''}}} ||제25대 뉴욕 주지사 || ||1875년 1월 1일 ~ 1876년 12월 31일 || || '''{{{#1a2d99 정당}}}''' ||[include(틀:자유토지당)]→[include(틀:민주당(미국))] || || '''{{{#1a2d99 서명}}}''' ||[[파일:새뮤얼 J. 틸던 서명.sv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muelTilden.png|width=100%]]}}} || || {{{#1a2d99,#4c5fcb '''공식 초상화'''}}} || [목차] [clearfix] == 개요 == [[미국]]의 정치인. 미국의 19대 대선 당시 [[민주당(미국)|민주당]] 후보로, 말많고 탈많던 당시 선거에서 결국엔 낙선한 비운의 인물로 알려져있다. == 생애 == [[뉴욕]]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철도]] 붐이 일던 당시 철도 회사의 변호사로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게 되어 손쉽게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전반적으로 무난한 길을 걸었지만, 1848년에는 [[마틴 밴 뷰런]]을 도와 [[자유토지당]]에 가담하는 --[[흑역사]]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어찌됐건 남북전쟁 후에 뉴욕 주 민주당 위원회 의장을 맡은 그는 비리를 저지른 위원들의 [[탄핵]]에 앞장서는 행동 등으로 인망을 높이게 되어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성공적인 면모를 보인 그는 1876년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 대통령에 도전하다. 그러나... === 1876년 선거 결과 틸던은 백악관 자리에 거의 근접한듯 보였다. 득표에서 25만 표(약 3%차) 이상 앞섰고, 개표가 끝나지 않은 일부 주를 제외한 확정된 선거인만으로도 184명으로 사실상 승리(185명)를 확정한 '''듯''' 보였다. 심지어 나머지 주들에서 다 져도 오리건 주에서 일종의 반란표가 나올 확률이 생겨 이길 수도 있었다. 물론 이것도 결국엔 공염불이 되었지만.. 자세한건 [[러더퍼드 B. 헤이스]] 항목 참조. 그러나 연방군의 군정을 받던 남부 3주([[사우스캐롤라이나]] 7석 + [[루이지애나]] 8석+ [[플로리다]] 4석 = 19석)의 선거인이 결정나지 않음으로서 그의 [[백악관]] 입성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수개표를 수십번씩 해도 죄다 오차범위 안에 들어 누가 이겼는지 확정할 수가 없었던 것. 덕분에 취임식 전전날까지도 결과가 나지 않는 사태까지 온다.(...) 그리고 최종 결과는 [[러더퍼드 B. 헤이스]] 항목에서 보다시피 위의 3주가 [[미국 공화당|공화당]] 승리로 결정나면서 결국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불과 선거인 1명 차이로.'''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득표에서 이겼는데 대통령이 안 되다니! 안돼!]]~~ 하지만 상대측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게, 당시 남부에서도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당시만 해도 공화당 지지가 높던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한 것은 사실이었고, 애초에 흑인에 대한 투표 방해가 없었다면 선거인단이나 득표율이나 틸던이 깔끔하게 졌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한 분석에 따르면 불법적인 폭력이 없었을 경우 이들 주 3개 중 2군데에서 공화당이 이기고 1군데에서 민주당이 이겼겠지만 다른 주에서 공화당이 이겨서 헤이스가 정당하게 당선됐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http://archive.is/C7zhJ|Who Won the 1876 Election? Issue 9 of Buttons and Ballots, in Spring 1997.]] 어쨌든 남부인들과 틸던은 불만은 있었지만 [[러더퍼드 B. 헤이스|러더퍼드 헤이스]]가 내놓은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선거 결과에 승복한다. === 선거 이후 ===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 그는 ~~성질이 뻗쳐~~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런데 10년이나 더 산 것을 보면 빡친게 맞는 듯~~ 정계 은퇴 후에는 평범하게 자선 활동 등을 하다가 1886년 세상을 떠났다. == 여담 == 새뮤얼 틸던은 [[제임스 뷰캐넌]]과 마찬가지로 평생 '''[[독신]]'''이었다. 즉, 그가 대통령이 됐다면 두번째 [[미혼]] 대통령이 탄생했겠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외 링컨 이후 수염을 기른 대통령들에 대한 기록에서는 번갈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었을 듯 하다. 이때 낙선한 틸던의 복수(?)는 8년 뒤 같은 뉴욕주 주지사 출신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이룬다. 차이점은 틸던과 달리 클리블랜드는 당시 낙선했을 때의 입장이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재선 선거였다는 것. == 매체에서 == 1876년 선거의 부정을 고발한 고어비달의 소설 1876년에서는 대단히 선량한 인물로 나온다. 일부 지인들이 항의 시위와 무력 행동을 건의하자 그것을 말리는 대인배. 사실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그걸 예상하고 틸던을 반역죄로 체포하고자 미리 함정을 파 놓은 것을 간파한 것도 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북부의 대통령으로 임신(?!)했다는 언급이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