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텔스바흐 가문 (문서 편집) || '''{{{#FFF 비텔스바흐 가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include(틀:역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include(틀:역대 팔츠 선제후)] [include(틀:역대 바이에른 공작)] [include(틀:역대 바이에른 선제후)] [include(틀:역대 바이에른 국왕)]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비텔스바흐 가문 문장.svg|width=100%]]}}} || [[파일: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기본 문장.svg|width=100%]] || ||<-2> {{{#ffffff '''비텔스바흐 가문의 문장'''}}} || {{{+1 {{{#0000FF '''Haus Wittelsbach'''}}}}}} [[독일]]의 [[라인란트팔츠|팔츠]]와 [[바이에른]]을 지배한 가문. == 역사 == 11세기 무렵 남독일 지방을 통치하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분가로 시작했다. 본가인 바벤베르크 가문은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와 같은 조상을 두고 있으며, 동프랑크 왕국의 [[프랑켄]] 공작위를 하사받아 독일 땅에 정착한 분파였다. 즉, 까마득한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프랑스의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와 형제 관계가 된다. 다만 바벤베르크 가문은 [[위그 카페]]가 왕으로 등극하기도 이전 [[프랑크 왕국]]의 [[로베르 왕조]]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카페 왕조 계열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며, 천 년 전 조상이 같다는 정도이다.[* 다만 흔히 바벤베르크 가문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 이 가설은 학자들이 로베르 가문과 관련 있는 프랑켄 바벤베르크와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 11세기에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하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친족으로서 [[오버바이에른]]에 터전을 잡고 세력을 키워나갔고, 1180년에 바이에른 [[궁정백]]이었던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바이에른 공국[* 작센을 통치하던 [[하인리히 사자공]]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1세는 작센 공국은 해체시켜버렸고, 바이에른 공국은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수여했다.]을 하사받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오토 1세의 아들 루트비히 1세 공작은 결혼을 통해 1214년, [[팔츠 선제후국|라인 궁정백령]]을 상속받아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14세기에는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으로 선출되면서 유럽의 명문가 반열에 올라섰다. 이 시기에 비텔스바흐 가문은 [[브란덴부르크]]와 [[플란데런]]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 사후 팔츠계와 바이에른계로 갈라졌으며 루트비히 4세의 형 루돌프의 가계로 비교적 단일하게 상속되었던 팔츠계와 달리 루트비히 4세의 여러 자녀들에게 분할상속된 바이에른계는 심각하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금인칙서#s-2.8|1356년의 금인칙서]]에서 팔츠와 달리 바이에른계는 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그나마 바이에른계가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도 1371년, [[카를 4세]]에게 빼앗겼다. 팔츠계는 1400년, [[루프레히트 3세]]가 [[독일왕]]으로 즉위하기는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으며 루프레히트는 사후 [[팔츠 선제후국]] 본토는 맏아들 [[루트비히 3세(팔츠)|루트비히]]에게, 차남 요한[* 아들 [[크리스토페르 3세|크리스토프]]가 [[칼마르 연합]]의 국왕으로 즉위했다.]에게는 [[오버팔츠]]의 노이마르크트를, 3남 슈테판에게는 지메른-츠바이브뤼켄을, 막내 오토에게는 모스바흐를 분할상속하였다. 이 가운데 노이마르크트와 모스바흐는 금방 대가 끊겨 본가로 회수되었고 지메른-츠바이브뤼켄은 슈테판의 장남 프리드리히의 지메른계와 3남 루트비히의 츠바이브뤼켄계로 갈라져 지메른계가 본가의 대가 끊어진 1559년부터 팔츠 선제후가 되었다.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직계는 [[종교개혁]] 당시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팔츠)|프리드리히 2세]]와 조카 [[오토 하인리히]]가 [[루터교회|루터파]]로 개종했다가 지메른계의 [[프리드리히 3세(팔츠)|프리드리히 3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에 이바지한 선제후다.]는 [[개혁교회|칼뱅파]]로 개종했고,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루트비히 6세]]는 다시 루터파로 개종했다가 루트비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4세(팔츠)|프리드리히 4세]]는 다시 칼뱅파로 개종하는 등 팔츠 선제후국은 선제후 개인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1583년, [[쾰른]] [[선제후]]의 [[칼뱅파]] 개종으로 인해 터진 쾰른 전쟁에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개입하여 승리함으로써, 1761년까지 장기간 숙질계승의 형식으로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직]]을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세습하였다. 이후 1618년 발생한 [[30년 전쟁]]때 신교도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아 [[보헤미아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단 이틀 차이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前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격[* [[반역죄|황제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명목으로 침공했다.]으로 보헤미아에서 쫓겨나면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제후 권리는 박탈당했고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 당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지간이었다.]에 넘어갔갔다. 그러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선제후 지위를 되찾으면서 선제후 가운데 한 가문에서 '''세 개'''의 선제후직을 유지했지만[* 다만 팔츠계와 바이에른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 시절부터 상속 문제를 두고 으르렁거렸고 [[금인칙서#s-2.8|금인칙서]] 제정과 [[종교 개혁]]으로 완전히 갈라서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결국 1777년 바이에른 계통은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단절되었다. 팔츠계 또한 지메른 분가가 17세기 후반에 단절되면서 계승에 잡음이 생겨 [[9년 전쟁|팔츠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결국 팔츠-줄츠바흐 계열의 [[카를 테오도어]][* [[하이델베르크]]의 카를 테오도어 다리(Karl-Theodor-Brücke)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가 팔츠와 바이에른을 모두 물려받으며[* 중간에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이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월경지였던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와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니더바이에른]]을 바꾸려는 과정이 공개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카를 테오도어의 바이에른 상속 자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지는 않았다.] 종결되었고, 카를 테오도어의 가장 가까운 남계 친척이자 손녀 사위이기도 했던 팔츠-츠바이브뤼켄 계열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막시밀리안 요제프]]가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줄을 잘 서면서 팔츠-바이에른 선제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단 1대로 그쳤지만(1440~1448) 팔츠 계통에서 [[덴마크]]를 중심으로 하는 [[칼마르 연합]]의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한때 [[스웨덴]] 왕가이기도 했으며(1654~1720)[* 팔츠 계열 '''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으로, 바사 왕조의 명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외동딸, [[크리스티나 여왕]]이 독신을 고수하여 그녀의 고종사촌, 즉 구스타브 아돌프의 조카 [[칼 10세 구스타브|츠바이브뤼켄 궁정백 카를 구스타프]]에게 양위함으로써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그리스 왕국]]의 국왕[* 그리스의 [[오톤]]. 이쪽은 1832년에 추대되어 1대 30년 만에 폐위되고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오톤에겐 자녀가 없었던 관계로 만약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오톤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다면 오톤의 동생 루이트폴트가 그리스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은데, 루이트폴트의 장남이자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루트비히 3세를 시작으로 루이트폴트의 후손들이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 자리를 계승하기 때문에 현 수장 프란츠는 그리스의 왕위 요구권도 가지고 있다.]까지 배출한 집안이다. 한국에 잘 알려진 [[네임드]]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유명한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가 있다. == 역대 수장 및 왕위요구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바이에른 왕국, 문단=5)] 2023년 현재의 가문 수장은 [[프란츠 폰 바이에른]](1933~)이다. == 기타 ==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같은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대대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유전병[* 특히나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잦은 [[근친혼]]으로 인해 피가 썩 좋지는 못했다.]으로 내려오고 있다.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2세]]의 남계 후손을 '정통성 있는 스코틀랜드의 왕'[* 및 잉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왕이다. [[노르만 왕조]]의 [[윌리엄 1세]]와 [[헨리 1세]] 이후로 잉글랜드 국왕이 [[노르망디 공국]] 공작을 겸하게 되었으므로 노르망디 공위 요구자이기도 하다.]으로 떠받드는 [[자코바이트]]의 '왕'[* 사실 이쪽도 남계 후손이 세 번이나 끊겼다. 1807년에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가 사망한 뒤로는 나중에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가문]]으로 갔다가, 사보이아 가문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1840년에는 여계를 통해 [[합스부르크 왕조]](본가가 아니라, [[모데나 레조 공국]]의 합스부르크에스테 분가)로 갔다가, 이 가문도 남계후손이 단절되면서 다시 여계를 통해 1919년에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자코바이트의 계승권이 넘어갔다. 다만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가 사망한 뒤로 이 가계의 후계자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 요구를 하지 않고 있다. 최근 이루어졌던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때문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후손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는게 가능하냐는 주제로 영국 신문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자코바이트의 주장대로라면 현 가문의 수장인 프란츠 공이 프랜시스 2세로서 정통성이 있다.]이 비텔스바흐 가문의 현 수장이자 대표자인 프란츠 공이다. 다만 프란츠 공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그가 사망하면 동생인 막스 공이, 그 다음은 막스 공의 맏딸인 조피가 자코바이트의 수장으로 추대된다고 한다. 조피는 [[리히텐슈타인]]의 공작인 [[한스 아담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알로이스 필리프 마리아|알로이스 공세자]]의 아내로 차기 리히텐슈타인의 공작부인이자 자코바이트의 추정 상속자라는 지위를 동시에 가지게 된다. 단, 비텔스바흐 가문은 [[살리카 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자코바이트 계승권과는 별도로 가문의 수장은 프란츠 공과 막스 공의 6촌인 루이트폴트가[* 프란츠 공의 증조부인 [[루트비히 3세]]의 3남 프란츠 왕자의 장남 루트비히의 아들이다. 루이트폴트의 어머니가 프란츠 공과 막스 공의 아버지 알브레히트의 이복 여동생이기 때문에, 고종사촌이기도 하다.] 이을 예정이다. 현재 자코바이트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비텔스바흐 가문이지만, 막상 [[영국]] 왕위계승법이 정립되었을 때 자코바이트에 대항한 정통 후계자 또한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다. 1701년 개정된 왕위 계승법에 따라 팔츠 선제후국 출신으로 하노버 선제후비였던 [[팔츠의 조피|조피]](1630~1714)가 왕위 계승자가 된 것. 잘만 하면 스튜어트와 하노버 사이의 징검다리 왕조로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왕이 등극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피는 이미 매우 고령이었기 때문에 만 84세의 나이로 앤 여왕보다 2개월 먼저 사망하여 여왕이 되지는 못했다. 이후 그녀의 아들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를 계승했다. 정작 현재 비텔스바흐 가문은 자코바이트 따위에 아무 관심이 없다.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조차도 '''"가설에 불과하며 우리 비텔스바흐 가문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애초에 자코바이트 자체가 19세기 이후로 유럽 왕실 사이에서는 [[퇴물]] 취급 당한 운동이며, 더욱이 [[작위 요구자]]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정 가문이 무슨 작위를 자칭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으로 여기며, 이들이 진지하게 그 작위를 법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를 대상으로 그 작위를 요구하는 자가 나타나도,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의 주범인 [[하인리히 13세]]처럼 같은 가문 내 사람들에게조차 무시당할 뿐이다.[* 물론 [[왕정복고]] 여론이 드높았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부정선거]]와 표적수사로 인해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억울하게 복고의 기회를 놓친]] [[알바니아]]의 [[레카 1세]]의 경우는 여론의 지지를 받는 편이고, 간혹 왕정복고 여론이 높거나 복고론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복고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 작위 부활의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없는 상황에서 그냥 가문의 혈통만 유지하는 수준에서 조용히 사는 걸 택하는 것이다. == 가문의 유명인 ==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 * [[독일왕]]이자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 * [[칼마르 연합]]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이자 팔츠노이마르크트 궁정백 [[크리스토페르 3세]] *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프랑스 역대 왕비|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 팔츠 선제후이자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프리드리히 5세]] *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 * 프랑스 왕태자 [[그랑 도팽 루이]][* [[루이 14세]]의 아들이다.]의 아내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루이 14세]]의 동생이다.]의 아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 [[칼 11세]], [[칼 12세]], [[울리카 엘레오노라]]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 *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내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어머니 [[조피 프리데리케|조피 대공비]] *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 [[오톤]] * 건축왕으로 유명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바이에른)|루트비히 2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 [[제1차 세계 대전]] 원수이자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루프레히트]] [[분류:비텔스바흐 가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